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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64화 (64/233)

64화. 조금 다른 황금색 초대장

그녀의 품, 어깨, 목덜미 등에 코를 들이대며 킁킁거리자 사이나는 지레 찔려서 몸이 굳었다. 짐승들은 후각이 매우 예민하다고 하지 않은가.

‘나, 나한테 혹시 공작님의 냄새가 묻어 왔나?’

마침내 얼굴 쪽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댄 녀석의 눈이 커지더니.

“크아앙!”

포효했다. 그리고는 짧은 두 앞발을 들어 사이나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입으로는 계속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으읍! 어 애 그애(너 왜 그래)!”

“캬앙!”

뭐, 뭘 알아챈 거야?

손톱을 세우지 않은 곰 발로 눌러대봤자 아프지는 않았지만, 뭔가 눈치채고 책망을 하는 기색이라 사이나는 매우 민망해졌다.

“크앙크앙!”

“…….”

사이나는 얼른 녀석을 침대 위에 두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알았어! 나 씻고 온다!”

짧은 다리로 따라오려고 하는 욜리에게 씻고 온다고 외치며 잽싸게 나가서 문을 닫았다.

“컁컁!”

침실 문 너머로 작아지는 욜리의 목청을 뒤로하고 사이나는 얼른 욕실로 향했다.

그녀의 목 뒤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어째서일까.

사이나에게 있었던 일 때문일까?

그녀는 이날, 또 이상하지만 생생한 꿈을 꾸었다.

한 여자가 요염한 뒤태를 하늘하늘 움직이며 한 남자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천의 란제리만 입은 여자가 사부작대며 남자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흐응, 여보오…….』

섬세하고 고운 여자의 작은 손이 남자의 가슴팍을 유혹적으로 쓸며 올라가 목을 감았다.

밀착시킨 몸을 늘쩍지근하게 비벼대며 여자가 남자를 자극하려 애썼다.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한참 후 눈을 뜨더니 고개를 바로 세웠다.

정면으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헐벗다시피 한 차림새의 여자와 몸을 맞대고 있음에도 그 표정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뭐 하는 짓이지?』

목소리는 더더욱 차가웠다. 비비적대는 여자의 몸놀림과 달리 어디 하나 흥분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피곤해요? 가만히 있어요.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요.』

남자의 냉랭함에 여자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사르르 떨어지는 부드러운 말투가 만년설도 녹일 수 있을 것처럼 사근사근하면서도 유혹적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남자는 가볍게 한 손만으로 여자를 밀어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뭐라도 묻었다는 듯 제 팔을 털어내기까지 했다.

『꺅!』

졸지에 의자 아래로 떨어진 여자의 다리가 방만하게 벌어지며 비밀스러운 곳을 드러냈다. 끈 하나로만 되어 있던 얇은 어깨끈이 떨어지며 탐스러운 살덩이가 드러났음은 물론이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은 노출임에도 남자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여자는 드러난 자신의 살결이 그를 동요케 하지 못하자 반대로 수치심을 느꼈는지, 옷을 수습하며 외쳤다.

『당신한테도 후계자는 필요하잖아요! 언제까지 날 밀어낼 수 있을 줄 알아요?』

분한 듯 입술을 앙다문 여자의 눈에 날이 섰다.

『필요 없어.』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감흥 없다는 표정이다.

『특히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배 속의 그 애새끼를 후계 삼을 일은 더더욱 없고.』

『……!』

여자의 아름답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얼굴은, 놀랍게도 엘리자베스였다. 지금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모습의 엘리자베스.

『차가워. 당신은 정말…….』

『괴물 같아.』

『소름 끼치는 체온도 그렇고.』

변명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이 저주처럼 중얼중얼 새어 나왔다.

『내가 왜 멀쩡한 남편 놔두고 그랬겠어! 다 당신 때문이야!』

악을 쓰듯 엘리자베스가 원망을 토해내는 대상. 배경상 그녀의 남편이 분명할 크레이머 공작이었다.

새된 비명에도 공작은 무감한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멋대로 즐기고 살 땐 언제고 내 탓을 하는군.』

『…….』

『당신이 여태 어느 놈팡이들을 거쳐 왔는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의 목록이 다 있는데 혹시 확인시켜주길 바라나?』

『…그, 그런!』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우리 사이는 계약일 뿐이라고. 그 계약의 조건은 하나도 이행하지 않더니 바라는 것만 많군.』

『…….』

『양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날 우습게 보는 것은 곤란해.』

엘리자베스의 혈색이 매우 창백해졌다.

『얌전히 껍데기로 살았으면 그것이나마 지키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하긴.』

공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하던 실내의 온도가 더 낮아지고, 조도까지도 내려가는 것 같았다.

스르륵.

그러더니 그의 등 뒤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솟아올랐다. 그 검은 기류는 이내 날개 같은 형상으로 변화했다.

『언약자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딴 잔꾀는 부릴 수 없었을 텐데. 쯧.』

『뭐, 뭐 하려는…….』

촤라라락-.

검은색 날개는 허공에 물감처럼 퍼지더니 주욱 늘어나 엘리자베스를 향했다.

『아악! 뭐야!』

『누구 애를 밴 건지는 몰라도 낳을 때까지 내가 안전하게 지켜주지.』

『시, 싫어! 저리 가!』

사색에 질려 도망치려 하는 엘리자베스의 뒤로 검은 일렁임이 좌악 펼쳐졌다.

바닥에 잉크를 떨궜을 때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모양이 되더니, 그 형상은 엘리자베스를 삼키며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꺄아아아…….』

그 사이로 새된 비명이 점차 잦아들다가, 사라졌다.

허억. 꿈에서 깨어난 사이나가 탁하게 숨을 들이켜며 벌떡 일어났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꽤 놀랐는지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만큼 기괴했다. 공작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것은.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이런 것도 회귀의 부작용인 걸까? 그 꿈은 과연 진짜 있었던 일일까? 그럼 그 ‘검은 것’도 진짜 존재하는 걸까?

많은 의문이 떠올랐으나, 어떤 것도 답을 알 수는 없었다.

* * *

주말이 되어서 사이나는 다시 델본으로 향했다.

“캐- 아니, 흠. 비쉘르마 경.”

습관이 이리 무섭다. 저도 모르게 ‘캐롯 경’이라고 할 뻔했다.

저렇게 멋진 성을 하사받았는데 말이다.

다행히 루퍼트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늦었지만, 비쉘르마 경이 된 거 축하해요.”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저번에 샀던 물품들이다.

“…아가씨.”

“별건 아니지만 나중에 열어봐요. 그냥 실용성 위주로 샀어요.”

연고를 떠올리자 또다시 웃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가씨의 미소가 어쩐지 수상하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더 열과 성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경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저도 숨은 쉬어야죠.”

알 만하다는 듯, 루퍼트가 웃었다.

그리고 델본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것은 잔소리였다.

“황자와 단둘이 있을 만한 상황을 절대 만들지 마! 절대! 알았어?”

그것도 잔뜩. 세이지로부터.

‘정말 성격이 달라졌다니까.’

좀 질리는 기분이기는 해도 결국 사이나를 향한 애정의 표현.

그녀는 이제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아무리 창피하고 민망한 상황이라도 가족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이 낫다는 것도 알고 있고 말이다.

“유모, 매주 왔다 갔다 하는 거 피곤하지 않아? 그냥 본가에 있어도 되는데?”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는 제가 챙겨드려야죠.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 걱정 마세요.”

“고마워.”

전생에 결혼했을 때 유모가 어찌나 그리웠던지. 사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모는 꼭 데리고 가고 싶었었다.

괜히 사람 하나 더 망칠까 봐 애써 참았던 거지.

역시 가족들이 다 있는 델본에 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푹 쉬다가 가야지.

“아가씨.”

잠시 나갔다가 온다던 유모가 어째서인지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뒤엔 상자를 든 하녀 한 명을 대동한 채였다.

“…….”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설마 또?

“누구기에 은쟁반이야?”

“직접 보시죠.”

쟁반 위에 놓인 봉투의 색만 보고도 미간이 절로 접혔다. 또 황금색 봉투였다.

“황성?”

이젠 황금색만 봐도 소름이 돋을 것 같다.

한숨이 폭폭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사이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뒤집어 발신인을 먼저 확인했다.

“어?”

사이나의 얼굴이 대번 화사해졌다.

“황녀님이시네?”

황금색 봉투를 받을 때마다 영광스럽기는커녕 난감한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았는데 이번엔 예외가 될 모양이다.

물론 읽어보아야겠지만.

그러나 전에 티 파티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느낌이 좋았고, 또 황자와 달리 좋은 분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봉투를 여는 손길에도 즐거움이 배어 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용에 대해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보냈던 감사 편지에 대한 간략한 답장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사이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라셔요?”

황녀로부터 온 서신은 처음 본 유모가 매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나의 표정도 궁금증에 불을 지폈고.

“어음…. 날 초대하셨어.”

“초대요?”

“응. 황녀님 궁으로.”

“어머, 세상에! 우리 아가씨가…, 우리 아가씨가!”

유모는 자신의 아가씨가 방구석 폐인에서 인기인으로 진화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거의 눈물을 글썽이는 수준으로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 모습에 머쓱해하며 사이나는 초대장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단독 초대장이다. 티 파티나 무슨 모임 이런 게 아니고.

전에 받았던 화상 치료의 경과에 대해 물으며 괜찮으면 한번 방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것도 열어보셔야지요.”

“응?”

“그 초대장과 같이 온 거예요. 하사품 같습니다.”

서신만으로도 충분한데 뭘 보내셨을까.

사이나는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열자마자 꽃향기가 공기 중으로 화악 퍼져나갔다.

“아…….”

진하면서도 아찔한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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