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설상가상, 갈수록 태산
페이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황성.
황도 어디에나 그 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일까.
높디높은 탑 꼭대기에 마치 눈이 달려, 움직이는 사이나를 내내 따라다니며 주시하는 것 같았다.
황성에서 나왔음에도 그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질척하고 찝찝한 기분은 타운 하우스에 도착해서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마차를 준비하세요!”
결국 사이나는 바로 마차를 준비시켰다.
델본으로 가야겠다.
황자와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싶기도 했고, 혼자서 끙끙대기보다는 가족에게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워진 시간에서 사이나는 딱 그 반대였다.
데뷔를 치렀으니 성인, 그러니 스스로 친 사고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전히 망했지.’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을 거다.
데뷔를 치렀다고 해도 열여덟. 세상 물정 모르는 핏덩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때의 자신은 어째서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불안하고 희망이라고는 없던 시간 속을 또다시 혼자 걷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경우는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고 가족들이 잘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말이지.’
오히려 미친 듯 화를 더 냈었다. 그녀의 불행이 다른 가족마저 불행하게 하는 듯했다.
아주 잘못된 결정이었던 거다.
“…오늘 날씨가 왜 이렇담.”
마음이 불안하고 스산해서일까. 날씨도 어째 끄무레한 것 같았다. 육중한 마차가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거세고 날이 어두웠다.
“그러게요. 날이 심상치 않군요.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럇!”
분명 아침만 해도 약간 좀 서늘하다 싶은 정도였는데, 오후가 되자마자 급속도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내일 갈 걸 그랬나.’
황성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괴이해 뛰쳐나오기는 했는데, 어째 예감이 좋질 않았다.
해까지 져버리면 더 난감해질 것 같다. 루퍼트도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는지 말을 채찍질하며 속력을 높였다.
타닥. 타다다다닥.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장을 두들겨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비까지 오고 난리네.”
빗소리가 들리자 사이나는 마차 창문을 약간 열어 루퍼트를 살폈다.
“경. 우비도 없을 텐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비 오는 날이라고 훈련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나마 망토에 어느 정도 방수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머리 부분은 사정없이 빗물에 노출되고 있었다.
“그보다 아가씨의 선물이 젖어 상할까 봐 걱정이군요.”
그러고 보니 루퍼트는 사이나가 선물한 피불라를 착용하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것이 잘 어울려 보였다.
“그 정도로 상하겠어요? 녹이 스는 소재는 아닌 것 같으니 걱정 말아요.”
“그보다는 이거 말입니다.”
루퍼트가 검 끝에서 대롱거리는 술 장식을 들어 보였다.
“아.”
저것도 샀었지.
근데 루퍼트가 갑자기 그것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경?”
“비가 그치면 다시 달아야겠습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풀어낸 술 장식을 품 안에 깊이 넣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저 장식이잖아요.”
“아가씨가 직접 고르신 선물 아닙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요.”
“음. 다른 선물도 잘 쓰고 있죠?”
당연히 연고를 염두에 둔 질문으로 사이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연마기요? 네. 그거 좋던데요.”
“…….”
아, 연마기도 있었지.
사이나는 머쓱해져서 이 정도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 만하다는 듯 루퍼트가 웃더니 말했다.
“숙녀분이 남자 엉덩이 사정에 너무 관심이 많으시군요.”
“……네에?”
그는 당황한 사이나의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이리 말을 타고 있는 거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아, 장난이었구나.
연고가 성능이 좋았던지, 그의 엉덩이 근육이 매우 튼튼한 모양이다. 어느 쪽이든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보다 소나기가 아닌 것 같아 걱정이군요.”
하늘을 살피며 루퍼트가 걱정했다. 과연 하늘 전체가 우중충한 것이 금방 지나갈 비구름은 아닌 것 같았다.
“워- 워-”
질척해지기 시작한 땅 때문에 혹여 미끄러질까 루퍼트가 속력을 늦추도록 지시했다. 그 사이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비가 들이칩니다. 창문을 닫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살짝만 열었음에도 빗살이 어찌나 굵은지 창문 아래로 빗물이 스며들어 줄줄 흘러내렸다.
사이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창문을 닫았다.
쏴아아-
하지만 빗살은 점점 더 굵어졌다. 이제는 숫제 쏟아지기 시작하다시피 한 빗줄기로 전방의 시야가 흐릿할 지경이었다. 마차의 속력은 더더욱 느려졌다.
‘…이거 계속 가도 되는 걸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랬으면 차라리 바로 돌아갔을 텐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터라 딱 애매했다.
습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차 안의 온도가 점차 떨어지는 것이 피부로 확연하게 느껴질 즈음…, 마차 위로 돌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났다.
“뭐, 뭐예요? 경?!”
텅! 터덩!
굉음이 점점 커지고 많아졌다.
“우박입니다! 문 열지 마십시오!”
우박? 이게 우박 소리라고?
마치 공중에서 누군가 돌이 가득한 바구니를 쏟은 것 같은데?
우박 덩어리가 얼마나 큰 건지 마차 전체가 울릴 정도로 소리가 큰 것은 물론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아가씨!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퍽! 퍼억! 마차 전체에 울리는 진동이 주는 감각에 약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이 맞으면 크게 상할 것 같은데, 바깥은 괜찮은 것일까.
“제기랄!”
걱정하기가 무섭게 루퍼트의 욕설이 들렸다.
“경! 괜찮은 건가요?!”
“창문 여시면 안 됩니다!”
하나 그는 창문을 열어 그를 확인도 할 수 없게 막았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말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갑자기 이 무슨 난리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나은지 고민하다가 사이나는 루퍼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을 열려던 찰나.
이히히힝-!
비명 같은 말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마차가 갑자기 기우뚱 기울어지며 크게 휘청였다.
“안 돼!”
“꺄악!”
안에 타고 있던 사이나와 스밀라 역시 기우는 방향으로 몸이 쏠리며 크게 부딪혔다.
“악!”
“스밀라!”
사이나가 벽에 처박혀 몸을 추스르는 사이, 스밀라는 그녀와 부딪힌 충격으로 열린 문짝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경! 스밀라가! 좀 도와주세요!”
기울어진 마차 벽면에 겨우 매달린 채로 사이나가 외쳤다.
“이럇!”
루퍼트가 급히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균형을 잃고 튕겨져 나간 몸이 바닥을 뒹군 통에 스밀라는 전신이 다 젖고 말았다. 아까 미친 듯이 쏟아졌던 빗물이 얼 듯 말 듯 한 상태로 온 땅에 흥건한 상태였다.
루퍼트가 스밀라를 부축해 일으켰으나 급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에 옷까지 젖은 스밀라는 급속도로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여기! 이거 둘러줘!”
사이나는 마차 내부를 뒤져 몸에 두를 만한 것을 다 뒤졌다. 다행히 숄이 하나 있고, 무릎 담요도 하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새 입이 얼은 듯 스밀라의 발음이 떨려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열린 문으로 들이치는 찬바람이 말도 못 하게 냉랭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잠깐 동안 미친 듯이 쏟아지던 우박이 그쳤다. 그사이 기온이 더 떨어졌는지 눈으로 변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아까 그 우박은 눈으로 변하고 나니 덩어리가 험악했던 만큼 입자가 큰 함박눈이 되었다.
게다가 소복소복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을 정도로 쌓이는 속도가 빨랐다.
“갈수록 태산이군요.”
루퍼트가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사이나가 타고 있던 마차는 이두 마차였다. 마차를 끌던 말 한 마리가 우박을 정통으로 맞고 넘어지며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단다. 그 여파로 마차가 길을 벗어나 도랑에 빠지며 바큇살이 부러졌고 말이다.
“바퀴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 데다 눈을 헤치고 달리려면 힘이 배로 들 겁니다. 마차는 버리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눈이 쌓이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서 마차를 가져가겠다고 지체하다가는 고립되기 십상일 것 같다고 했다.
“황도 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
“그쪽이 조금이라도 더 가깝나요?”
“예. 만약의 상황이 벌어질 시 도움받기도 그쪽이 더 나을 거고, 제설 작업도 그쪽이 더 활발할 테니까요.”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스밀라 때문이라도 얼른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사이나는 마차 안을 뒤져 방한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챙겨서 배분한 뒤, 루퍼트와 같은 말에 올라탔다.
이두 마차에서 분리한 다치지 않은 말에 마부와 스밀라가 탔고, 일행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안타깝지만 다리가 부러진 말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늘에서 들이붓는 것처럼 눈이 쏟아졌다. 보송해 보이던 눈송이도 한 번에 쏟아지니 금세 묵직한 방해물이 되었다.
이리도 갑작스러운 폭설이라니…….
‘전년부터 날씨가 좀 오락가락한 게 심한 것 같아요. 대체 왜 이런 건지…….’
갑자기 유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이나는 혼수상태로 누워있어 몰랐는데 작년부터 유독 이상 기온이 잦았다고 했다.
우기에는 이상하게 가물더니, 건기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질 않나. 유례없던 폭염이 찾아오질 않나. 그뿐 아니라 하루 동안에도 기온이 지나치게 오락가락해서 감기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도 했었다.
‘오늘 날씨도 이상 기온인가…….’
지워진 열여덟, 열아홉의 해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일행은 다시 황도 쪽으로 향하기 위해 말 머리를 돌렸다. 말을 재촉했으나 눈발을 헤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필 여기서 사고가 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