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독대의 영광
무언가 하고 보니 포푸리 주머니였다. 섬세한 베일 같은 천 안에 푸른색과 붉은색의 꽃잎들이 가득하고 황금색 리본으로 마무리가 된 것이 아무래도 로열 로즈를 비롯한 여러 장미종을 이용해 만든 포푸리 같았다.
“어머나, 로열 로즈…….”
유모가 향기가 너무 좋다며 감탄했다.
똑같은 장미를 받았는데 느낌이 이리 다르다니…….
포푸리 주머니 외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뭔가 하고 보니 입구가 밀봉된 자기 단지였다. 겉에 붙은 마크를 보니 황성의료원에서 만든 상처에 바르는 연고인 듯했다.
두 가지 다 성능을 떠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품들이다.
일개 귀족 영애에게 이 정도로 섬세하게 신경을 쓴 선물이라니.
고맙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여, 사이나는 초대 때 가져갈 선물이 뭐가 좋겠느냐며 유모와 심각하게 이것저것 의논했다.
또 답장을 쓰는 동안, 사이나는 쓸 단어를 아주 세심하게 골랐다. 필체에도 평소보다 훨씬 신경을 썼음은 물론이다.
* * *
사이나는 하루 만에 바로 또 황도로 이동했다.
황녀 전하가 편하신 날에 찾아뵙겠다고 썼더니 바로 ‘그럼 모레는 어떠하냐.’고 회신이 온 것이다.
요즘은 어째, 델본에서보다 타운 하우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런저런 약속이 자꾸 잡히다 보니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지고 갈 선물을 챙기고, 기사와 하녀를 대동한 채 마차에 탔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황녀의 초대라니.
명예롭기는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는지 유모가 포치까지 따라와 배웅하며 인사를 했다. 바로 황성으로 갈 거라 유모는 따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황성에 도착했다. 초대장은 미리 루퍼트에게 맡겨둔 상태. 중간검문이 있을 때마다 그가 그것을 보여주어 통과했다.
황성인지라 황족 외에는 마차를 타고 내성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전에 하차하여 어느 정도는 걸어야 했다.
마부는 마차와 함께 보관소로 갔고, 미리 나와 있던 황녀궁의 시종장이 사이나를 안내했다.
“여기서부터 영애님 외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호위기사와 동반 하녀는 준비된 대기 장소로 가고 사이나만 황녀궁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한 문에 이르렀다. 응접실로 안내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층으로 올라가기에 약간 의아했다. 그리고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이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긴…….”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공간입니다. 오후에는 보통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시지요.”
서재였다.
천고가 높은 것으로 보아, 우측 천장의 어슷한 빗면은 황녀궁 지붕에 닿아 있는 듯했다.
빗면의 천장에는 작은 창들이 다닥다닥 있었는데 서적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유리에 특수한 처리가 된 모양이었다. 들어오는 햇살의 색이 달랐다.
잘은 모르지만 밤엔 창을 통해 은은하게 달빛과 별빛이 스며들겠지.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김과 동시에 묘한 햇살의 색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와아……. 너무 멋지네요.”
그대로 복사해서 갖고 싶을 정도로 이 서재는 사이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어서 오시오. 드보프 영애.”
한창 서재 안 정경에 한눈을 팔고 있는데, 황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전하,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좋아하시는 공간에 친히 불러주시니 황공합니다.”
“환영하오.”
진심으로 반기는 미소에 사이나는 긴장이 약간 가라앉음을 느끼며 황녀를 따라 앉았다.
앉고 보니 황녀의 의자 뒤로 시립한 한 남자가 보였다.
사이나의 시선의 방향을 눈치챘는지, 황녀가 남자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내 호위라오. 인사하시게. 이쪽은 드보프가의 사이나 영애, 이쪽은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인 헤비아탄가의 샤피로 경일세.”
크레이머 공작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남자였다.
청회색의 머리카락과 검붉은색의 눈동자가 전체적으로 차분해 보이는 인상을 남겼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헤비아탄 부단장님.”
“…….”
과묵한 성격인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갈무리하는 남자였다.
“이이가 말수가 별로 없다네. 이해해주게.”
“제가 이해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본분에 충실하시니 그로 된 것이지요.”
자신의 호위기사인 루퍼트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편이라 좀 대비되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루퍼트가 더 드문 성격일 터다.
금세 시종들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차와 다과를 차려냈다. 찻잔에서 몽글몽글 올라오는 향기와 수색이 뭔가 익숙했다.
“저번에 제대로 맛을 못 보았을 것 같아 준비하라 하였소만, 따로 원하는 차가 있거든 얼마든지 말해도 되오.”
전에 혀가 아니라 드레스로 맛을 보았던(?) 바로 그 로열 로즈 티였다.
“아닙니다, 전하.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가향 차보다는 쌉싸름한 차를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떤 취향도 유일성을 넘어서기는 힘들다. 로열 로즈 티는 말 그대로 황성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므로.
그렇다고 이 꽃차의 맛이 나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로열 로즈 티의 맛과 향은 훌륭했다. 수색까지 예쁘다 보니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마시는 사이나의 입가로 자연스레 미소가 퍼졌다.
“훌륭하네요.”
사이나의 반응에 황녀가 씨익 웃고는 자신도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소.”
“아닙니다. 제게 영광이죠.”
물론 의아하기는 했다. 황녀의 초대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단독 초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 혼자 초대된 것인지요?”
자리 배치의 형태와 의자 수를 보았을 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지만, 황녀와의 독대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 사이나는 물었다.
“그렇소. 아무래도 이전에 있었던 상처에 대해 묻게 될 것 같아 홀로 오라 하였소. 너무 단출하오?”
“아니요. 그저… 전하와 독대하는 영광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이 영광을 위해서라면 천금도 지불할 터이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묻지요. 그때 붉은 기가 남은 채 퇴궁한 것이 매우 신경이 쓰였다오. 혹 흉이라도 남은 것은 아니요?”
본인이 차를 쏟은 것도 아닌데 이리 신경을 써주는 황녀의 모습이 놀랍다.
본래 배려심이 넘치는 것이거나, 황자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한 것은 아니라도 가족의 실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오나 티끌만 한 상처도 남지 않았사오니, 심려치 마옵소서. 모두 전하께서 애써 주신 덕분입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차에 난 사고라 애석하였소. 듣기로는 황자 전하께서…….”
답지 않게 황녀가 말을 흐렸다.
다른 테이블에서 일어난 일이라 상세한 사정은 몰랐다가 아무래도 나중에 알게 된 듯했다.
사이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애써 웃었다.
“황자 전하께서… 로열 로즈 티를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며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다 찻잔을 엎었노라,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이라고는 해도 같은 황족인 황녀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소?”
“예.”
흘끔 표정을 살피는데 황녀는 어딘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고, 샤피로 경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순간 사이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이거 소금인가요?”
테이블 위 찻주전자 옆에 백색의 가루가 함께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사이나가 물었다. 분위기가 약간 경직된 것 같아, 말을 돌릴 겸 해서 말이다.
“맞소. 어마마마께서는 안 넣어 드시는 것을 더 좋아하시지만, 나는 좋아한다오.”
사이나의 의도가 먹힌 모양인지 황녀가 웃으며 자신의 취향을 밝혔다. 얼떨결에 황후 폐하의 취향까지 알게 되었지만.
그러고 보니 사이나는 소금을 넣지 않은 로열 로즈 티만 먹어봤다. 소금 좀 약간 넣는다고 얼마나 맛이 달라지겠냐마는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요. 딱 그 정도만 넣어 저으시오.”
시종이 잔에 새 찻물을 채워주자 사이나는 황녀가 말하는 만큼의 소금을 티스푼으로 떠 넣은 뒤 휘휘 저었다.
그리고 새로이 맛을 음미했다.
‘……?!’
그런데 웬걸. 이를 제일 처음 알려준 황자에 대한 꺼림칙함이 싹 잊힐 정도로 새로운 맛이었다. 정말 약간의 소금만 첨가했을 뿐인데 마치 다른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완전 다른 차 같아요.”
꽃향기와 단맛이 배로 짙어졌다. 소금을 넣었는데 어째서 더 달아진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신기한 마음에 찻잔을 홀짝거리는 사이나를 보며 황녀는 그저 씨익 웃었다.
“갈 때 좀 싸 주리다.”
“어, 아닙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그러고 싶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황녀의 태도가 지나치게 후해서 되레 얼떨떨했다.
그리고 방금 전 묘하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다시 좋아졌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대, 취미는 무엇이오?”
“취미요?”
딱히 즐겨 하는 것이 없는데 무어라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이나는 자신의 소문을 떠올렸다.
공부벌레라더라, 아를어에 미쳤다더라, 등의 소문 말이다.
사실 아를어를 공부하고 <아를-프로메사>에 대해 파고든 지난 시간은, 말 그대로 좋아서 한 것이다.
귀족 영애로서 돋보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취미라면 그 누구도 아를어 따위를 연구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학자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나 학자만큼이나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쌓아온 시간들은 곧 그녀의 정체성이었다. 숨기거나 다른 그럴듯한 취미를 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고대 문명 <아를-프로메사>에 관한 역사와 수호령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아를어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역시나 보편적이지는 않은 대답에, 황녀가 놀란 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