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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59화 (59/233)

59화. 인간 손난로

어딘가 조급한 기색을 읽은 모양이다.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요?”

“다른 손님이 들어왔기에 나왔어요. 약간 불편해서.”

“…다른 손님이요?”

루퍼트는 상점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머리를 쓸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한눈을 팔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분홍 머리 남자가 사이나의 앞을 막아서자마자 루퍼트가 들어오고도 남았을 텐데 어쩐 일인가 했더니….

“엄청 예쁘게 생긴 흰색 말이 갑자기 제 엉덩이를 물고 도망가는 바람에….”

“…네에?”

“안 믿기시죠? 저도 안 믿깁니다….”

흰색 말이… 엉덩이를?

“말한테 성추행이나 당하고… 호위도 제대로 못 하고… 정말 이런 날도 있군요.”

“…….”

“시말서라도 써야 할까요?”

“…저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시말서… 까지는 불필요할 것 같네요.”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파요?”

“…예. 엄청… 세게 물렸거든요.”

“…….”

웃으면… 안 되겠지? 그런데 너무 웃겼다.

사이나는 우선 이동을 하는 척하면서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푸.”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과 달리 어딘가 뒤뚱거리며 걷는 것 같은 그의 걸음걸이를 보자, 거의 몸이 떨려올 정도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웃으셔도 됩니다.”

“…푸…흐!”

결국 커다랗게 웃어버리고만 사이나를 보며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결국 피식 웃고만 루퍼트였다.

한참을 웃고 난 후 사이나는 다른 잡화점에 들렀다.

여러 군데를 둘러보며 몇 가지 물품을 더 샀다.

전과 달리 서신을 쓸 일이 많아지니 예쁜 서신지에도 눈이 많이 가서 이것저것 골랐다.

하지만 루퍼트의 선물은 어쩐지 딱 이거다 싶은 게 보이지 않아서 한참을 헤맸는데 한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었다.

기사들이 망토를 고정할 때 쓰는 피불라(Fibula)인데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은색의 금속 장식이 굉장히 예뻤다.

보석을 추가해서 장식해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러면 오히려 실용성이 떨어질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이것저것 소소한 것들을 더 추가해서 구매했다. 검을 관리할 때 쓰면 좋다는 고급 연마기와 검 끝에 다는 술 장식도 굉장히 예쁜 것이 있어서 하나 구매했고, 특히….

‘멍에 좋다고? 호오.’

연고도 하나 샀다. 엉덩이에 바르라고.

“푸흡.”

산 물품들을 드보프가에 배달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이나의 입가에 또다시 웃음이 걸렸다.

* * *

그리고 다시 수요일.

여느 때처럼 문양 없는 마차를 타고 크레이머 저택으로 가자 로이터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차와 다과도 그쪽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겨울이 다가오는 중이라서 약간 쌀쌀했다.

따뜻하고 진한 차가 당기는 날이다.

“오늘은 밀크티. 진하고 따뜻하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로이터는 사이나의 외투를 받아들며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이나의 부탁에 따라 과한 마중과 배웅은 사라진 상태다. 익숙한 길을 따라 사이나는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똑똑. 짧은 노크를 했으나 대답이 없다.

‘자리를 비우셨나?’

원래 집무실에 허락 없이 드나드는 것은 굉장한 무례지만 사이나야 암묵적인 허가를 받은 상태.

조용히 들어가 앉아 있자 싶어 문을 조심히 열었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후욱 밀려들었다. 싸늘한 기운에 놀라 안을 살피자 집무실 테라스가 열려있었다.

‘바람에 서류라도 날아가면 어쩌려고.’

일부러 열어둔 건가 싶다가도 들이치는 바람이 꽤 강해서 우선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공작님?”

누가 문을 열어놓고 나갔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공작이 잠깐 바람을 쐬러 테라스 바깥으로 나간 모양이다.

그는 테라스에 놓인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상태였다.

‘주무시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서 긴가민가했지만 눈을 뜨지 않는 게 자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인기척에 상당히 민감한 편인 듯하던 그가 사이나의 부름도 못 알아들을 정도니 자고 있다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졌다.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문제는 이런 온도에 바깥에서 자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는 거다. 아무리 튼튼한 기사의 몸이라지만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깨워보기로 했다. 딱 한 번만 깨워보고 안 되면 로이터에게 그 짐을 떠넘기리라.

“각하, 감기 걸리세요. 안에서… 앗!”

정말 손끝만 살짝 팔뚝 위에 대었는데,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뜨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매섭게 깨어나는 기세가 마치 암살자라도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이나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아, 이런. 미안하군. 순간 놀라서….”

공작은 팔목을 움켜쥐었던 아귀에서 힘을 빼며 말했다.

“아뇨, 어… 괜찮아요. 찬 데서 잠드신 줄 알고….”

“그래, 춥겠군. 들어가지.”

공작은 그녀를 안으로 이끌고 테라스 문을 밀어 닫았다.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곤 하던 소파에 그녀를 앉힌 뒤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무심코 세게 잡은 것 같은데… 아프지는 않은가?”

혹여 어디 멍이라도 들었을까 살피나보다. 생각지도 못한 세심함에 살짝 놀라며 사이나는 자신의 팔목의 느낌에 집중했으나, 괜찮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로군.”

공작은 가까이 보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런데….

‘…손을 왜 안 놔주는 거야.’

관찰인지 진찰인지가 끝났으면 놔줄지 알았더니 공작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은 스륵 내려와 손바닥끼리 마주 댄 상태였다.

왜 이리 손바닥의 촉감이 의식되는 건지.

사이나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애쓰니까 더 의식되는 기분이다.

손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에 그 잡은 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부디 놔달라고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공작님?”

그런데 그가 다른 손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인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 요 며칠 잠을 잘 못 잤더니 좀 피곤하군.”

“저 다음에 올까요?”

사이나가 보기에도 당장 한숨 자야 할 것 같은 낯빛이었다.

“아니야. 그대가 가면 더 못 자.”

“…네?”

“미안한데… 잠시만 이리 있어줄 수 있겠나?”

“……여기, 이렇게요?”

“그대의… 온기가 필요해.”

“…….”

힘없이 떠진 눈으로 공작은 사이나를 바라보며 부탁하듯 말했다. 너무 낮아서 약간만 멀어져도 안 들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로 말이다.

커다란 남자가 약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살짝 가슴 안쪽이 따끔한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맙군.”

공작은 짧은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하더니, 잡은 손을 슬금슬금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더니 상체를 소파에 완전히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느른하게 펴진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밖에 있다가 온지라 자신도 지금 딱히 따뜻한 상태는 아닌 거 같은데, 그는 마치 손안에 들끓는 난로라도 하나 쥐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차분해진 숨소리와 표정을 보노라면, 그 짧은 사이에 정말 잠이 든 것 같았다.

‘왜 자꾸 내 손을 잡고 자는 거지?’

전에 처음 손을 잡은 이후로 공작은 수요일 티 타임 때마다 짧게나마 그녀의 손을 청했다. 그때마다 이리 눈을 감았고, 처음엔 오 분, 십 분이던 것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깊게 잠든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수면제냔 말이다. 같이 있으면 졸릴 정도로 지루하다, 뭐 이런 뜻은 아니겠지?

멀뚱히 있으려니 생각은 나쁜 쪽으로 치달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뺄 수는 없고 그를 깨울 수도 없었다.

‘작업도 해야 하는데….’

바람이 차다 싶었던 아까의 생각과 다르게 테라스 문을 닫고 나니 내부의 난방이 상당한 상태였다.

훈기 넘치는 공간에 멍하니 있으려니 쉬이 노곤해지며 졸음이 밀려왔다.

그의 가슴팍 위에 있는 손의 위치 덕분에 상체가 약간 딸려간 터라 자세도 꽤나 불편했다.

사이나는 몸을 모로 틀며 그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어깨를 소파에 기댔다.

공작이 눈을 뜨면 자신도 깨워 주겠거니 싶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의외로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울이기가 무섭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간지러워…….’

사이나는 묘하게 목덜미가 가려워서 눈을 떴다.

몽롱하게 눈을 뜬 사이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무얼 하던 중이었는지 말이다.

단단하면서도 푹신하고, 울퉁불퉁하면서도 편한, 그리고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말이 안 되지만 정말 그랬다.) 침대에서 몸을 묻고 잔 기분이었다.

흠칫.

또 목덜미가 가려웠다. 누가 자신의 근처에서 숨을 쉬는 듯 숨결이 자꾸 사이나를 간지럽혔다.

부스스 고개를 들자 새파란 눈동자가 닿았다.

“…….”

파르란 호수 같은 눈동자 안의 동공이 커지는 모양새가 약간 비현실처럼 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눈… 파란색… 예뻐…….”

사이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쯤에 선 정신 상태로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기다란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상체만 팔걸이에 기대 세운 공작, 그리고 그 위에 엎어져 자던 자신의 자세를 인지하지 못한 채.

커다란 손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녀의 턱선을 타고 올라와 볼을 감싸 쥐었다.

긴 손가락 끝이 그녀의 귓바퀴에 닿아 동그랗게 움직였다.

“읏.”

피부 위에 희미하게 난 솜털을 쓸어내리는 듯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찌르르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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