70화. 묵고 가란 뜻인가요?
그녀는 자신이 뜨끈한 물이 잔뜩 받아진 아주 커다란 욕조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어?”
문제는 그녀가 욕조 벽에 기댄 것이 아니라 공작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놀라 허둥지둥 몸을 빼려는데 그가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쉬이…. 가만히 있어요.”
양쪽 팔이 모두 잡히자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그가 놔주지를 않았다.
“저, 놔… 주세요.”
“물에 담그면 안 됩니다. 상처가 덧날 겁니다.”
“아.”
알고 보니 손이 물에 닿을까 직접 붙들어 고정시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처라. 인식을 하는 순간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바깥에 있을 땐 손이 얼어붙어서 오히려 잘 몰랐다.
“그래요. 그리 들고 있어요. 이제 몸은 녹았으니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정신을 차린 사이나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옷은 입은 채였다. 입고 있던 외출복 상태 그대로 그녀를 담근 모양이다.
하긴, 옷을 벗겼으면… 큰일이지.
공작은 그녀가 의식이 없어 물 안으로 미끄러질까 봐 같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손이 물에 잠길까 봐 자세를 잡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팔을 내 목에, 그래요. 감아요.”
공작은 사이나의 손이 물에 닿지 않게 잘 감으라고 지시하며 그녀를 안아 욕조 밖으로 나왔다.
주루룩. 옷자락이 흡수했던 물을 도로 뱉어내며 주변이 흥건해졌다.
피부에 척 들러붙은 젖은 옷을 입은 상태로 맞붙어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 그는 상체에 재킷을 벗고 흰색 셔츠만 입은 상태라, 들러붙은 천 아래에 꽉 짜인 근육의 형태가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민망해서 사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
고개를 들자 이번엔, 그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몸을 훔쳐본 것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새하얀 속눈썹이 드리운 청명한 눈동자가 또다시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보는 동안 시시각각 짙어지는 눈동자가 진지하게 뭔가 말을 거는 듯하여, 가슴이 수런거렸다. 사이나는 슬쩍 시선을 흘리고 말았다.
“저어… 고맙습니다.”
“…….”
“또 도움을 받고 말았네요.”
“흠, 고마우면….”
공작은 말을 하다 말고 한참을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허공을 보고 있던 사이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위험한 행동은 좀 그만 하도록 해요.”
그리고 팔을 내려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으앗!”
물기를 한껏 머금은 드레스가 추욱 쳐지며 사이나에게 중력을 선사했다. 드레스가 몸을 짓누르는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워 잠깐 휘청거렸다.
자신은 옷 무게만으로도 이리 무거운데, 그는 무겁지 않았던 걸까?
“이런.”
그가 허리를 감아 지탱해준 덕분에 주저앉는 것은 모면했다.
…다시금 셔츠가 착 달라붙은 그의 가슴팍으로 시선이 향하게 된 것은 문제였지만 말이다. 젖은 몸을 보는 것이 이리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그나마 자신의 드레스는 색이 짙고 도톰한 재질이라 살이 비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하녀를 불러오겠습니다. 드레스가 무거워 혼자 벗기는 힘들 것 같군요.”
“네에…….”
사이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뺨 위로 그의 손등이 터억, 닿았다.
“…!”
“해동은 잘된 것 같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요.”
…해, 해동이요?
깜짝 놀란 것이 무색하게도 아주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너무 거리낌 없이 막 만져대는 거 아니야?’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이 남자, 은근히 손이 빨랐다.
* * *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고 깨끗하게 씻김을 당한(?) 사이나는 이후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아가씨.”
그러고 보니 여기는, 크레이머 공작저였다. 드보프가보다 이쪽이 더 가까워 이리로 온 걸까?
그렇다고는 해도 방을 왜?
“묵고 가란 뜻인가요?”
도움이야 받았지만 굳이 머무를 필요까지는 못 느낀 사이나가 의문을 표했다.
하녀가 대답을 하려던 차, 공작이 등장했다.
“이리 와요.”
“…네?”
“바깥을 한번 보십시오.”
사이나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섰다.
“…세상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지금은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
바깥에는 눈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쌓여 있었다. 얼핏 봐도 무릎 이상의 높이였다. 그것도 모자라 여전히 내리고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같은 황도 내에 있으니 어떻게든 뚫고 돌아가려면 가겠지만, 보나 마나 엄청난 고난이 따르리라. 그리 먼 거리는 아니라고는 해도 쌓인 눈의 높이를 보자 바로 의욕이 꺾였다.
“…집에서 걱정하실 텐데.”
“서신을 보내놓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서신…? 이 날씨에?
서신을 보낼 수 있을 정도면 그녀도 갈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콘스탄틴은 가볍게 웃더니 그녀의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답변했다.
“사람이 아니라 모레프를 보냈습니다.”
“…네?”
수호령을 전령으로 쓰다니…. 보나 마나 드보프 백작의 눈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그것보다… 상처를 좀 봅시다.”
그런 것은 큰일이 아니라는 듯, 공작은 사이나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잠시 여기 있어요. 약을 가져오지요.”
그가 일어나더니 한쪽 벽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아까 들어왔던 출입구가 아니고 다른 문이었다.
‘…저 문은 뭐야?’
얼핏 열린 틈새로 보이는 문 너머는, 마찬가지로 방인 것 같았다.
‘잠깐. 지금… 저기 연결된 방인가?’
공작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다시 열린 틈 사이로 훔쳐본 저쪽 방은 남성미가 잔뜩 풍기는 스타일이었다.
아마도…… 공작의 침실로 추정되었다.
‘아니, 그럼 여긴… 혹시 공작부인의 방 아니야?’
손님방치고 지나치게 좋아 보인다 싶기는 했다. 그런데 공작부인의 방이면…….
사이나는 잠시 뇌가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대체 어느 가문에서 손님한테 그런 방을 내주겠어.’
뭔가 이상했지만, 사이나는 억지로 납득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라 되레 물을 수가 없었다.
애써 외면하는 사이나 앞에 공작이 상자 하나를 내려놓더니 뚜껑을 열었다. 구급함이었다.
“손을 보여 주십시오.”
그녀의 앞에 커다란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사이나는 약간 쭈뼛대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퐁. 열린 유리병에서 녹푸른 색의 점도 높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전에 공작이 주었던 상처용 포션과 같은 것으로 보였다.
사이나의 왼손바닥 위에 오목하게 부어진 액체를 그가 양 엄지를 이용해 살살 발라 폈다.
“읏.”
감촉이 이상했다. 아까만 해도 쓰라렸던 손바닥이 지금은 가렵고 찌릿했다.
“아픕니까?”
“…아뇨.”
포션은 뽀얀 피부만을 남기며 깔끔하게 스며들었다. 오두막의 잔해를 헤치며 자잘하게 생겼던 상처들이 하나둘 스르르 사라졌다.
이번에는 오른손의 차례.
오른손의 상처는 왼손에 비해 꽤 깊고 심각했다. 엄지와 검지 가운데에 오목한 부분부터 손바닥 중앙까지 길게 갈라진 상처는 자상처럼 깔끔한 것이 아니라 찢긴 것처럼 생겨서 더 아파 보였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찌르르한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처가 깊습니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는 듯,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숨이 사이나의 오른손에 닿아 피부를 간지럽혔다.
움찔, 굽어든 손가락에 다시금 상처가 아려왔다.
“가만히 있어요.”
쪼르르 쏟아진 포션이 아까보다 많았다.
공작은 왼손을 문지를 때보다 더 살살, 섬세하게 상처 위로 포션을 덧발랐다. 녹푸른 액체가 열상 위로 스미며 차츰 속살을 메꾸어 갔다.
확실히 상처가 깊고 불규칙해서인지 왼손보다 아무는 속도가 더뎠다. 그래도 찌르는 듯한 통증은 한결 줄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왼손의 배 이상의 시간 동안, 그는 오른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통증이 가시자 그가 매만지는 감촉은 점차 다른 느낌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손을 만지는데 어째서 어깨가 자꾸 움찔움찔 굽어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나는 이제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훑는 그의 모습에 말은 못 하고 그저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손바닥에 포션이 모두 스며든 것이 가시적으로 선명해지자, 공작은 손을 뒤집어 손등을 확인하는가 하면 손가락을 벌려 사이사이를 확인했다.
손가락 사이의 예민한 살을 그가 매만지며 지나가자 어째서인지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그, 그만요.”
그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간지러워요…….”
왠지 볼 부근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라 사이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은 내렸으나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이 중첩될수록 숨이 더 가빠지는 것 같았다. 점차 심장이 조여든다 싶을 때 즈음, 그가 몸을 틀며 구급함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마 안 있어 사이나의 오른손엔 두툼하게 붕대가 감겼다.
“…왜 붕대를 감으세요?”
“손을 쓸까 봐 그럽니다.”
“다 아물었던데, 쓰면 안 되나요?”
사실 완전 다 아문 것은 아니고 상처 부위의 살이 분홍빛으로 흔적이 좀 남기는 했으나, 흉터가 안 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다 나은 게 아닙니다. 내부 조직까지 완전히 아물려면 며칠간 더 약을 흡수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 거예요?”
“그래요.”
하필 오른손이라 아예 못 쓰면 상당히 불편할 텐데…….
그가 어찌나 튼튼하게 붕대를 감아뒀는지, 절대 손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주로 쓰는 손이 오른손입니까?”
“네.”
“흠….”
“그런 의미로 손가락은 좀 빼주시면 안 될까요?”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