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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53화 (53/233)

53화. 손쓸 틈도 없이 등장

“긴장해서.”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어 대답했다.

세이지가 황자에 관한 건 빼놓지 말고 알려달라고 했었는데 당장 여기서 말할 만한 사항은 아니니 말이다.

“…후. 그러게 미리미리 좀 여러 모임에 나가서 사교 활동에 익숙해졌다면 이런 일이 없었지 않겠느냐.”

“…….”

“그래서 자빠진 덴 괜찮고? 약은 발랐어?”

“…오라버니, 멀쩡하니까 그만해.”

실은 작작 좀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름 소가주의 체면을 생각해 사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 내 예전 파트너. 심성이 아주 곱고 세심하네요?”

“…키얼스틴 영애. 오랜만… 입니다.”

“전엔 키키라고 부르더니?”

“…….”

갑자기 세이지가 조용해졌다.

서로 애칭까지 불렀단 말이야?

데뷔탕트 볼 때 둘이 한참이나 사라졌던 게 기억났다. 그때 뭔 일이 있었나?

호기심이 충만해서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세이지를 보는데 어쩐지 점점 더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

“흐응. 나 여기 있는 거 알고 보러 온 거 아녔어요?”

“…동생의 친구들을…….”

“정말?”

점점 대화가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아 사이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문제는 중간에 그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는 거지만.

“도련님.”

“…집사?”

문가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세이지가 얼른 일어나 집사에게 다가가자 그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뭐? 정말인가?”

“예. 어찌할까요.”

“으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분위기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그때, 세이지가 묘한 얼굴로 사이나를 바라보았다.

사이나는 뭔지 모를 그 일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세이지의 표정을 보고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흘끔 사이나를 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세이지가 그녀를 응접실 바깥으로 이끌며 작게 속삭였다.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다는구나.”

“…뭐?”

“널 찾아오셨다는데?”

“……나를? 지금?”

“응. 지금.”

사이나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대체 왜 온 것인지는 둘째 치고 당장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응접실로? 아 그럼 친우들은 어떻게 해.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할까? 자리를 비우면 이유를 물어볼 텐데……. 각하께 다음에 와 달라고 해?’

찰나 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과 선택지들이 머릿속에 넘쳐났다. 하지만 무엇이 가장 적절한 판단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드높은 신분의 공작을 막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친우들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 쪽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

그런데 고민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도련님, 아가씨.”

집사가 세이지와 사이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부르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드보프가에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미처 결정도 하지 못했는데, 복도 끝에 장신의 실루엣이 보였다.

손쓸 틈도 없이 공작이 등장해버리고 말았다.

‘아…….’

참 커다랗기도 하지. 다리가 길다 보니 보폭도 크다.

남자는 몇 걸음만으로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를 장악했다. 눈앞에 선 것만으로 전방을 가득 채워버린 것이다.

그가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자 그늘이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쳤다 들었는데.”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낮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데 그늘이 더 짙어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다친 건 어찌 알았을까.’

설마 공작의 방문 목적이 병문안이란 말인가? 저 방 친우들처럼?

처음에 비하면 좀 낯설지 않은 사이가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커다랗고 높은 남자를 올려다보려니 그가 숙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한껏 넘어갔다.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사이나는 공작으로부터 내뱉어지는 말과 숨결이 어떤 촉감을 가지고 그녀에게 닿아오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고개를 젖히고 있던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다 보니 중심축이 뒤로 무너지며 넘어갈 뻔하고 말았다.

“앗.”

균형을 잃으며 꺾인 허리를 커다란 손이 감아왔다. 손바닥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허리 뒤쪽을 다 감싸고 받쳐낼 만큼 큰 손이었다.

그녀가 몇 번 잡았던 그 손….

드레스 천과 장갑, 겹겹이 겹친 여러 장막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가락과 손바닥의 형태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여전히 덜렁대는군.”

숨결을 피하려다 몸이 닿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닿은 부분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는 공작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는데 오늘은 왜 이런 걸까.

“감, 감사… 합니다.”

분명 사이나 외에 여럿이 이곳에 같이 있음에도 사이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려 눈꺼풀을 내리며 사이나는 몸을 돌려 그의 영역권 안에서 벗어났다.

그의 덩치가 너무 커서 다른 게 보이지 않는 거라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사이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긴 왜 오셨나요.”

당황하다 보니 사이나의 입에서 직설 그 자체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방문, 미안하네. 소식을 방금 들었거든.”

그러나 공작은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지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소식이요?”

“어제 황성에서,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

“네?”

대체 바깥에 무슨 소식이 돌아다니는 거란 말인가. 아니, 그리고 설사 사이나가 진짜로 다쳤다고 해도 그가 이리 달려올 일은 아닐 텐데?

“사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그냥 넘어진 게 아니었어?”

“…….”

갑작스러운 소식 알리미, 공작 각하 덕분에 세이지가 또 눈을 번뜩였다.

난감, 또 난감이라. 불만스러워진 사이나가 자신도 모르게 공작을 흘겨보고 말았다.

“…그런데 잘못 안 것 같군. 쌩쌩해 보이니 말이야.”

그래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흠. 잠깐… 만 시간을 내주면 내, 금방 가도록 하지.”

한 번 불손하기는 어렵지만, 두 번은 쉬운 것 같다. 사이나는 점점 불퉁해지는 것 같은 얼굴을 가까스로 관리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근데 실은 지금 친우들이 와 있어서요.”

“친우들?”

“네. 그래서 시간이-”

“저 방인가 보군?”

“…네?”

친우들 때문에 얼른 할 말만 하고 가 달라고 부탁하려는 차에 공작이 이상한 말을 했다.

사이나는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키키 언니?”

키얼스틴이 문밖으로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잠깐 레이디스 룸에 가려고 나왔다가….”

“아, 잠깐 하녀를 붙여줄게. 안내를….”

“사야~. 귀한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이리 바깥에 세워두면 못써.”

“그… 모시려던 참이었어.”

“그래? 여기 사야를 아끼는 사람들이 다 모였네? 함께하시겠어요, 각하?”

키얼스틴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작에게 합석 의향을 물었다.

원하면 이쪽 응접실로 오면 된다는 듯 손으로 방향까지 안내하면서 말이다.

‘이, 이게 아닌데…….’

아니, 레이디스 룸에 간다면서요?

뭔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공작씩이나 되는 그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친우들 모임에 끼겠다고 할 리는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쩌면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바로 돌아갈지도…….

“그러지.”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평소처럼 어긋났다.

‘……뭐? 그러지? 그러지이?’

사이나는 깜짝 놀라 공작을 바라보았으나, 예의 그 성큼 걷는 보폭으로 그는 순식간에 응접실로 사라지고 말았다.

* * *

‘하…. 대체 이건 무슨 또 조합이람….’

결국, 사이나의 친우들과 합석한 공작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은 다른 잔과 같은 것이었으나, 유독 작아 보였다. 마치 혼자서만 어린이용 잔을 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투박하다기보다는 우아했다. 귀족은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조합에 다들 말이 없….

“우리 사야와 어떤 사이시죠?”

……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키얼스틴의 입에서 폭탄 같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사이는 무슨 사이!’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면 분명 찻물을 뿜고 말았을 거다.

“차향이 좋군. 칼루아인가?”

공작은 직설적인 질문에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차를 들이켰다.

차 이름도 바로 맞혀 주시고 말이다.

“예. 올해 재배가 꽤 잘되었다고 하더군요.”

세이지가 말을 받았다.

여전히 사르르 웃는 얼굴이기는 하지만 키얼스틴의 미간 사이에서 짜증의 기색을 읽은 사이나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 사이도….”

“내가 굳이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공작이 치고 나왔다.

대답 안 할 것처럼 하더니 왜 또 갑자기? 게다가 그런 식으로 답하면 꼭 무슨 사이인데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잖아요!

사이나는 당황해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뿐 아니라 이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작만 보는 중이었다.

이리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여상한 기색으로 차를 마셨다.

뭔가 이어질 대사가 있을 것 같은 말투에 사람들이 눈을 이쪽저쪽 굴려가며 기다렸다.

그런데 공작이 계속 침묵을 고수하자 굴러다니던 눈은 사이나에게로 와 고정되었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사이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으나 의심스럽다는 기색만 더 진해졌을 뿐이다.

“그런 게 아니고….”

“굳이 설명하자면 흠,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라고 할 수 있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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