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뭔진 몰라도 당한 것 같다
사이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서 기다렸다.
한참을 그리 서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고 바람만 불었다. 바람을 따라 농밀한 꽃향기가 코를 스치며 지나갔다.
‘장미 냄새?’
또 장미인가.
황성 후원 중 하나인 듯한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실은 누군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인적 드문 후원 뒤쪽에 버리고 간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질 무렵,
“거기.”
누군가 나타났다.
“따라와요.”
아까와는 다른 여자였다. 이번에도 시녀인가? 하녀 복장은 아니니 그럴 확률이 높았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버려진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사이나는 여자를 따라 걸었다.
간만에 지나치게 많이 걸은 탓에 다리가 아프고, 하이힐까지 신은 탓에 발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어 불편해 죽을 것 같았지만, 참아냈다.
약간 더 걷자 황성 내에 있는 여러 궁들 중 하나로 추정되는 건물이 나왔고, 조금 더 걷자 건물 뒤편에서 궁 주인이 쓸 것으로 추정되는 가제보가 나타났다.
가제보 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사이나는 의아하다 못해 놀랍기까지 했다.
‘반즈 영애?’
사실 사이나는 내심 익명의 권력자가 황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유까지는 몰라도, 느낌상 그러했다.
근데 그녀의 예상이 틀렸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날 불러오라고 한 게 맞긴 한 건가?’
일레인 반즈는 사이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유령 취급을 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헤베타를 뵙습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무릎과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는데, 화답이 없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이나는 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억지로 버텨냈다.
싹둑. 싹둑.
방금 본 정경으로 보아 일레인 반즈는 꽃꽂이를 하는 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가지를 쳐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여전히 일어나라는 말은 없었다.
이마에 땀이 고이고 측면을 따라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리와 다리에 걸리는 하중을 도무지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을 때, 마침내 일어나라는 말이 들렸다.
“반갑군.”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로 일레인 반즈가 말했다.
사실 헤베타는 아직 황족이 아니라 묵례만 하고 일어났어도 되지만, 그녀의 영역에서 괜한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눈치껏 행동했다.
“황공합니다.”
사이나는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황성에서만 자라는 로열 로즈를 이용해 꽃꽂이를 하는 것이 내 취미라네. 매일 정성스레 장식해서 황자궁에 보내드리는데, 전하께서도 아주 좋아하시지.”
…자신의 특권에 대해 자랑하는 건가? 어느 포인트에서 부러워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애도 꽃꽂이를 좀 할 줄 아는가?”
“잘 못 합니다. 배우지도 못하였고요.”
배울 생각도 없었지만, 쓸데없이 일레인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그리 대답했다.
“귀족 영애의 소양인 꽃꽂이도 안 배웠단 말인가?”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백작 부인께서 안 계시니, 아무래도 소홀하였나 보군.”
어머니가 없어 못 배운 것이 아니냐는 말을 돌려 하자, 순간 욱했으나 참았다.
“내가 좀 가르쳐주지.”
“…….”
“저쪽에 있는 장미들을 색깔별로 다섯 송이씩만 좀 가져다주게.”
고개를 돌려 일레인 반즈가 말한 방향을 보자, 장미가 색색이 섞여 꽂혀있는 커다란 항아리 몇 개가 보였다.
한숨을 삼키며 사이나는 항아리 쪽으로 갔다.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으나 따로 장미를 담아 갈 만한 적당한 양동이나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뭘 가져다 달라고 말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냥 품에 안아 들고 가는 방법 외에는 없는 듯했다.
드레스 앞섶에 풀물이 들지도 모르지만 뭐, 어쩌랴.
사이나는 항아리에 손을 뻗었다.
‘우선 푸른색이랑…….’
사이나는 푸른 장미만을 골라 뽑아내었다. 장미 줄기들이 엉켜있어 잘 뽑히지 않았다.
“아, 꽃잎이 연약하니 꽃송이가 뜯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주문이 참 세세하기도 하다.
애초에 왜 이렇게 한 항아리에 잔뜩 모아 꽂아둔 것인지 모르겠다. 꽃꽂이를 목적으로 잘라낸 꽃들이라면 처음부터 분리해 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꽃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보니 틈새가 크지 않았다. 사이나는 별수 없이 꽃봉오리 아래 줄기 부분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줄기가 잡히면 힘을 주어 뽑아내는 식이었다.
두 가지 색의 장미를 다 모으고, 붉은 장미를 뽑아내던 중이었다.
마지막 한 송이가 뒤쪽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틈새를 비집으며 손가락을 넣으려다 보니 다소 무리를 하게 되었다.
“앗.”
가시 손질이 다 되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닌 것이 있었나 보다. 찔리는 느낌에 황급히 꺼낸 손가락 끝이 찢겨 피가 방울방울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그때, 불현듯 뒤쪽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갑자기 황자가 왜 나와?’
사이나의 등이 단번에 굳었다.
“아니, 일레인. 손님에게 이리 험한 일을 시키다니, 무슨 생각을 하였던 거요.”
“전하…….”
“사이나 영애가 다치고 말았지 않소.”
“…….”
황자는 일레인 반즈를 나무라는 동시에 사이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마치 전에 이름을 부르기로 허락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운 손에서 피가 나지 않는가, 쯧쯧.”
대뜸 다가온 황자가 사이나의 손목을 움켜쥐며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갑작스럽게 팔이 펴지며 품에 들고 있던 장미가 후두둑 떨어졌다.
“전하, 꽃이…….”
“장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처부터 치료해야지. 여봐라! 여기 당장 씻을 물을 대령하라!”
아까는 찾아도 보이지 않던 시종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제일 앞에 선 시종은 손에 커다란 수반을 들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대리석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한 묘한 질감의 수반이었다.
그 안에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수반을 보는 황자의 눈길과 사이나를 붙잡고 있는 손길 모두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전하. 손을, 놔 주십시오.”
“약을 바르기 전에 씻어야지, 응?”
시종 중 하나가 탁자 같은 것을 놓고 다른 시종이 그 위에 수반을 올리자마자, 황자가 사이나의 잡은 손을 억지로 당겨서 수반에 넣었다.
“읏.”
강한 악력으로 조여진 팔목 때문에 상처가 더 아픈 것 같았다. 손목을 조이는 힘 때문에 피가 멈추기는커녕 더 나오는 것도 같았고 말이다.
투명한 물에 사이나의 손이 들어가자 검지에서 새어 나온 핏방울이 발갛게 퍼져나갔다. 수반이 백색인지라 색 퍼짐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어?”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파아아앗-.
수반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물의 색이 변한 것이다.
피가 퍼졌으면 붉은색이 되어야 당연할 것인데, 수반 속의 물은 푸른색이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보라색 같기도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굳어 있는데 일레인 반즈가 크게 소리치며 다가왔다.
“……전하!”
사이나는 놀라 손을 빼며 뒤로 물러섰다. 황자가 잡은 손의 힘이 약해진 상태라 쉬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일레인 반즈의 얼굴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제 바로 앞에서…, 어찌요!”
그녀는 왜 이리 눈물지으며 원망 어린 시선으로 황자에게 호소하는 걸까.
반면 황자는 어딘가 희열에 찬 얼굴로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사이나는 이 대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둘 다 이상했지만, 특히 황자의 반응이 매우 이상했다.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수반에서 일어난 기이한 변화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푸른빛으로 변한 수색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졌다.
대체 남의 피로 뭘 한 거야…?
그 불안함에 사이나가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너!”
그녀의 움직임이 거슬렸는지 일레인 반즈의 시선이 사이나 쪽으로 돌아왔다.
악에 받친 눈빛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찢어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대체 자신이 무얼 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황족과 헤베타 앞인지라 마음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저쪽에서 먼저 물러가라고 허락을 해주어야 했다.
사이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물러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자초지종을 알아야 하겠지만, 당장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무슨 소리인가. 다친 곳을 치료해야지.”
“작은 피륙의 상처일 뿐입니다. 아프지도 않고요.”
“피가 나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 피를 이용해 무언가 하신 것은 전하시고요.
그녀가 다치자마자 등장한 황자, 준비된 것처럼 대령된 수반. 아무리 봐도 절대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이제 와 걱정하는 척인지 우스울 따름이다.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사이나는 무표정하게 반복했다. 무례하다 생각했는지, 황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은근히 나긋나긋한 맛이 없단 말이야?”
“…….”
“남자들은 뻣뻣한 여자보다 나긋나긋한 여자를 더 좋아한다네, 영애.”
“…….”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야. 미래를 위해서라도.”
딱히 결혼할 생각은 없어서,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만.
사이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쯧.”
사이나가 다시 말하자, 황자가 혀를 찼다.
“그리하게.”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리하라는 느낌의 허가가 떨어졌다.
황자와 일레인에게 차례로 예를 표하고 사이나는 그 공간을 벗어났다.
뒷덜미에 무언가가 얽힌 것처럼 찜찜했지만,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황녀궁으로 돌아온 사이나는 올 때 동행했던 기사와 사용인을 호출해 재빨리 황성을 벗어났다.
엄청난 찜찜함을 뒤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