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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52화 (52/233)

52화. 과보호의 주역들

“그래. 거짓말인 줄 알았어?”

“헐. 웃으니까 장난 아니야. 본인은 모르는 거야?”

“응. 애가 똘똘한 것 같으면서도 저런 쪽으로는 좀 맹하더라고.”

뒤에서 작게 소곤거리는 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사이나는 그저 씩씩하게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애님들… 과….”

당연히 영애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카이언이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유모가 사이나를 바라보았다.

“애크로이드가의 영식이야. 저기 언니랑 남매고 내 친구.”

사이나가 얼른 설명했다.

“아, 죄송합니다. 애크로이드 영식.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모가 다시 밝은 얼굴로 방문자들을 환영하며 안내했다.

“여긴 우리 집 유모야.”

“마르다 드미쉘입니다.”

“안녕하세요, 유모님.”

“저희 아가씨를 외출하게 만들어 주신 영애님들이시죠? 너무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유모….”

“저희 아가씨는 너무 집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정말, 후…….”

다들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앞으로 더 자주 불러내야겠네.”

키얼스틴이 느릿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모가 반색했다.

“그럼 너어무 감사하지요.”

“…유모!”

“호호. 차를 들이라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모가 나가고 자리에 앉자마자 키얼스틴이 사이나를 붙잡고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봐봐. 아니, 벗어봐!”

“…어, 언니?”

“어제 완전히 화기가 안 빠졌던데 자기 전에 처치를 제대로 하긴 한 거겠지, 응?!”

“다 나았어! 정말이야. 완전 멀쩡해!”

키얼스틴이 정말로 드레스를 벗기기라도 할 기세라 사이나는 얼른 대답했다.

‘카이언도 있는데….’

당황한 사이나가 카이언을 흘끔 보니, 그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옆모습만으로도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음…. 으음…. 으으음. 정말이네?”

여기저기를 들추며 한참을 살피던 키얼스틴의 얼굴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애초에 완전히 뜨거운 차도 아니었는걸.”

“무슨 소리야. 너 가슴팍이랑 팔 부분 벌게진 거 내가 다 봤는데.”

“보기에만 그랬던 거고 초반 처치가 훌륭해선지 금세 괜찮아졌어.”

뭔가 이상하다 싶은 표정이었으나, 보이는 증거가 사이나의 말을 뒷받침해서인지 키얼스틴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휴, 어쨌든 다행이다.”

“그러게. 흉이라도 남았어 봐. 키키가 높으신 분께 테러라도 할까 봐 내가 애간장이 녹는 줄 알았다.”

“…에?”

“어제 주어 없는 욕을 어찌나 하던지…. 쯧.”

에비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설마 황자 욕을 했다는 걸까?

믿기지는 않지만 키얼스틴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같기도 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또 너무 고마웠다. 가족 외에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지난 시간에 받았던 이런저런 상처가 아주 많이 회복되는 느낌. 사이나는 이 사람들에게 정말 잘해야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니, 또 왜 공대야.”

“너무 고마워서…….”

눈물 몇 방울이 빼꼼 새어 나올 것 같아 눈매에 힘을 주며 사이나는 길게 웃었다.

“뭐야.”

“왜, 왜 이래.”

“응. 이상해.”

고맙다는 말에 왜 저리 난색들인가. 보람 없는 사람들 같으니.

분위기가 슬쩍 어색해지려던 참에 유모와 트롤리를 끈 시종들이 응접실에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차 들이겠습니다.”

손님맞이를 한다고 유모가 일찌감치 부산을 떨더니만 금세 테이블 위가 꽉 찼다.

딱 맞는 온도의 차는 물론, 오늘따라 티 푸드들 역시 호화찬란했다.

다양하게 차려진 쿠키와 스콘 등은 따끈따끈했고, 초콜릿 케이크와 에끌레어에는 윤기가 흘렀다. 이튼 매스는 여전히 탱탱했으며, 작게 잘린 과일들은 흠 하나 없이 신선해 보였다.

어울리는 티 푸드를 새로 다 구우라 지시한 모양이다.

“어머, 모임을 너나 우리 집에서만 할 게 아니었네. 이 집 디저트, 너무 훌륭하잖아?”

키얼스틴이 몇 가지 티 푸드를 개인 접시에 덜어 맛보고는 감탄했다.

“그러게. 아니, 차도 너무 훌륭한데?”

에비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모가 친우들이 온다고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아. 아, 친우… 맞지?”

“어머, 사야. 우릴 친우라고 여겨주는 거야? 감동.”

키얼스틴이 차를 마시다 말고 사이나의 목을 감으며 몸을 기대왔다.

코앞에서 사르르 접힌 눈매가 미소 짓자, 사이나는 어쩐지 찌르르한 기분이 들었다.

키얼스틴이 작정하고 누굴 꼬시려고 하면 과연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녀는 뇌쇄적이고 탐미적이면서도, 날카롭고 지적인 복합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놀라운 사람이다.

키얼스틴은 정말 멋졌다. 그리고 키얼스틴과 친한 에비앙, 플로리아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아차, 카이언도 있지.’

자신은 카이언과의 교류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찾아와준 모습을 보니 또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동갑내기임에도 ‘친구’라는 호칭을 쓰는 게 어색했다. 시간을 돌아오며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로 비롯된 ‘친구’라는 호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사이나는 친구보다는 ‘친우’라고 그들을 칭하고 싶었다.

사이나는 자연스럽게 얼굴 위로 떠오르는 기쁨을 가지고 카이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야?”

“응?”

“…왜 그렇게 봐?”

“차 더 마실래?”

어째서인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언의 잔을 가리키며 사이나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여러 디저트 중에서 덜 단 것 몇 가지를 골라 카이언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가 목을 가다듬으며 차를 마셨다.

사이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이번에는 플로리아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플로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으나, 사이나는 어제 티 파티에서 그녀가 자신 쪽으로 자몽 타르트를 밀어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다음 행동이 나왔다. 플로리아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런 사이나를 보며 플로리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래봐야 눈이 처져서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게 함정이지만.

“좋아하잖아, 이거.”

“흠, 흐음.”

이유는 모르겠으나 플로리아가 볼 언저리를 붉히며 딴청을 피웠다.

‘왜 다들 볼이 붉은 거지? 안이 덥나?’

이상한 의문을 가지고 내부를 살피던 사이나에게 에비앙의 물음이 들려왔다.

“근데 이거 무슨 차야? 뭔가 맛이랑 향이 생소하면서도 진짜 맛있어.”

그러고 보니 다들 차를 마시는 동안 사이나는 찻잔 한 번 안 들어본 상태였다. 수색을 들여다보고는 입에 머금어 보자 어떤 차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다른 곳에서 먼저 대답이 나왔다.

“남부 왕국에서 수입한 차입니다.”

남성의 목소리.

하지만 카이언은 아니다.

“…오라버니?”

세이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동생의 친구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인사차 왔으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이지는 기사가 레이디에게 할 법한 인사처럼 무릎을 깊게 굽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흐응?”

“드보프 영식이군요.”

“안녕하세요.”

“형?”

키얼스틴, 에비앙, 플로리아, 카이언. 반응도 각각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합류해도 될까요?”

“음, 네. 그러세요.”

눈빛으로 일행의 의향을 후루룩 읽은 키얼스틴이 승낙을 하고, 세이지가 앉았다.

대기 중이던 시종이 얼른 한 명분을 추가 세팅했다.

세이지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칼루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아, 이게 칼루아구나!”

“나도 들어봤어.”

“재력 넘치는 드보프 가문답다.”

“이거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칼루아 차는 남부의 한 왕국에서만 재배되는 차였다.

이 식물은 재배 환경이 아주 까다로웠다. 온화하면서도 서늘한 환경이 필수였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저런 환경에서만 자라났다.

그래서 이 차는 따뜻한 남부에 있는 몇 안 되는 서늘한 고원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꽃봉오리가 맺혔을 때, 잠깐 한철에만 딸 수 있는 차다. 꽃이 맺히기 전이어도 안 되고 꽃이 만개해도 안 된다. 만개하기 직전, 봉오리 상태일 때 수확해야 가장 극상의 맛을 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꽃잎을 따는 것은 아니다. 꽃차가 아니고 잎차라는 것이 또 다른 아이러니였다.

꽃봉오리일 때 딴 잎은 잎사귀임에도 꽃향기를 품는다. 잎과 꽃의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데 그 맛이 또 굉장히 훌륭해서 한번 맛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 차가 바로 칼루아였다.

하지만 특이한 재배 환경과 지독히 짧은 수확 시기로 인해 가격이 말도 못 하게 비쌌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지만 한 해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연줄이 없는 사람은 절대 못 구하는 게 또 이 칼루아 차이기도 했다.

“드보프가가 남부 쪽 상단과 연이 있어 올해 소량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와, 병문안 왔다가 호강하네.”

“…병문안? 이게, 무슨 소리냐, 사야.”

에비앙이 차에 감탄하며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 세이지의 날 선 반응에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데, 병문안이라는 말이 나와?”

사이나의 건강이 관련되면 유모 못지않게 그녀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나 봐봐, 오라버니. 내가 어디 아파 보여?”

“…흠. 그렇긴 한데.”

보이는 것으로 만족스럽지 않은지 세이지는 사이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고 여기저기 살펴댔다.

“어제 내가 일어나다가 바보같이 자빠졌거든. 창피하다고 안 나갈까 봐 위로해 주려고 온 모양이야.”

“…뭐? 그 사람 많은 데서 자빠졌다고?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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