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각자 깊어지는 오해
“그래요.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어야 하는 건데, 그대가 웃는 모습에… 참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몸을 원한다(?)더니 갑자기 불순과 매우 거리가 멀어졌다. 약간 흐름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제가 웃었을 때요?”
언제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 품에서 고롱고롱 자다가 막 일어났을 때, 그대가 날 보고 너무 예쁘게 웃기에…….”
듣고 보니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파란 눈이 참 예쁘단 생각을 했었지, 아마.
“자는 동안 품 안에 먼저 안겨 온 것도 그대여서 음,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군요.”
“…….”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먼저 꼬물꼬물 가서 안겼다고?
자세가 불편해서 뭔가 편히 눕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아,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웃었나?
<남자는 파렴치한.
공작은 남자.
고로 공작은 파렴치한.>
방금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삼단 논법을 완성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실상을 듣고 나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크흠. 근데, 손이면 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그대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대가 손을 잡아주면 추위가 가시고… 잠이 아주 잘 오거든요.”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다가 문득 떠오른다.
그녀가 공작저를 방문할 때마다 그가 취하던 짧은 오수가 그래서였나.
사이나의 손끝을 살짝 잡은 채로 매번 짧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면, 그는 굉장히 개운하면서도 아련한 표정을 하고는 했다.
손끝을 붙잡은 정도로 무슨 큰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이야 손끝이 아니라 좀 단단히 붙잡기는 했지만.’
아니, 손을 단단히 붙잡는 수준을 훌쩍 넘어……. 음, 그만 생각하자.
사이나는 애써 생각의 고리를 틀었다.
“불면증, 이런 거예요?”
“…비슷합니다.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항상 상주해 있다 보니 잠들기가 쉽지 않아서.”
지위가 지위인 만큼, 신분이 신분인 만큼, 골치 아픈 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 거대한 영지를 운영하면서 국경선까지 지켜내는 것이 쉬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
‘혹시… 그저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뭐 그런 걸까?’
생각해보니 공작은 가족이 없었다. 선대 공작 부부가 일찍이 타계해서 꽤 어린 나이에 작위를 계승했다고 들었다. 거기다 외동이니 형제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여자를 가까이하자니 다들 공작부인이라는 잿밥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겠지.
친구나 가신에게는 약한 모습을 함부로 보여줄 수 없을 거고.
‘외로운 거구나…….’
사이나는 머릿속에서 멋대로 인과를 짜내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내 그를 안쓰러운 얼굴로 보기 시작했다.
그와 달리 그녀는 유리의 존재로 인해 친구가 없었어도 외로움을 몰랐고, 아빠와 오라버니의 존재로 인해 엄마가 없었어도 크게 빈자리를 못 느꼈다.
유리는 지금 없지만… 그래도 사이나에겐 가족이 있었다.
“손, 잡아드릴게요. 필요하실 때마다.”
이제는 <공작=지위는 높으나 안쓰러운 사람>의 공식이 성립된 사이나의 오지랖이 발동되었다.
“그런 건 친구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해맑게 대답하는 사이나를 보며 공작이 고개를 약간 늘어뜨렸다.
“친구라…….”
그는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두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짚었다.
“친구…. 흠…….”
사이나가 무슨 거대한 화두를 던져 놓기라도 한 것처럼 고뇌에 잠긴 모습이었다.
“친구…….”
이윽고 공작은 물끄러미 사이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시선을 천천히 내리더니, 그녀의 입술께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똑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이 닿자 입술이 또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사이나는 입을 앙다물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넋을 빼고 키스를 나눈 친구가 어딨냐는 무언의 의사 표현인가…….’
이전과 입장이 바뀌어 이제는, 사이나가 매우 질 나쁜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오랫동안 숨결을 나누어놓고 갑자기 발뺌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후. 그래요.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뻘쭘해하던 중 공작이 갑자기 수긍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네? 뭐가 부족…….”
“키스가 형편없었나 보군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뜻을 돌려 말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사이나가 공작이 어려운 나머지 대놓고는 말 못 하고 애써 돌려 이야기한 것이 아니냐, 그런 말이었다.
“그… 아니에요! 키스는 좋았는데! 아주 좋았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
“좋았습니까? 아주?”
아니라고 말을 해주는 게 맞기는 한데, 또 그렇게 말하고 나니 좀 뭔가 이상하다.
“실망한 줄 알고, 매우 의기소침해지려던 참이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내 형편없는 스킬 때문은 아니라는 거지요?”
“네, 네? 네에…….”
형편없기는커녕…….
화르르. 뒷말을 삼킨 사이나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좋아요. 이쯤 물러나도록 하지요.”
아니, 뭘 물러나요?
“친구든 뭐든,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아직 연인이니 애인이니 그런 호칭으로는 엮이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
“…….”
“하지만 난 그대가 절실해요. 내 불면은 사실, 매우 고질적이고 오래된 난제 같은 겁니다. 솔직히 난 이게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왜죠?”
불면증이 사람의 진을 빼는 증상이기는 하지만 보통 심리적인 것 아닌가? 불치병은 아닐 텐데?
사이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약의 부작용, 같은 겁니다.”
공작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계약이요?”
“수호령 말입니다.”
“아… 세상에.”
누구나 선망하고 바라는 수호령의 언약자에게 이런 뒷이야기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부작용이라니, 부작용이라니…….
수호령 이야기가 나오자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집중도 200%가 되어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표정은 애석하다는 얼굴이지만, 눈은 또랑또랑한 모습을 보며 공작이 새삼 알겠다는 듯 웃었다.
“그렇지. 그대는… <아를-프로메사>의 열렬한 추종자였지요.”
아차. 남은 괴로운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신기하다는 듯 본 것이나 다름없다. 사이나는 이 몹쓸 마음가짐을 깨닫고 사과했다.
“아니, 저, 죄송해요. 계약은 무조건 좋은 거고 멋진 거라고만 생각하다가 그런 부작용도 있다는 걸 아니까 좀… 의외라서요. 기분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내게 그대에게 어필할 요소가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필이라니. 사이나는 잠시나마 공작과 조지 홀랜더를 같은 선상에 두었던 것에 대해 속으로 사과했다.
사실 그 정도 되는 지위면 굳이 자신의 약점을 이렇게 다 드러낼 필요도 없이 충분히 강제성을 부여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정중하지 않은가.
뭐, 이면에 숙면을 향한 절박한 의지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방법적인 면에서 그는 사이나를 굉장히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저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이유는 모르지만 그대는 나를 평온함의 영역에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절실히 마지않는 것이지요.”
불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것은 분명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다.
공작처럼 장기간은 아니어도 고된 결혼 생활로 인한 고충에서 비롯된 불면의 경험이 그녀에게도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나름 공감할 수 있었다.
사이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를 그런 이유 때문으로만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네? 그럼 왜죠?
사이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대는 매력적인 여성이고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아름답기도 하지요. 솔직히 말해 그대에게 이성으로 끌리고 있습니다.”
“…네에?”
“갓 데뷔한 그대에게 이러는 제가 짐승 새끼처럼 느껴져서 자괴감을 느낍니다만…….”
뭔가 진솔하면서도 과격한 표현에 사이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장 무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발길을 끊지는 말아주십시오.”
파란 눈동자가 어둡지만 선명한 광채를 드러내며 사이나를 향했다.
자신의 하는 말에 한 점 거짓이 없다는 것처럼, 그 시선은 곧고 곧았다.
“…버, 번역 작업은 해야죠. 끊지는 않을 거예요.”
이상한 하루다. 번역 작업을 하러 가서 잠이나 들고, 그러다 그와 수도 없이 키스하고, 밀어냈다가, 또 가까워졌다가…….
이제는 스스로 무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맙군요. 와서… 날 재워주는 것도 잊지 말아요.”
공작이 매우 천천히 입가를 늘이며 미소를 지었다.
농담처럼 부드러운 말투. 온화한 미소. 길게 접힌 눈꼬리에 묻은 사랑스러움.
진심을 담아 상대에게 바치는 선사(膳賜)와 같은 미소에 사이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 * *
어떻게 방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귀가만 기다리고 있던 유모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대강 대답하고 얼른 방에 들어섰다.
피곤하다는 말로 당장은 물러서게 했으나 아마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내일 2차전이 분명 기다리고 있겠지.
“컁.”
실제로 피곤하기도 해서(낮잠을 그리 잤으니 육체적인 것은 아니고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지만) 얼른 씻고 자려는데,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욜리가 타다닥 뛰어왔다.
“오구, 욜리. 여태 안 잤어?”
사이나가 다가온 욜리를 안아 들었다. 녀석은 아직도 매우 작았다. 초반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쑥쑥 커질 때가 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또 자라질 않아서 걱정이 들었다.
“크앙?”
그런데 품 안의 욜리가 요상한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킁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