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싫으면, 밀어내도록 해요
사이나는 목덜미가 또다시 간지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배시시 웃어버렸다.
하얀 치열이 가지런히 드러나는 미소는 어쩌면 상황과 매우 어울리지 않게 피어났다.
그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으응.”
생각지도 않았던 감촉이 입술을 덮쳤다.
커다란 손이 뒤쪽 두피를 파고들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 위치에 맞춰 그가 고개를 틀며 그녀의 입술을 갈랐다.
‘뭐, 뭐지?’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되고, 꿈이라고 하기엔 촉감이 지나치게 내밀하다.
“흐읍….”
놀라 벌어진 틈새로 대담하게 파고든 살덩이가 세심하게 입 안을 유영한다. 그녀의 치아를 훑고, 입술 안쪽을 헤매다가, 혀를 감고, 그것을 살살 빨았다.
그 와중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빨았다가 살짝 씹었다가를 반복했다.
입을 다물지 못해 흐르는 타액을 그가 핥아 올린다. 삼킨다. 마셔버렸다.
“아…!”
사이나는 쭈뼛한 감각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야!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두 손은 그와 그녀 사이의 품 안에 갇힌 상태였고, 허리는 강한 손아귀에 붙들렸다.
의식하고 보니 두 다리는 얽혀있고, 그녀는 그를 거의 깔아뭉개듯 올라타 있었다.
야하기 짝이 없는 그의 혀 놀림과 자세를 인지하자 머리가 곧이라도 펑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 으음. 흣….”
키스란 게 원래 이런 것이었던가.
조지 홀랜더가 입술을 들이밀 때는 끔찍했고 막상 닿으면 더 끔찍했다. 그저 힘껏 혀를 비집어 넣고 있는 대로 휘젓는 게 다였던 입맞춤이란 여린 입술을 터트리며 침이나 잔뜩 바르는 더럽고 불쾌한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작과는…….
그가 훑고 간 점막마다 예민하게 감각이 서고, 닿은 혀의 미뢰가 다 일어나는 듯한 기분.
지나친 감각의 파도에 사이나는 살짝 경악스럽기까지 하여 몸을 비틀었다. 그를 밀어내며 어떻게든 몸의 중심을 일으키려다 보니 그의 위에서 비비적대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 움직…이지 마.”
더 짙게 가라앉은 눈빛과 목소리를 하고는 공작이 다시 그녀를 잡아당겼다.
“고, 공작님- 흐읍!”
이전보다 더 깊게 속박된 자세로 그녀는 다시 입술이 먹혔다. 하관 전체를 잡아먹을 듯이 접붙여오는 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왜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된 걸까.
뭔가 이상한데 크게 저항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의 향연에 함몰된 것 같다.
“으응….”
느릿느릿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놓기를 반복하는 그의 눈빛이 약간 몽롱했다.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 그녀를 힘껏 품에 당겨 안았다.
“…….”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상태로 약간 시간이 흐르자 사이나는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
뭘까. 이 상황은.
나 지금 여태…… 공작과 키스한 건가?
지금 상황은 그럼 또 뭐고?
사이나는 고개를 퍼뜩 들어 공작을 살폈다.
“…….”
설마…… 자고 있어?
대체 이 사람은,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내가 무슨 수면용 테디베어도 아니고…… 손도 모자라 안고 자다니. 자신이 닿기만 하면 잠이 오는 걸까?
‘키스는 왜 한 거지?’
심지어 키스 후에 또 자?
놀랍고, 당혹스럽고, 또 어이가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 거 아니야?’
황당하다 못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
한데 감정이 좀 가라앉고 나니 오히려 기억을 못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해서 서로 어색하게 바라보며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토로해 보아야 뭐 하겠느냔 말이지. 민망하기밖에 더 하겠는가.
아까 보았던 거뭇한 안색을 떠올리자,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 상황에 잠이 들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 그냥 모른 척하자.’
그와 나눈 키스의 경험은 놀라웠지만, 그뿐이다.
사이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슬며시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 일이 없었던 척하려면 우선 자세부터 바꿔야 한다.
한데 지금 거의 그의 위를 깔고 눕다시피 한 상태라,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다 그가 그녀를 양팔로 가두듯 끌어안고 있어 더 그랬다.
천천히 팔에 힘을 주며 상체를 떨어뜨렸다.
‘조금만… 더…….’
그냥 감고만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그의 팔 사이에서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똑바로 일어나는 것이 잘 안 되자, 사이나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의 겨드랑이 아래 측면으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
하지만 지금 누운 곳이 소파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그녀의 시도는 허공으로 몸을 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으악!”
결국 콰당! 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소파 아래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입 새로 자동으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떡해…….
‘…깼겠지? 분명 깨버렸을 거야.’
쪽팔리기도 하고, 그가 깨어났을까 봐 몸도 일으키지 못한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영애?”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깨버리고 말았다.
스윽. 소파 위로 올라가 있던 그의 긴 다리가 바닥으로 내려오는 것이 내리깐 시야로도 보였다.
“…….”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 없다.
사이나는 그의 두 발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반들반들한 구두코를 노려보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 바닥에…….”
공작답지 않게 말끝이 흐린 질문이 새어 나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파란 눈과 마주쳤고, 그 아래 도톰한 입술이 시야에 잡혔다.
갑자기 아까 보았던 몽롱한 그의 얼굴이 눈앞으로 지나가는 느낌에 사이나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하아……. 꿈이, 꿈이 아닌가 보군.”
“…….”
“우선… 올라와 앉는 것이 좋겠다.”
그가 손을 뻗어 잡고 일으켜 주려다가 다시 거두고는 말했다.
사이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
“…….”
다시 침묵.
“그…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이성을 잃은 듯한데.”
“…….”
그리고 또 한참 말이 없다. 사이나는 뭔가 이상해서 그를 흘끔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귓가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그가 이마를 짚고 있었기 때문에.
깜빡깜빡.
혹여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깜빡였으나, 달아오른 홍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저건 뭘까. 분노? 열 받음? 당황?
‘설마… 부끄러움은 아니겠지?’
평소 그의 성정과 비교했을 때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은 도무지 떠올릴 만한 항목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특히 그런… 그런… 야해빠진 키스를 막, 한 사람이 말이다!
“…불쾌, 했습니까?”
불쾌… 했나? 잘 모르겠다. 아니, 잘 모르겠는 것으로 보아 불쾌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좀 심장이 쿵쾅거리고, 놀랍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리고 갑자기 왜 공대를 쓰는 거지?
시선을 들어 공작을 보자 그는 그녀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한 표정이지만 귓가는 여전히 붉었다.
그 괴리를 보자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
벌게진 얼굴을 하고 사이나가 안절부절못하자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내 실수입니다. 나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그대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놈처럼 굴었으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처음에는 분명 당황했지만, 후반에는 그녀도 감촉에 홀려서 가만히 있었다.
“앞으로는 오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
“부디, 내가 그대를 함부로 하려고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곧게 바라보는 눈길과 진심이 담긴 것 같은 말을 들으며 사이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하는데… 왠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붕어가 뻐끔대듯 열렸다 닫히는 입으로 그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계속 보았다.
눈이 아니라 입술을.
아까 사이나가 그의 입술을 보았을 때 같은 느낌의 시선이다.
쿵 쿵 쿵. 시선의 뜻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에 열이 올라 또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시선에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그걸 보는 그의 눈빛이 대번에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 어떡해.’
왜일까. 순식간에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서로의 숨소리,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치 확성기를 거치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두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긴 소파 양 끝에 각각 앉아 있던 둘의 사이가, 단번에 좁혀졌다.
공작이 상체를 일으켜 기울인 것만으로 말이다.
그가 그녀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커다란 손은 핏줄을 세우며 그녀 옆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두 눈은 집요하게 그녀의 시선을 잡아챘다.
“아니, 취소하지요.”
사이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사이나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싫으면… 밀어내도록 해요.”
그가 하얀 속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내렸다.
* * *
뭐든 처음은 실수라고 할 수 있으나, 두 번째는 아니다.
그건 키스도 마찬가지겠지.
꿈결이 아닌 상태에서 시작된 두 번째 키스는 이게 가능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 후에 끝이 났다.
마치 둘의 입술이 닿아있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처럼 떨어지지 않고 서로의 것을 핥고 빨았다.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지속되었을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 저녁 시간이 되었나 보군요.”
바깥을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사이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키스를 하느라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다니…….
평소라면 작업을 벌써 끝내고 돌아갔을 시간이다. 누군가 시간을 잘라 훔쳐간 것 같았다.
“저녁, 함께하지요. 괜찮겠습니까?”
“…네?”
“어차피 지금… 입술이 너무 부어서 돌아가기 전에 좀 가라앉히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