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소름 돋는 선물, 섬뜩한 보답
사람 수가 많아지자 욜리는 치맛자락을 놓고 인의 장막을 뽀르르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배배 꼬인 치마폭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결국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쿵. 묘하게 둔탁한 소리가 났다.
‘머, 머리라도 부딪힌 거 아니야?’
사이나는 놀라서 엘리자베스를 붙들었다.
“베쓰! 베쓰! 괜찮아?”
말썽쟁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건 너무했다. 욜리의 대형 사고에 미치도록 당황스럽고 미안해진 사이나가 허둥지둥 엘리자베스를 살폈다.
탁!
거칠게 자신의 손을 뿌리친 엘리자베스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사이나! 대체 뭐 하는 거야! 미친 짐승을 집 안에서 키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돌았니?!”
“…….”
막 던져지는 말에 사이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크아아아앙!”
그리고 사이나가 뭐라 반문을 할 여지도 없이 욜리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꺄아아악!”
쓰러진 탓에 얼굴로 곧장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는 성난 송곳니에 엘리자베스가 또다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욜리!!”
정말 얼굴을 물어뜯기라도 할까 봐 경악한 사이나가 손을 뻗었다.
욜리는 달려드는 사람들의 손을 피해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물어 열심히 잡아 뜯고는 다시 사라졌다.
꼬르륵. 엘리자베스가 혼절했다.
“…….”
“…….”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미안해.”
사이나는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소란에 사과했다.
“우린 괜찮아. 걔도 다친 데는 없다며?”
“응. 그냥 놀라서 기절한 것 같아.”
“다행이네.”
엘리자베스는 현재 손님방에 잠시 뉘어 놓았다. 하녀가 지켜보고 있으니 깨어나는 대로 알려올 것이다.
아무래도 욜리는 엘리자베스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했다. 안 그러면 유독 그녀에게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정말 다친 데가 없어서 그렇지 얼굴에 상처라도 났다면… 으으.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근데 걔는 원래 오기로 되어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미리 알았다면 욜리를 치워놓기라도 했을 테지.
“흐음…. 걔 오기 전만 해도 욜리는 멀쩡했는데. 희한한 일이네.”
그러게. 대체 엘리자베스만 보면 왜 그렇게 달려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기절까지 한 걸 보면 엄청 무서웠을 텐데…….
“그나저나 약속도 없이 드나들 정도로 친한 사이란 말이야? 사야, 나 서운해지려고 그래.”
“에…?”
“그치, 얘들아. 서운하지 않아?”
“맞아. 서운하네.”
“응! 서운해!”
“…….”
에비앙의 동의와 플로리아의 뾰족한 입술을 보며 사이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제든지 와. 환영이야.”
“…….”
“상대적으로 내가 더 한가한 편이니까 이쪽에서 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거지, 일부러 초대 안 한 건 아니야.”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지나치게 진지한 대답이 오자 되레 당황한 것은 세 사람. 그중 키얼스틴은 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암튼 농담도 못 해. 사야, 요 귀여운 것!”
키얼스틴이 또 사이나의 볼을 잡아오며 외쳤다.
“으앗? 농담이었어?”
“농담 반, 진담 반. 그런 거 아니겠니?”
사이나는 진심이었다. 이리 와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공작 각하는 어디 가신 거야?”
“아까 나가시던데. 잠깐 화장실에라도 가신 게 아닐까?”
“그럼, 카이언은?”
“각하 나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갔는데?”
“…….”
에비앙의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모르지…?”
“어리바리하게 굴 땐 언제고, 저도 남자라 이건가?”
키얼스틴이 킥킥 웃으며 뜻 모를 소리를 해댔다.
사이나는 무슨 뜻인지 물을까 하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잠깐만 실례할게.”
“어디가?”
“뭐 확인할 게 있어서.”
“혹시 재밌는 장면 보게 되면 꼭 알려줘야 한다?”
“…응?”
키얼스틴은 또다시 킥킥거리다가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나도 갈래.”
“…어딜?”
“사야 넌 어디 가는데?”
“……유모한테?”
실은 방문해준 손님들에게 작은 선물이나마 들려 보내려고 준비해 달라 부탁할 참이었는데, 키얼스틴이 따라간다고 해서 대충 유모에게 간다고 둘러댔다.
“난… 레이디스 룸?”
“…의문형이야?”
레이디스 룸에 가고 싶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네. 키얼스틴은 그저 나른하게 웃기만 했다.
어찌 되었건 둘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세이지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오라버니?”
그는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꽃다발과 아주 커다란 나무함을.
미간에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다가와서는 사이나 앞에서 멈춰 섰다.
‘…장미?’
푸른색 꽃다발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기대감보다는 불길함이었다.
“어머, 이거 로열 로즈 아니야?”
키얼스틴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누가 봐도 로열 로즈다. 푸른빛이 영롱한 장미는 못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이나. 이 오라비에게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아?”
“…누구한테 온 건데?”
“누구겠느냐.”
황족이라면 다 이 꽃다발을 보낼 수 있겠지만, 세이지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그 사람’인 것 같다.
사이나의 표정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받아. 황족이 보낸 선물을 대신 열어볼 수는 없으니.”
사이나는 애매하게 굳은 얼굴로 나무함을 받아 바로 옆에 있는 문을 열었다. 허공에서 든 채로 열어보기에는 상자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어제 일 때문인가? 황녀 전하셔?”
황가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결론은 쉽게 나오기에 키얼스틴이 그리 물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익숙한 꽃다발을 보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어, 카이언? 여기 있었어? 각하도 계시네요.”
미처 생각도 못 하고 들어왔는데, 남성용 휴게실이다.
시가를 피울 수 있는 소파와 가볍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작은 바, 체스나 카드 게임을 할 수 있는 오락용 테이블이 갖춰진 그런 공간이다.
“누나? 사이나? 형?”
내부엔 공작이 연초를 피우고 있었고, 그 앞에 카이언이 마주 보고 있었다. 둘이 여기서 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걸까? 약간 의외였다.
“한잔하러 왔나?”
“…네? 아, 아뇨.”
“난 괜찮으니 그게 뭐든 볼일을 보도록 해.”
용도보다는 빈방이 필요했던지라 난감했다.
“내가 자리를 피해주지.”
사이나의 난감한 기색을 읽었는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사이나는 돌아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러다 나무함의 모서리와 문간이 쾅, 부딪혔다.
“앗!”
나무함이 사이나가 들기에 너무 큰 데다 무겁기도 해서 부딪힌 충격에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바닥에 떨궈지며 그 타격으로 뚜껑이 열렸다. 내부의 내용물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황족이 내린 선물(선물인지 뭔지 아직은 모르지만)을 부숴버린 사람이 될 뻔했다.
다행히 깨지는 종류의 물건은 아닌가 보네, 하며 안도했는데…….
“뭐야, 드레스?”
“구두에 모자까지, 풀세트인데?”
다행이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흰색 베이스에 황금빛 리본,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드레스는 딱 봐도 엄청난 고가로 보였다.
“이거 에틸렌느 작품 같은데?”
키얼스틴이 상자를 수습해 옆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에틸렌느라니. 황실 전용 드레스를 만드는 부티크 아닌가.
환호가 아니라 사색을 띠며 사이나는 함께 떨어진 황금색 봉투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것이 더 가까우리라.
그 봉투는 세이지의 손을 거쳐 다시 사이나에게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울상이 지어졌다. 정말, 정말 열어보기 싫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미룬다고 될 일도 아니다. 사이나는 차라리 얼른 해치우기로 했다.
[고귀함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의 영애여.]
또…….
도입부만 봐도 확실하다. 새삼스레 솟아오르는 가벼운 소름을 무시하며 사이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영애에게 더 맛있는 티를 즐기게 해주고 싶어 의욕이 앞섰던 듯하군.
다음 기회에는 조금 더 완벽한 티 타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지.
상처를 잘 치료했다는 말은 들었네. 그러나 약간의 붉은 기가 남았다고 들었다.
언제든지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황성의료원에 영애의 이름을 일러두었으니, 와서 후속 치료를 받도록 하게.
아, 어제 찻물이 든 드레스 대신 선물을 보내니 다음에 입고 오시게. 분명 내 눈에 흡족할 것이야.
보답은 그 드레스를 입고 영애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족하네.]
그리고 멋들어진 황자의 서명으로 서신은 마무리되었다.
“…….”
내가 대체 뭘 본거지?
사과까지를 바란 것은 아니다. 지배자는 무치(無恥)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하지만 황자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왜 황자에게 보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보답이라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다 못해 섬뜩한 일인 것은 각설하고 말이다.
사이나는 갑자기 황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리라고 했던 세이지의 말이 생각나 그에게 편지를 넘겼다.
이 정도면 정말 알려야 할 것 같다. 뭔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세이지가 얼른 내용을 읽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얼른 서신을 갈무리해서 품에 넣었다.
“…….”
다른 일행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함께 침묵하는 중이었다.
“찻물에 드레스가 망가졌다고 대신 보내신 모양이야.”
사이나는 키얼스틴에게 애매하게 웃으며 작게 말했다.
“흐응.”
키얼스틴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사이나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듯 물었다.
“황자?”
“…….”
침묵만으로 대답이 된 듯 키얼스틴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가,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