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남자가 드레스를 선물할 때 기대하는 것
더 묻지는 않았다.
꼬치꼬치 캐묻기에는 모인 면면과 환경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뭔가 짐작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때, 시종이 소식을 알렸다.
“아가씨, 발데즈가의 영애님이 깨어나셨습니다.”
* * *
연이은 소란과 사이나의 입장을 생각해 일행들은 이만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사이나는 일행들을 저택 현관 포치까지 직접 안내했다. 갈 시간이 되기 전에 쫓아 보내는 듯해서 미안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마무리로 가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우연이 겹쳐 생긴 일을 너라고 어떻게 하겠어.”
사이나는 사과와 함께 옆에 시종에게서 작은 상자를 받아서 각각의 손에 넘겨주었다.
“칼루아 티야. 가서 가족들과 마셔.”
“와, 병문안 왔다가 호강한다?”
“아니야, 소량인걸. 대량으로는 구매할 수가 없었거든.”
“우린 아예 구경도 못 했는데 이게 어디니.”
에비앙이 감탄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사이, 저택 뒤쪽에 주차해 두었던 가문의 마차들이 줄지어 포치 앞으로 와서 섰다.
에비앙이 마차에 타고, 플로리아도 타려다가 멈칫하더니 사이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곤란한 일이 발생하거든, 말해. 내가 오빠에게 부탁해서라도 어떻게 힘써볼게.”
속삭이듯 귓가에 남긴 말에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의외였다.
동그랗게 처진 눈은 어울리지 않게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귀여웠다. 고양이인 척하는 강아지 같달까.
“고마워요, 공녀님.”
“…어, 왜.”
“고마워, 플로리아.”
“……치.”
사이나는 공녀에게 공대로 감사를 표하고, 이젠 정말 친구가 된 것 같은 플로리아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했다.
플로리아도 그런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슬쩍 눈을 흘기고는 마차에 탔다.
마지막으로 카이언과 키얼스틴.
“…괜찮아?”
많은 뜻이 담긴 것 같은 카이언의 질문에 사이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사야. 몸 괜찮으면 다음 주에 또 보자?”
“응. 그럴게.”
사고가 요란했던 거지,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니 말이다.
“너의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음에 이어서 하자구.”
“…어?”
“꼭이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단호한 약속을 남기고 키얼스틴은 마차 위로 올라탔다.
곧 세 대의 마차가 줄지어 저택을 떠나갔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포치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더 와서 섰다.
검은색의 대형 마차. 크레이머가의 것이었다.
마차를 인지하고 나자 갑자기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인기척이라기보단 등 뒤에 있는 어떤 기색이랄지, 존재감에 가까웠다.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작은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으므로.
“…각하.”
“…….”
이내 시종들이 포치 양옆으로 늘어서고, 세이지와 집사가 배웅을 위해 와서 섰다.
공작이 돌아서서 여지를 줘야 말문을 열 텐데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지그시 사이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또다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사이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려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성에게 드레스를 선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드레스 선물이 무슨 뜻이냐고?
황자가 자신에게 보낸 선물에 ‘망가진 드레스에 대한 보상’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걸까?
글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황자의 관심이 도를 넘은 듯한데… 괜찮은 건가?”
“…네?”
“그러니까 뭔가 좀 이상한….”
콘스탄틴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말해도 좋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얼마든지 돕도록 하지.”
“제가 어찌…….”
그녀를 돕겠다는 말이 벌써 몇 번째. 주변에 좋은 사람이 이리 많으니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공작은 의외였다.
어떤 옮고 그름이나 도움을 줄 수 있음의 가부를 떠나, 그가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지위가 아니기도 하고.
“그대는, 내 조력자가 아닌가.”
“…….”
조력자라. 그 말에 사이나는 눈길을 들어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시릴 정도로 파아란 눈동자와 시선이 닿았다.
그 안에서 이유랄지,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사이나는 집중했다.
호수 같은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빠져들었다. 분명….
휙.
하지만 자그마한 끄트머리를 잡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공작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마차로 올라서고 있는 그를 향해, 집사와 세이지가 인사를 남겼다.
멀어져 가는 검은 마차를 눈 안에 남은 파란 잔상과 겹쳐보며, 사이나는 생각에 잠겼다.
‘여성에게 드레스를 선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그럼… 공작이 그녀에게 보냈던 드레스는 무슨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
* * *
남은 것은 엘리자베스.
머리가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이나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자베스는?”
“깨어나셨기에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작은 응접실입니다.”
“알았어.”
걷다 보니 머릿속에 아까 마주쳤던 공작의 눈빛이 다시금 떠올랐다. 멍하니 보느라 뭔가 잊은 듯한데…….
“아, 집사?”
“예.”
“각하께 선물을 챙겨드리는 것을 잊었는데…….”
떠올리고 보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도련님께서 마차에 들이셨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다행이다.”
이따 오라버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이야기도 좀 나누어야 할 것 같다.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사이나는 작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자베스가 깨어나면 몸단장을 도우라 지시해 뒀었다. 잘 이행되었는지 욜리가 물어뜯어서 산발이 되었던 머리는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잔뜩 씹어서 구멍을 송송 내놨던 드레스 역시 갈아입은 상태.
보통 여분의 드레스를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 사이나의 옷을 입혀야만 했다.
하나 묘하게도 본래 엘리자베스를 위해 맞춘 것인 양 아주 잘 어울렸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맞춘 것이라 엘리자베스의 취향이 더 많이 개입된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 기장이 좀 길었겠지만, 엘리자베스가 기절해 있는 동안 급하게 수선을 시켰다. 다행히 그럭저럭 잘 맞는 것 같았다.
“문 닫아! 얼른!”
엘리자베스는 혹시 또 욜리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두리번거리며 얼른 문을 닫으라고 사이나를 재촉했다.
“몸은 좀 어때?”
사이나는 소파에 앉으며 가볍게 물었다.
“하…….”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네가 입고 온 드레스는 수선이 힘들 것 같아. 미안해.”
“…아끼는 거였는데.”
“새로 맞춰줄게. 똑같은 거 그대로 맞춰도 되고 새 시즌 디자인으로 맞춰도 되고.”
엘리자베스가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이쪽을 보았다.
“청구는 내 앞으로 해. 원하는 부티크 가서 맞추고 결제 때 이거 주면 돼.”
사이나는 개인 인장과 서명이 찍힌 카드가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일회성의 신용 채권 같은 거였다.
“흠. 아끼던 드레스지만… 알았어.”
엘리자베스가 봉투를 들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화가 풀린 듯했다.
환한 실내에서 단정한 모습으로 마주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밝은 톤은 확실히 네게 더 잘 어울리네. 역시 이런 디자인은 나보다 네가 입는 게 더 예뻐.”
“어머, 사야.”
“괜찮으면 가져갈래? 꽤 많이 맞춰뒀는데 지금 보니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안 입을 것 같거든.”
엘리자베스에게나 잘 어울릴 듯한 드레스가 십수 벌 넘게 있었다.
어차피 드레스 룸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라 어울리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한 번도 안 입은 것들이야. 샤를리즈 부티크 거고.”
마담 샤를리즈의 이름이 나오자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럼에도 그렇다 할 긍정은 없어서 사이나는 거절로 받아들였다.
사실, 새것이긴 해도 심리적으로는 중고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네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해본 소리야.”
사이나는 괜히 기분이 나빴을까 봐 덧붙였다.
“아냐! 챙겨줘. 흠, 친구가 생각해서 주는 건데 그것도 도리는 아니지.”
갑자기 소리치듯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안 내키는 것 같았는데 또 반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이 복합적이었다.
“음, 그럼 보고 괜찮다 싶은 것들만 골라서 가. 이런 쪽의 안목은 네가 더 나으니까.”
사이나는 당장 하녀를 시켜 드레스들을 가져오게 했다. 순식간에 응접실 안에 펼쳐진 화려한 드레스들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입꼬리가 꽤 많이 올라갔다.
심리적인 중고라고는 했으나 실물로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마담 샤를리즈의 작품이다. 섬세한 디테일부터 고급스러운 디자인, 아낌없이 장식된 보석들까지. 누가 보아도 최고급 드레스라는 느낌이었다.
괜찮다 싶은 것들만 골라서 가라고 했지만, 결국 하나도 빠짐없이 대형 나무함 안으로 들어갔다. 사이나는 그것도 모자라 다른 함을 더 가져오게 해서 그 드레스와 함께 맞췄던 모자나 클러치, 숄, 머리 장식 등까지 다 넣어주었다.
이쯤 되자 아무리 엘리자베스라도 표정 관리가 힘든지 광대가 밀려 올라간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이는 사이나가 욜리를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었다.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전의 일을 잊어다오.
이런 의사를 표현하는 일종의 귀족식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나는 약간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보다 더 얕게 파악하고 있었거나.
“근데 사야, 그런 짐승을 저택 내에서 키우다니, 네가 예법에 관심 없는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