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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57화 (57/233)

57화. 넌 오늘 선을 넘었어

엘리자베스는 기어코 화제를 도로 끄집어냈다.

“당장 내보냈으면 좋겠어.”

아무리 이쪽의 실수가 있다지만, 그래도 선이 있는 법.

사이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져서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앉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벌써 두 번째 공격이야. 나 이런 요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

요구? 누가 오라고 했나?

“정이 들어서 그런 거면 내게 넘겨. 내가 처분할 테니.”

“하.”

처분? 처분이라고!

욜리는 사이나에게 유리의 잔재를 느끼게 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 누구도 욜리를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자 때문에 신경이 바짝 선 상태에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좋게 넘어가려던 마음은 사라지고 서늘하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도를 모르는군.”

사이나의 입에서 여태 들어보지 못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이만 가줘.”

“…뭐?”

“그리고 앞으로 사전 약속 없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방문을 원하면 미리 요청을 넣도록 해.”

애초에 출입을 제재시켰어야 했다. 기존에 내려둔 허가를 잊고 거두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다.

“지, 지금 짐승 대신에 날 내쫓겠다는 거야?”

“그래. 넌 오늘 선을 확실히 넘었어. 뭐? 처분?”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니? 지금 피해자 대신에 공격한 짐승을 싸고도는지 알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이 아이는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협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사이나의 시선이 더 차갑게 내려앉았다.

“넌 내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주제에,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내, 내가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잖아!”

욜리.

공작이 분명 전에 ‘착한 녀석’이라고 했다. 그가 흰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분명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거고, 욜리가 유독 엘리자베스를 싫어하는 것도 이유가 있을 테지.

세 번의 여지고 뭐고 필요 없다. 더 이상 두고 볼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욜리를 건드린 순간, 엘리자베스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어도 정말 ‘친구’라면 없던 상황으로 만들어 주는 게 진짜 친구가 아닐까?”

“무슨….”

“그런 의미에서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야. 아니, 친구였던 적이 아예 없었던 것 같네.”

“…….”

“앞으로도 없을 거고. 널 만날 일도, 찾을 일도 없을 거야. 그리고…….”

냉랭하게 말을 내뱉는 사이나의 표정은 서늘하다 못해 얼음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말을 잊었다.

“얄팍할망정 여태까지의 인연으로 네게 관대하였다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원하면 어디 한번 시험해 보렴.”

어쩌면 예언에 가까울 경고성 발언을 끝으로 사이나는 몸을 돌렸다.

“사이나!!”

악에 받친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응접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말했다.

“손님 가신다. 배웅해 드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 * *

저녁 식사 시간.

아버지와 세이지, 사이나가 모두 모여 함께 식사 시간을 가졌다.

계약할 것이 있다며 백작까지 황도로 오게 되어 간만에 세 식구가 모두 모인 것이다.

“황성 티 파티에서 사고가 있었다지?”

본식이 끝나고 디저트가 나올 때쯤, 드보프 백작이 물었다. 소식이 아버지께도 들어간 모양이다.

“별일 아니었어요. 찻물이 엎어져서 드레스를 망친 것뿐이에요.”

“저런. 데인 곳은 없고?”

“네. 괜찮아요. 조금 식은 데다 바로 의원이 왔는걸요.”

사이나는 걱정하실까 봐 얼른 다친 곳이 없음을 어필했다.

“정말 없어? 근데 왜 황자 전하가 황성의료원으로 오라는 거냐?”

하지만 황자의 서신을 읽어보았던 세이지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나 보다. 금세 이리 캐물어 댔다.

“혹시 덜 나았을까 봐 그런가 보지. 근데 갈 일 없어. 멀쩡하다니까? 내가 홀딱 벗고 다 보여줘야 믿을 거야?”

“…….”

이렇게까지 하자 납득을 한 모양. 하나 그것은 다쳤느냐의 여부에 불과했다.

“애초에 황자가 그 티 파티에 왜 있었던 거야?”

“나도 몰라. 갑자기 오셨어.”

황자 뒤에 전하라는 말이 빠지기 시작하자 드보프 백작은 집사에게 눈짓했다. 집사를 제외한 모든 시종들이 물러갔다.

“너 자칫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 될지 몰라서 그래? 숨길 게 아니라…….”

“내가 숨길 거였으면 그 서신을 줬겠니? 오라버니?”

“…….”

“그래, 세이지.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해라.”

사이나도 숨길 생각은 없다. 다만 황자의 태도가 뭐라 단정하기 힘든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일 뿐.

“나도 황자 전하가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뭣 때문에 나한테 그러시는지도 모르겠고.”

“남자가 여자한테 들이댈 때 무슨 다른 목적이 있겠어. 뻔한 거지.”

“아니, 헤베타도 있고, 황실 쪽은 그게 다가 아니잖아?”

“나도 그게 좀 이해가 안 되기는 하는데….”

귀족들조차도 정략결혼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황실은 오히려 신분에 관대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연애 결혼을 할 가능성이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황실이 신분에 관대한 이유가 아무나 상관없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신의 여부가 황태자의 비가 되는 필수 조건이니 그리고 그 임신이 굉장히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알고 보면 일반 귀족보다도 더 까다롭게 상대를 골라야만 하는 것이 바로 황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는….

“아버지. 혹시….”

정확히는 몰라도 헤베타 관련한 것이 아닐까?

“헤베타를 고르는 기준을 아세요?”

사이나가 적합성을 띠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찔러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헤베타?”

“황자 전하께서 제게 관심을 보이신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 아니라면…….”

“착각은 아닌 것 같다.”

혹시 자의식과잉인가 싶어 다시 한번 세이지의 의사를 묻자 그가 확답했다.

“…그럼 그 이유가 두 가지 정도 될 거 같은데, 그중 하나가 헤베타일 것 같아서요.”

“너를 다음 헤베타 후보로 생각 중인 게 아니냐고?”

아버지는 생각도 못 해본 듯 질문을 곱씹었고,

“허…. 그리고 보니 반즈 영애가 2년이 넘었지…….”

세이지가 새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헤베타를 중앙 귀족 중에서 들인 적은 없었는데?”

드보프 백작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중앙 귀족 중 누가 제 딸을 헤베타로 보내겠는가.

“그럼 그냥… 저를 어떻게 해보고 싶은 걸까요?”

“뭘 어떻게 해?”

두 번째 이유는 사실 가족에게 말하기는 좀 그런 내용이기는 한데, 헤베타가 목적도 아닌데 들이대는 이유면 하나밖에 없지 않나?

“…하룻밤?”

“…….”

“…뭐?!”

기분이 좋지는 않으나 그 외에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세이지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지고, 드보프 백작의 표정 역시 차갑게 굳었다.

“사야, 너… 너 어찌 그런 생각을….”

갓 성인이 된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니… 나도 민망한 화제이기는 한데…… 그럼 오라버니, 다른 이유로 생각되는 게 있어?”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어찌 드보프가의 적녀를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세이지는 분기탱천해서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말이지.

“그렇죠? 우리 가문이 그리 만만하게 뭔가 해볼 만한 집안은 아니죠?”

“당연하지!”

“그럼… 헤베타 쪽은요? 만에 하나, 혹시라도 황명이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지레 겁먹고 앞서가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물었다.

드보프가가 나름 명망이 있는 가문이기는 하나 관리를 배출하는 쪽도 아니고 상계에 주를 둔 가문이다 보니 정치 쪽 입김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뭔가 방도를 찾기도 전에 황명이 떨어지면 방법이 없었다.

분명 중앙 귀족가에 반발이 일기야 하겠지만, 문제는 어떤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사이나 개인으로서는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넘고 만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랄까.

“…….”

“…내 알아보마.”

드보프 백작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 * *

다음 날.

사이나는 몇 가지 개인적인 일을 처리했다.

아주 공손하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는 답장을 황자에게 보내고, 병문안을 와준 친우들에게 또 따로 감사 편지를 했다.

황녀 전하께도 티 파티 때 치료받을 수 있게 궁을 빌려주시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적은 서신과 작은 선물을 준비해 보냈다.

황자의 꽃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액세서리 룸으로 들어갔고, 드레스는 드레스 룸으로 가기는 했으나 제일 뒤 칸 보이지 않는 곳에 걸어두라 명했다. 차마 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공작에게는… 쓰기는 했으나 따로 챙겨두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서 전령을 통하기보다는 직접 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매주 만나고 있으니.

‘공작님이 주신 물약, 그거 엄청 좋던데….’

사실 황성의료원이나 다른 약에 기대지 않아도 된 이유가 그 물약 때문이 아닌가. 그것 말고도 사실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 보니 공작에게는 조금 더 성의 표시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상점이나 둘러보며 쓸 만한 선물이 있나 살펴볼까?’

그래. 이번 주엔 내내 황도에 있을 테니 내일 잠깐 나갔다 오자.

“내일 로하튼 거리에 잠깐 나갈 생각이야, 유모.”

“쇼핑하시게요?”

“응. 살게 좀 있어서.”

“알았어요. 준비시켜 둘게요.”

“고마워.”

그리고 유모에게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들었다. 화가 나서 돌아가는 와중에도 나무함은 다 챙겨갔다고 한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 가져갈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아니, 어쩌면 예상했었나.

그러나저러나 사이나는 완전히 정을 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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