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난입자 + 또 다른 손님 = 난장판
또 말하려는 데 선수를 뺏겼다. 게다가 대답도 이상하다.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라니…. 뭔가 맞는 말인데 이상하잖아!
사이나는 또다시 당황한 얼굴을 하며 공작을 보았다.
얼굴만 같고 다른 사람인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흐응.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라니. 대체 무슨 사이일까.”
키얼스틴의 얼굴에 아주 즐거우면서도 궁금해 죽겠다는 기색이 같이 떠올랐다. 반짝반짝하는 눈빛에 장난기가 충만해서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아니고, 내가….”
“우리, 비밀로 하기로 하지 않았나.”
아를어 관련해서 도울 일이 있어서 만나는 것뿐이다, 라고 설명하려던 차에 또 공작이 치고 들어왔다.
네? 비밀로요…? 그리고 ‘우리’는 또 뭔가요…?
보석 관련해서는 보안을 요구받았지만, 아를어 관련해서 돕는다는 사실 자체는 필요한 경우 알려도 무방하다고 합의를 하지 않았나.
하지만 비밀이라고 대놓고 말을 하니 어디까지가 비밀인지 사이나가 딱 잘라낼 수가 없어 더 설명할 수도 없었다.
결국 둘은 <‘필요’에 의해 만나며, ‘비밀’을 공유한 ‘아마도 매우 긴밀한’ 사이>라는 이상한 결론만을 내리게 생겼다.
“각하, 이런 식으로 불확실하게 뭉뚱그려 표현하시면 오해를 유발할 것 같습니다.”
그때, 카이언이 입을 열었다.
여태 과묵하게 앉아 있던 그가 한 말치고 꽤 날카로운 어투였다.
“자네는?”
“애크로이드가의 장남, 카이언이라고 합니다.”
“오해라 하였나?”
“예. 사이나는 사교계에 갓 데뷔한 참인데 불명확한 가십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각하께서야 황도에 자주 안 계시니 신경을 안 쓰실지도 모르겠으나…….”
“불명확하다? 그걸 자네가 어찌 판단하지?”
“그럼 아니… 란 말입니까?”
공작은 이어지는 대답 없이 묵묵히 카이언을 바라보기만 함으로써 은근히 기를 죽였다.
작위도 작위지만 갓 소년에서 벗어난 카이언은 이미 한 남자로서 우뚝 선 공작을 상대하기에 벅차 보였다.
물론 오가는 대화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저 이상했지만.
‘전에 소문 안 나게 조심해준다고….’
공작이 동의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사이나는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로 공작을 살폈으나, 그는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 이상하리만치 사이나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든 의사를 표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차에,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이 녀석!”
보통 귀족가에서는 듣기 힘든(게다가 손님이 있는 응접실 근처에서는 더욱더 듣기 힘든) 우당탕 뛰는 소리와 외침이 점점 가까워졌다.
커다란 의문을 품고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문 쪽으로 돌아갔다.
“캬앙!”
짐승다운 포효와 함께 응접실 문을 통해 쏜살같이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한 잿빛 덩어리. 바로 욜리였다.
잠깐 멈춘 욜리가 이를 드러냈다가 다시 뛰어서 사이나를 덮쳤다.
“꺄아악! 사, 사이나!”
그 모습에 에비앙이 깜짝 놀라 소리를 치며 뒤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공격당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이나에게 닿기 직전 누군가가 욜리를 손쉽게 가로챘다.
“크앙!”
공작이었다. 욜리는 어느새 뒷덜미를 잡힌 채 공작의 손에서 바동대며 불만족스러운 울음을 울어댔다.
“욜리!”
이놈의 자식이 요즘 왜 자꾸 뜬금없이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단 말인가. 사이나는 나름 무서운 눈을 하고 욜리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보더니 욜리가 네 발을 얌전히 모으고 공작의 손에 조용히 대롱대롱 머물렀다.
“후……. 죄송합니다.”
사이나의 사과를 들으며 공작이 익숙하다는 듯 욜리를 그녀의 무릎 위로 놓아주자, 언제 그리 공격적이었냐는 듯 얌전히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렸다.
“아가씨!”
바깥에서 유모와 하녀 둘이 헉헉거리며 뛰어 들어오며 죄송함을 표했다.
“갑자기 아래로 달려가는 바람에 막을 수가 없었어요. 손님분들, 죄송합니다.”
사이나는 문을 꼭꼭 잘 닫고 다니는 것 같은데 욜리 녀석은 이상하게 잘도 빠져나갔다.
말썽꾸러기 녀석을 한 번 노려봐 주고 사이나는 일행에게 한 번 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난 괜찮다.”
공작이야 이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놀랐지? 미안해. 내가 키우는 강아지인데 좀 말썽이 심해.”
공작에게 먼저 사과하고 일행에게도 사과했다.
“아, 얘가 네가 말하던 그 녀석이구나?”
“응. 욜리야.”
“욜리, 호오…. 이리 줘봐. 나도 안아볼래.”
“아니, 다시 내보내려던 참인데…?”
이 중 짐승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라긴 했는데, 나도 괜찮아.”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괜찮다고 했고 플로리아도 동글동글한 눈으로 욜리를 보는 것 보니 괜찮아 보였다. 카이언도 그렇고 말이다.
사이나는 양해를 구하고 욜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여자 셋이 모두 아래쪽으로 손을 내밀며 이리 오라고 유혹을 해댔다.
욜리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낯가리는 거야?”
“좀 그런 것 같아….”
기준은 모르겠지만 사람을 가리는 편인 것 같아 사이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근데 또 그렇다고 말하자마자 어슬렁어슬렁 걸어서는 키얼스틴의 손바닥에 머리통을 비볐다.
변덕인지 뭔지도 모르겠는 이상한 녀석 같으니.
“어머, 귀여워.”
“나도 나도.”
“강아지치고 뭔가 묘하게 생겼어.”
키얼스틴 외 3인방은 욜리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우습게도 욜리가 아주 좋은 타이밍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전에 진행되던 난감한 화제가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이다. 애매한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아하하. 진짜, 카이언한테는 안 가네.”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툴툴거리는 것 같아.”
“어머, 공작님한테도…. 이 녀석 수컷인가 본데?”
사이나가 보기에 욜리가 카이언에게 대하는 태도는 아주 친절(?)한 편이었다. 공작에게 처음에 했던 행동을 비교해보면 말이다.
욜리가 크레이머 공작을 대할 때의 태도는 뭐랄까. 정말 싫은데 참아주는 느낌?
짐승도 누가 높은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걸까, 등의 생각을 잠시 하는 동안, 똑똑. 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였다.
“아가씨.”
“…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또? 이번에는 또 누구람?
오늘 일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공작이야 다쳤다는 소식에(그렇다고 하더라도 급히 달려와 확인할 만한 사이는 아닌 것 같지만) 온 거니까 그렇다 치고, 보통은 예고도 없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있었다. 그런 사람이.
‘…혹시?’
응접실을 나가서 집사에게 묻자 역시나였다.
“발데즈가의 영애님이십니다.”
엘리자베스가 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사야!”
그것도 모자라 정해진 안내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집처럼 안쪽까지 들어왔다.
해맑게 웃는 얼굴에서 어떠한 잘못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제 다쳤다고 들었어! 괜찮아?!”
내가 찻물을 뒤집어썼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난 걸까?
왜 황성 티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다 알고 있느냔 말이다.
“안 다쳤는데. 괜찮아.”
“어? 정말?”
“응.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어? 그게…….”
사이나의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약간 움츠러든 눈치를 보이더니 갑자기 사르르 웃으며 외쳤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그러더니 막무가내로 사이나를 이끈다. 문제는 자연스럽게 열려있는 응접실로 향했다는 거랄까.
문이 열려있고 바깥에서 시종이 대기 중이니 당연히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응접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앗, 베쓰! 거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엘리자베스가 입구로 다가가고 말았다.
“어…….”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으리라.
안쪽에는 빈 소파가 아니라 여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짐승으로 꽉 차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누구 하나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 없어서인지 엘리자베스는 순간 문가에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역시 엘리자베스. 외향적인 그녀는 금세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채는 속도도 빨랐다.
금세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는 사야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라고 합니다. 사야가 다쳤다는 말에 병문안을 왔어요.”
가장 친한 친구라는 소개는 그렇다쳐도 사이나는 난감했다.
저기 앉은 사람들은 상황이 겹쳤다고 해서 그것을 참고 넘어가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연히 만났으니 불편해도 합석?
그럴 리가. 불편한 감정을 굳이 참고 버텨야 하는 위치의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녹일 듯한 애교로 여러 무리에 잘 녹아들고는 했지만 이곳에서는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이 나서서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캬아아앙!”
욜리 녀석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오더니 무섭게 이를 드러냈다.
그것도 모자라 욜리는 그녀의 치맛단을 물고는 이리저리 휘돌았다.
“…꺄아아!”
엘리자베스는 혼비백산했다.
고운 천에서 두둑, 찢기는 소리가 났고 맹렬하게 빛나는 눈은 마치 천이 아니라 사람을 찢어발기고 싶다는 듯 살기를 흩뿌렸다.
“욜리이!!”
허둥지둥 녀석을 말리려 했으나 어찌나 빠른지 잡을 수가 없었다.
사이나가 잡겠다고 뛰어다닐수록 욜리가 치맛단을 이에 문 채로 뱅글뱅글 도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꼼짝없이 돌돌 말린 자신의 드레스에 갇히고 말았다.
“아아아악! 치워! 치워줘!”
비명과 우당탕탕 하는 소란에 시종과 집사, 유모 등이 모조리 몰려왔다. 기사들까지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달려왔을 정도다.
“야! 이 녀석!”
결국 사이나와 집사, 유모, 루퍼트까지 합세해서 욜리를 잡으려고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