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데이트 신청해도 돼요?
“경비대 쪽에 말 전했지? 이제 발데즈 영애 들이지 마.”
“네. 전했어요. 근데 어찌…….”
유모는 사연이 궁금한 모양이다. 그간 유일하게 드나들던 또래 영애였으니,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정말 괜찮으신 거죠? 혹시 속상한 일 있으셨거나 싸우신 거예요?”
“그렇다기보다는, 음.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
친구랑 싸우고 마음에 상처라도 입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유모가 안절부절못했다.
“큥!”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욜리가 나타났다. 꼬리를 종아리 쪽에 스륵, 스르륵 스쳐대며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에 사이나는 웃으며 녀석을 안아 들었다.
“욜리. 또 사고치려고 왔어?”
탁탁. 꼬리를 휭휭 저어대는 모습을 보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요 녀석이 어제 말썽이었지요? 혹시 어제 그 사건 때문에 이리된 거예요?”
“뭐, 계기가 되기는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야. 엘리자베스가 연락도 없이 온 잘못도 있으니 욜리만 탓할 것도 아니지.”
“흠. 그건 또 그러네요. 장난꾸러기처럼 굴기는 했지만 난폭하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어제는 유독…….”
유모는 다시 욜리를 갖다 버리고 싶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욜리가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탁탁 쳐댔다.
“이상하게 엘리자베스를 싫어하더라고. 나도 좀 의외였어.”
“…아, 그리고 보니 저번에도 발데즈 영애였죠? 그러네요.”
유모가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나는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황자가 보낸 봉투에도 좀 싫은 기색을 드러냈던 것 같은데…….
“욜리 얘, 나쁜 사람 판별할 수 있는 감각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사이나가 욜리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며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사이나에게 좋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해 주는 그런 감각이라든지. 약간 범상치 않은 녀석이니 뭐 모르는 일 아닌가?
사이나는 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씨익 웃었다.
* * *
로하튼 거리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사이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리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구경을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자 선물은 어디서 사야 하지?’
사본 적도 없고 무얼 살지도 아직 못 정한 상태다 보니 선뜻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게다가 문득 루퍼트를 보니 생각나는 사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 서임 받았을 텐데 축하도 못 해줬네.’
그녀의 호위기사를 하겠다고 미뤄둔 서임까지 받은 사람 아닌가. 조금 무심했다 싶었다.
‘나온 김에 루퍼트 선물도 사야겠다.’
“잡화 상점 쪽으로 가죠.”
“예. 그럼 이쪽이 빠릅니다.”
잡화 상점이 몰려있는 곳은 광장을 끼고 부티크 거리의 반대편에 있었다.
사이나는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상점들을 살피다가 한 가게를 발견했다.
‘가죽 공방인가….’
가죽을 이용한 맞춤 제품을 만들어 파는 곳인 것 같은데 단순히 ‘가죽’을 떠올렸을 때 떠오르는 투박한 이미지가 아니라 고급지고 섬세한 물품들이 많았다.
특히 전시품 중에 흰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품을 발견하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경. 여기 좀 들어갔다 올게요.”
“예. 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내부가 잘 들여다보이는 구조라 사이나는 하녀 한 명만 대동하고 상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내부에 들어서자 가죽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다. 다행히 처리를 잘했는지 역하지는 않았다.
“보니까 흰색 가죽으로 만든 제품이 있던데….”
“아, 흰색 가죽이요? 그건 북부에서 사냥된 백색 짐승들에게서나 드물게 얻을 수 있는 색상이라 공급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럼 지금은요?”
“다행히 반 필 정도는 여분이 있습니다만… 큰 제품은 만들 수 없습니다.”
“장갑은요? 가능한가요?”
“아, 장갑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흰색 가죽을 보자마자 그게 떠올랐다. 공작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의뢰하면 언제까지 될까요?”
“무두질부터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음, 열흘에서 이 주정도 소요될 것 같은데요.”
“꽤 걸리네요.”
“사실, 지금 예약 작업이 꽤 있어서요.”
흠. 다음 수요일에 만날 때 전해주고 싶은데 어찌 안 되려나.
“돌아오는 화요일까지 완성해 주시면 열 배 드릴게요.”
“…예에?”
마담 샤를리즈 때의 경험이 있어 다시 질러봤는데 주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찌, 안 될까요?”
돈도 돈이지만 역시 너무 촉박한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의욕 넘치는 목소리.
열 배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주인장- 물건 나왔나?”
딸랑. 종소리와 함께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인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어! 아가씨는!”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안면이 있는 얼굴.
‘…밸류아 서점의 그 남자네?’
분홍 머리카락에 눈물점을 가진 미형의 남자. 분명 그 남자가 맞았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우리 인연인가?”
“…….”
“오늘도 이름 안 알려줄 거예요?”
이름을 알고 싶으면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에도 느꼈지만 아가씨, 왜 이리 느낌이 익숙하지? 이상하단 말이죠?”
남자는 헤실헤실 웃으며 또 뭔가 작업성 멘트를 날려댔다.
자꾸 제게 눈웃음을 치며 바람둥이처럼 살랑거리는 게 꺼림칙해서 사이나는 별로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뭐, 저 얼굴이면 바람둥이가 되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뭔가 묘하게 친근한 기운을 풍긴단 말이지? 막 편안하고, 응? 정체가 뭘까요, 아가씨?”
“…….”
“왜 여기 있어요? 뭐 사러 왔어요?”
상점에 뭐 사러왔지, 왜 왔겠는가.
“왜 대답을 안 하지?”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데이트 신청해도 돼요?”
“…….”
“침묵은 긍정?”
이젠 정말로 숫제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는 사이나의 표정을 보더니 남자가 되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데이트 신청한 게 그리 이상해요? 나 이래 봬도 꽤 인기 많은 남잔데?”
사이나는 적당히 상대하고 이만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인 쪽으로 고개를 틀자마자 남자가 사이나의 시야 앞으로 제 상체를 들이대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지만 말이다.
“……저리 좀 가시죠?”
“이름도 안 알려줘, 데이트 신청도 안 받아줘. 그럼 제가 갈 수가 없지 않을까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그런가?”
“…….”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사이나는 얼른 멀어지고 싶어져서 옆으로 비켜선 다음 주인에게 말했다.
“음, 물건은… 그날 내가 시종을 보내어 찾아가도록 할게요.”
“어, 예….”
여기서 가문을 밝히고 보내달라고 했다가는 저 분홍 머리 남자가 분명 들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 꼭 부탁드려요.”
“예. 알겠습니다.”
이만 상점을 나가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남자가 또 앞을 막아섰다.
남자의 눈썹이 축 처져 울상이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쉬운데……. 그때도 나 너무 궁금해서 잠도 못 잤어요.”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가씨, 기사님을 불러올까요?”
대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지 하녀가 물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남자는 그냥 좀 이상한 거지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후…. 아! 그 말 알아요?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연분이라고?”
…들어본 것 같기도?
갸우뚱거리는 사이나를 보던 남자가 씨익 웃더니 덧붙였다.
“다음에 우리가 우연히 한 번 더 만나면 세 번째니까, 천생연분이 될 운명인 거죠.”
…이상한 정도를 넘어섰네. 과대망상증 환자인가?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꼭 내 데이트 신청 받아주기! 어때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게 잘못된 거라니까요.”
“아, 맞다.”
“…….”
“음, 근데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름은 데이트하는 동안 알려주면 안 될까?”
“…….”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아도 집요한 면은 있었다. 적당히 넘기고 얼른 떠나야겠다.
“…다음에 우연히 또 만나게 되면, 그땐 통성명을 하도록 해요.”
“데이트가 아니고?”
“다시 강조하자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데이트는….”
“알았어요, 알았어. 납득했음.”
슬쩍 다시 걸음을 옮기는 사이나의 앞으로 다시 제 잘난 얼굴을 들이밀며 남자가 사이나에게 세뇌라도 하듯 반복했다.
“통성명하고 나면 꼭 내 데이트 신청 들어주기예요?”
사르르 눈웃음까지 치는 것이 아주 열심이었다. 하긴, 저 웃음을 보면 대다수는 거절을 못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듯한 껍데기는 인성과 전혀 상관없다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사이나로서는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요.”
다만 너무 단호한 표현을 쓰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대충 대답을 뭉뚱그렸다.
대답을 들은 남자의 입이 떡 벌어져서 좀 의아하긴 했지만 말이다.
“와. 아가씨, 엄청 철벽이네요.”
“…….”
“근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미친놈이다. 미친놈이야.
사이나는 안색이 창백해질 것 같아 표정을 수습하려 애쓰며 걸음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만나요!”
다행히 더는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다.
사이나는 티가 나지 않게 걸음을 놀려 도망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 한도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상점을 빠져나왔다.
“아가씨?”
“아, 경.”
상점 바로 앞이 아니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루퍼트가 사이나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다가오며 물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