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난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보다, 그 공작님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럼….”
“내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사이나.”
물론 이름은 당연히 있겠지만, 사이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사야.”
“…….”
사야라는 애칭을 듣는데 왜일까. 심장 안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사이나는 얼굴을 붉혔다.
“왜요. 이제 그대를 사야라고 불러도 되는 사이가 아닙니까?”
그런 사이는 무슨 사이인가요.
그러고 보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현 상황을 떠올려보자 약간 난감해졌다.
“설마 오늘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입은 웃지만 눈은 가시 같은 표정으로 공작이 그녀의 볼을 엄지로 쓸었다. 볼이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다. 아침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오늘 약속을 취소하고 방 안에 꼭 박혀 있을 텐데!
뭐, 키스는 좋았다.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느낌이었고, 남자와의 접촉이 이런 기분을 줄 수도 있구나 싶어 놀라웠으니 말이다.
본래 그녀는 남녀 간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스킨십에 부정적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고.
이제 키스에 대한 인식을 좀 바꾸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더 무엇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
특히 이러다가 얼렁뚱땅 엮여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곤란 그 자체이니 말이다.
공작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사이나는 결혼이 싫었다. 전생을 통한 결혼의 경험은 단 하나의 요소도 그녀에게 긍정으로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엔 비혼으로 살리라 굳게 마음먹었는데, 묘하게 어째 남자가 더 꼬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냐, 공작가랑 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갔네. 나 요즘 자의식과잉인가 봐…….’
다시 머리를 식히며 생각해보니 미쳤나 싶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서 이 호들갑이라니.
공작이라는 게 어디 보통 신분인가. 황족과도 결합이 가능한 사람이다. 사이나의 조건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어디 그에 비할쏘냐.
갑자기 반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 좀 했다고, 착각이 심했나 봐….’
공작들은 황도에 길게 머무르는 편도 아니니 머무르는 동안 그냥 짧은 불장난, 이런 걸 원하는 건지도 모르잖아?
불장난의 상대가 자신 같은 사람이라는 건 좀 의외지만 말이다.
“저… 근데,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은데요. 키스는… 좋았지만요.”
거절을 위한 거절의 발상인지도 모른 채, 생각은 어느새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저 비혼주의자예요.”
그리고 극단적으로 선포하듯이 내뱉었다.
공작은 약간의 침묵 후에 되물었다.
“비혼주의자라….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네.”
“거참… 특이하군요, 그대는.”
정말로 신기한 무엇을 보듯, 공작이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사실 전, 연애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요.”
“…….”
“저랑 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많지도 않겠지만……. 제가 뭐 그리 매력 넘치는 타입이 아니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으나, 사이나는 뻘쭘한 멘트를 날리느라 약간 바닥을 보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 각하께서는 키스 좀 한 이유로 저를 어떻게 챙겨주려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그걸 원하기도 하고요. 책임감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러실 필요가 없답니다.
“흠, 글쎄. 난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네…?”
복도를 함께 걷던 중에 공작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나온 말.
“내 눈에는 매력 넘칩니다. 하고, 싶군요.”
“뭐, 뭘 해요?”
묘하게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에 사이나가 당황했다.
“…연애?”
당연하다는 듯 연애라고 대답하는 그의 말에 사이나의 볼 언저리가 빨개졌다.
그래. 아까 내가 연애하고 싶은 남자가 어쩌고 운운해놓고, 왜 이렇게 당황한 거지?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리 빨개졌습니까?”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그런데 공작이 또 저리 묻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아주 필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생각보다 크게 터져 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더 빨개졌다.
그런 사이나를 보며 공작이 알 만하다는 듯 웃더니, 로이터에게 지시했다.
“마차를 두 대 준비해. 문양 없는 것으로.”
“예. 각하.”
의아한 눈으로 묻는 사이나에게 공작이 설명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바래다주겠습니다. 날은 늦었지만 미룰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사이나가 동행해 같이 왔던 기사와 하녀가 호출을 받았는지 모두 나와 있었다.
특히 루퍼트는 아직도 아가씨께서 일을 보시냐며 몇 번이고 로이터에게 확인을 했던 모양이다.
늦은 저녁이 되고 나서야 내려온 사이나를 세심하게 살폈으나 사람들 앞에서 말을 걸지는 않았다.
“뒤쪽 마차에 모두 타라. 시간이 늦었으니 얼굴을 드러내지 않도록.”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기사의 복장만 봐도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황도 내 귀족 지구인지라 사실 호위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제 위험할 일이 벌어질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아는 루퍼트도 지시에 따랐다.
밤늦게 드보프가의 기사가 마차를 호위해서 크레이머가에서 나왔더라, 는 말이 퍼지는 것보다 나으니 말이다.
사이나는 앞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 탑승했다.
내부가 아주 큰 사륜마차였는데도 커다란 그가 같이 타자 꽉 차는 기분이었다.
밀폐되고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것은, 널찍한 집무실에서 둘이 있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나마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며 규칙적인 진동을 주자 약간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결혼, 은 싫다고 했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공작이 다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연애도 싫은 겁니까?”
“싫다기보다는…….”
“싫다기보다는?”
“…끝이 뻔한 연애를 굳이 할 필요가 없잖아요?”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연애까지 안 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귀족의 세태라는 것이 그랬다.
정말 순수하게 연애만 했어요, 연애 자체가 목적이었답니다, 라고 말한들 누가 믿겠냔 말이지.
나중에 공작에게 버려져서 평생 수절했다더라, 이런 비련의 눈초리를 받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어차피 비혼으로 살 건데 좀 수군거린들 뭐 어떠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전생에 이런저런 악소문에 워낙 시달린 경험이 있다 보니 그냥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시도를 해 볼 마음도 없습니까?”
“…….”
사이나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 그가 당연히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하며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알았다.
공작은 아쉬울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다. 그는 자꾸 어떤 여지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혹시… 다른 걸 원하시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그가 그녀에게 여전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그건.
“다른 뭐 말입니까.”
그건…….
‘음, 그러게……. 다른 뭐가 있을까.’
저 남자에게 부족한 것이 뭐가 있겠느냔 말이지.
생각을 거듭해 봐도 잘 모르겠다.
결국 사이나는 반농담조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제 몸이라든지?”
그래도 공작이 좀 편해지긴 한 모양이라고 자조하며 말이다.
“…….”
그런데 웬걸. 놀랍게도 공작은 사이나의 말에 펑 터지듯, 굳었다. 귓가가 슬며시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사이나가 덩달아 당황스러울 지경.
‘허어. 정말 불장난이었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입술을 탐하기는 했어도 손은 항상 얌전했기에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대놓고 제 몸을 원한다(?)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갑자기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둘 사이로 흘렀다.
“후…….”
공작이 겨우 정신을 수습했는지,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난…….”
“…….”
“그대를 만지고 싶습니다. 계속.”
“…예에?”
‘내 아래턱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사이나는 자신의 턱을 움직여보며 그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만지고… 싶다니.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뜻인 거겠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아주 불온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들은 대체 그 짓을 왜 그리 좋아하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실.
조지 홀랜더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깥에서 계집질을 하고 다니면서도 돌아오면 꼭 사이나를 괴롭혔고,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했다.
그러면서도 ‘젖지도 않는 목석같은 계집’이니 뭐니 욕설을 해대며 이러니 남편이 밖으로 도는 것이 아니냐며 남 탓을 해댔다.
타고 나기를 목석이라 남편을 위해 노력도 안 한다며 매번 사이나를 다그쳤다.
사이나에게 뭔가 이것저것 원하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뭘 원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사실 뭘 원한들 추잡하고 더러울 것이 뻔해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놈과의 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녀에게 고통일 뿐이었다.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더 지독한 밤이 따라왔고, 거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수월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흉한 기억이 사이나의 감정을 잠식하자, 눈앞에 있는 공작마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남자들이란 다 그놈이 그놈, 이라는 명언(?)이 떠오르며 눈앞에 있는 이놈(?)도 별다를 바 없는 놈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뻗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손으로 만족했어야 하는데, 내가 욕심부리긴 한 것 같습니다.”
사이나의 께름한 얼굴을 읽었는지, 공작이 말했다.
“…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