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게, 수호령의 힘
황도 페이즐.
북쪽으로 큰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드보프 영지는 페이즐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경계에 북부에서 내려오는 산의 끝자락이 있었다.
황도를 벗어나려면 그 산자락의 영향으로 꽤 넓게 퍼진 숲길을 지나야만 했다.
숲길이기는 하나 황도 근처라 길이 꽤 잘 깔린 편인 데다 가장 지름길이라 자주 이용하는 경로였다.
우박을 피해 급히 숲 안쪽으로 들어온 모양인데 보아하니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박은 우박대로 맞고, 마차는 망가지고, 나무가 흔들리며 눈발을 흩뿌리는 데다, 숲 안이라 더 춥고 서늘했다.
이리 날씨가 궂을 줄 알았다면 다른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출발을 안 했겠지…….’
눈보라를 헤치며 다소 이동했을 때였다.
저 너머에서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아무래도 눈 때문에 무슨 사고가 벌어진 모양이다.
“루퍼트 경. 들었죠? 저쪽으로 가요.”
몰랐으면 모르되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제겐 아가씨가 더 우선입니다.”
“얼마간은 괜찮아요. 난 추운 거지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바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스밀라가 탄 말은 계속 가도록 했다. 담요며 숄을 둘러주기는 했으나, 옷을 갈아입지는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시각각 젖은 부분이 얼어붙고 있을 것이다.
“마을이 보이면 아무 집에나 찾아가서 몸을 녹이도록 해. 나중에 사례한다고 하고. 그리고 이쪽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려줘.”
“예. 아가씨.”
파랗게 질린 입술로 겨우 대답한 스밀라가 마부와 떠나갔다.
사이나와 루퍼트는 비명이 들렸던 쪽으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외침이 계속 들려와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도착해서 보니 약초꾼이나 사냥꾼들이 쉼터로 쓰는 오두막이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진 모양이었다.
황도가 위치한 중부지방은 애초에 눈이 그리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건물이 허술해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안에 몇 명이 있었습니까?”
말에서 내리자마자 루퍼트가 이것저것을 물었다.
한 노인과 어린 남자아이가 울며 어설프게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는데, 자초지종을 들으니 두 명이 안에 깔렸다고 했다.
남자아이의 아빠와 동생이 무너지기 전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노인과 아이의 아빠는 같은 마을 사람이고 말이다.
“아가씨! 기사님! 제발 아빠랑 동생을 살려주세요!”
아이가 울며 빌었다.
“울면 뺨이 얼어붙어서 더 춥단다. 얼른 같이 이걸 치우자.”
사이나가 아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도울 만한 사람이 없어 그녀 역시 한 팔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루퍼트가 노인과 아이에게 우선순위 지시하며 일을 시작했다. 한쪽 벽만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상태라 잘못하면 2차 붕괴가 생길 수 있어서 그 부분을 주의시켰다.
그사이에도 눈이 쏟아지듯 내려 어느새 발목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내렸던 비가 건물 더미들과 엉겨 붙어 얼어버렸다. 잔해들끼리 떨어지지가 않아 더 난항이었다.
“앗.”
사이나는 억지로 판자를 잡아당기다가 크게 손이 찢기고 말았다.
‘아, 이런…….’
손이 얼어서인지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뚝뚝. 피가 떨어졌다.
‘아직 살아는 있겠지?’
사이나는 소매를 끌어내려 손을 감싸고는 다시 판자를 들었다. 마음이 다급하니 손이 더 엇나가는 것 같았다.
작은 오두막이라 금방 치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진척이 아주 더뎠다. 장정이라고는 루퍼트 경뿐이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세 명의 인원이 더 있었지만, 하나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고, 하나는 어린아이, 하나는 근육이라고는 없는 귀족 영애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마음은 다급했지만 손은 점점 느려졌다. 손끝과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감각 역시 점점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필 오늘은 장갑도 안 끼고 나왔네.’
그사이에도 눈은 기함할 정도의 속도로 쌓여 무너진 오두막의 흔적을 가릴 정도였다. 건물 잔해들의 형태도 쌓인 눈에 가려져 형태가 모호해졌다.
그 탓에 발을 디딘 곳이 더미들의 틈새인 줄 몰랐다. 우지끈, 몸이 꺼지며 나무들 사이에 발이 끼였다. 순간, 사이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으앗!”
눈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뾰족하고 날카로운 나무 조각들이 가득한 곳으로 쓰러지기 직전.
“또….”
누군가가 사이나의 허리를 감아 올렸다.
“떨어지려던 참입니까.”
크레이머 공작이었다.
“……고, 공작님?”
아니, 이리 외딴곳에 어찌 그가 나타난 것일까?
사이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파랗게 질렸군요.”
공작은 찌푸린 눈으로 사이나를 살폈다.
“다치기까지…….”
빨갛게 물든 소매를 보며 그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아가씨!”
변고를 눈치챈 루퍼트가 얼른 다가왔다.
공작은 사이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 주변을 살폈다.
“공작님!”
그녀 앞에 무릎을 대며 낮춘 자세에 놀라 사이나가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더 강하게 그녀를 붙들 뿐이었다.
“파편에 다칠 수 있으니 얌전히 있어요.”
그의 손아래에서 이상하게 끼어있던 다리가 얌전히 빠져나왔다. 커다란 손이 드레스 아래 단단하게 발목을 휘감은 느낌이 매우 야릇했다.
“으앗.”
그가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을 때는 더 야릇했고 말이다.
순간 뒤로 젖혀진 몸의 균형에 사이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공작은 사이나를 오두막과 좀 떨어진 곳에 내려주고는 다시 돌아왔다.
“이걸 왜 치우고 있는 거지? 안에 사람이 있다던가?”
꼬마와 노인은 갑자기 등장한 거대하고 신분 높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예. 이 아이의 아빠와 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답한 것은 루퍼트. 사이나가 안전해진 것을 보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흠. 그렇군.”
공작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러서라.”
그러더니 짧게 명령했다.
어디로 물러서라는 것인지 몰라 되묻자, 공작은 셋 모두 사이나가 있는 쪽으로 가라고 했다.
사람들이 이동하자 공작은 더미 앞에 섰다.
그가 왼손을 뻗으며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자, 등 뒤에서 검은 기운이 올라와 그의 왼팔을 타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여러 줄기의 검은 기운이 나선형으로 휘돌며 퍼지더니 두껍게 쌓인 눈발을 제일 먼저 날려버렸다.
화아악- 눈이 날아가며 하얀 장벽이 되어 퍼졌다.
그다음은 잔해들이었다. 휘리릭, 얽혀든 검은 선들이 나무판자와 통나무 등을 휘감아 허공으로 띄우더니 역시 저 멀리 던져버렸다.
넷이서 온 힘을 다해 매달렸어도 힘들었던 구조 작업이, 공작이 나서자 순식간이었다.
놀라운 광경에 다들 입만 떡 벌렸다.
‘이게… 수호령의 힘.’
4대 공작가의 권력의 근간을 약간은 엿본 기분이다.
“아빠아!”
잔해가 치워진 곳에는 과연 둥글게 몸을 만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아빠라는 남자가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 안은 채 매몰된 듯 보였다.
루퍼트가 얼른 가서 남자를 뒤집어 숨결을 확인했다.
“다행히, 살아있군요.”
“으허엉! 아빠…….”
꼬마가 동생의 이름과 아빠를 울먹이며 달려갔다.
“다행이다…….”
구조하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려서 내심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도 괜찮아 보였다.
“경은 이들을 안전한 곳까지 이끌어 수습하게. 영애는 내가 모시지.”
구조자들을 살피고 있던 루퍼트에게 콘스탄틴이 말했다.
“예? 하지만…….”
공작의 뒤로 다시금 검은 형태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사자의 형상을 이루었다. 수호령 모레프였다.
“파랗게 질린 것이 곧 쓰러질 것 같군.”
공작이 사이나를 잡아 올려 모레프 위로 앉혔다.
“고, 공작님?!”
수호령 위에 올라타다니…….
꾹 참고 있기는 했으나 죽을 것 같던 추위마저 잠시 잊을 정도로 놀라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파르란 사이나의 안색을 보니 정말 심각해 보였는지 루퍼트가 표정을 굳혔다. 공작은 짧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사이나의 뒤로 올라탔다.
“가자.”
“으앗!”
순식간에 모레프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반동에 쏠린 몸이 뒤로 튕기며 공작의 품에 포옥 안겼다.
“몸이 지나치게 찹니다.”
공작이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망토를 돌려 앞으로 두르고는 빈틈이 없어지도록 꽈악 안았다.
“너, 너무…….”
“얌전히 있어요. 바람이 차니.”
모레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주변 광경이 말 그대로 휙휙 지나갈 정도였다. 떨어지면 저 멀리 튕겨져 나갈 것 같은 엄청난 속도에 자동으로 몸이 굳었다.
거의 날듯이 뛰어가는 모레프는 쌓인 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날 잡아요.”
긴장된 몸을 느꼈는지 공작이 말했다. 사이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휙휙 지나가는 속력에 무섭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여 몸을 틀어 그의 허리를 잡았다.
약간 움찔한 그가 다시금 망토로(이번에는 머리 위까지) 그녀를 잘 싸매더니 꽈악 안았다.
품 안에 단단하게 고정이 되자 확실히 덜 무서웠다. 머리 위까지 망토가 감싸자 바람도 어느 정도는 상쇄되어 마치 천막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사이나는 그 상태로 눈을 꼬옥 감았다.
추위에 꽁꽁 얼었던 몸. 긴장으로 누적되었던 피로감이 갑자기 물밀듯 찾아들었다.
사이나는 감은 눈 아래로 의식이 잠겨 드는 걸 느꼈다.
* * *
“으음.”
짧게 의식을 잃었던 지각이 주는 위화감을 느끼며 사이나는 눈을 떴다.
간질간질. 얼었던 몸이 녹으며 다시 혈류가 빨라지는 감각은 묘한 간지러움을 선사했다. 사이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깼습니까?”
귓가를 묵직하게 바로 파고드는 목소리에 목 뒤가 쭈뼛해졌다. 사이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상황을 파악하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