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병 줬지만 약은 됐습니다
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다 보니 의자가 무릎에 걸렸다. 말 그대로 홀랑 뒤로 넘어가기 직전.
“흐앗!”
황자가 그녀를 허리를 감아 안으며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지 황자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를 안은 채 옆으로 폴싹 쓰러지고 말았다.
이럴 거면 왜 그녀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어떻게 해요!”
“황자님!”
“여기, 드보프 영애가!”
난리 법석이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사이나는 불쾌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황자가 사이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요상한 각도로 쓰러진 탓이었다.
예민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이 차를 뒤집어쓴 부위보다 더 신경 쓰였다.
사이나는 서둘러 그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이나!”
에비앙이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일으키며 부축했다.
키얼스틴은 차가운 물에 적신 여러 장의 냅킨을 가져와 드러난 살갗에 올리며 소리쳤다.
“시종! 얼음과 독주를 가져와! 쓸 만한 휴게실도 필요하다!”
치맛자락 부분은 풍성해서 찻물이 스며드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상체가 문제였다.
한두 방울 튄 가슴팍이 벌써 발갛게 달아올랐고 가장 심하게 젖은 복부 쪽에서 아릿함이 느껴졌다.
“이런, 괜찮은가?”
어느새 일어난 황자가 말했다.
“내 궁으로 가지! 거기에 유능한 황실 의원이 있다. 흉터가 남지 않을 것이다. 내 장담하겠네.”
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데.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이런 일은 금세 해결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말투에 사이나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가지! 영애, 이리 오라!”
덥석 손목을 잡은 황자가 사이나를 당겼다.
“읏.”
어찌나 세게 당겼던지 손목이 빠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피부도 쓰라렸다. 아무래도 팔뚝 부분에도 찻물이 튀었던 듯했다.
“전하, 놔주십시오.”
손목이 아팠지만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발에 힘을 주며 버텼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황자의 궁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궁도 많은데 굳이 왜 황자의 궁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손목이 아픕니다.”
화상은 귀족 영애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다. 가장 흉터가 남기 쉬운 상처이기도 하고, 가장 흉측한 종류의 상처이기도 하기에.
특히 자주 내보여야 하는 얼굴이나 목덜미, 가슴패기 등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최악으로 두려워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아마 다른 영애들 같았으면 혼비백산하여 울며불며 황자의 말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나는 조곤조곤한 말투일지언정 분명 거절을 말하고 있었다.
“치료,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황자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고집을 피웠지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드보프가로 돌아가 치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화상에 좋은 약이 있어 그것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찻물이 그나마 좀 식은 상태였기에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이나의 피부가 워낙 하얀 편이라 발갛게 익은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한들, 황성의 것에 비하려고!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얼른 처치를 하는 것이 낫지 않나?”
“…그럼 황녀 전하의 궁에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의원님을 그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이나의 말에 황자는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근처에 있던 황녀가 다가오더니 동의를 표했다.
“그래요, 오라버니. 생각해보니 제 궁이 더 가깝지 않습니까. 화급한 일이고 치료를 하려면 드레스를 벗어야 할 수도 있으니 제 궁이 더 낫습니다.”
“…그렇게 하라.”
보통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권위 있는 자가 재빠르게 해결책을 제시하면 저도 모르게 그것을 따르기 마련이다.
당장은 황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당연해 보이겠으나, 이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면 분명 수군거리는 자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뻔히 이 상황을 본 사람들조차 치료를 하려면 드레스를 벗어야 했을 텐데 황자가 다 보지 않았겠냐는 둥 망발을 하는 것이 이 바닥 생리였다.
사이나는 단순히 황자가 싫어서 거절한 것이지만, 타인들의 눈에는 화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귀족 영애의 귀감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에비앙, 여기 좀 부탁할게.”
“알았어.”
키얼스틴은 에비앙에게 티 파티 뒷수습을 부탁하고는 사이나를 부축하며 황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황녀의 궁으로 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한참 동안 주시했다.
황자는 황자만의 이유로, 에비앙과 플로리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리고 다른 참석자들은 놀라움을 담아.
사이나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면 명화의 정원에 어렵게 들어갔는데 감상을 제대로 못 한 거랄까.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담소 후에 정원 순회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사교계에 사이나의 존재감을 새기는 면으로 따진다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 * *
“아가씨이!”
육체적인 것보다 심리적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로 저택에 돌아온 사이나는 자신의 방에서 간단한 치료 과정을 한 번 더 거친 후 잠이 들었다.
오늘은 정말 푸욱, 늦게까지 자고 싶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유모가 들이닥쳤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응, 왜…. 나 더 잘래.”
“안 됩니다. 방문 요청이 들어왔어요!”
방문 요청?
“……이 아침부터? 설마 오늘?”
“네.”
대체 누가 이른 아침부터 서신을 보내 당일 방문을 요청한단 말인가.
서신을 아예 안 보내고 들이닥치는 것보다야 예의 바른 거지만, 당일에 요청하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에서는 무례한 일이었다.
특히 꾸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귀족 영애를 상대로는 더욱.
“…누군데?”
“애크로이드가, 드미트리가. 그리고 애버딘가요!”
아하. 어제 키얼스틴이 붉은 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사이나의 피부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못 참고 들이닥치기로 했나 보다.
“일어나야겠네.”
걱정이 되어 문안을 온다는 친우들을 향해 투덜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유모는 얼른 꾸밈 하녀들을 부르라 바깥에 이르고는 사이나를 도왔다.
“그나저나 어제 다른 드레스를 입고 돌아오셨다면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사이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마르다도 똑같았다.
아침마다 사이나에 관한 보고를 따로 받기라도 하는 건지, 어찌 이리 잘 안담.
“아, 어제 티 파티 중에 찻물이 튀었거든. 드레스가 좀 망가져서 황녀 전하께서 새 드레스를 입고 가라고 주셨어.”
어차피 상처도 남지 않은 상태라 굳이 치료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황성에서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았던 그녀의 피부는 집에 돌아와 공작이 전에 준 포션을 바르자 순식간에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황성에서 온갖 부산을 떤 것이 허무할 정도였다.
“네? 세상에. 설마 손이라도 떠셨어요? 혹시 기력이 갑자기 떨어졌다거나 그랬던 건 아니지요?!”
유모가 또 세상에 없는 허약한 사람 취급을 시작했다.
“내가 손을 왜 떨어……. 아주 쌩쌩했어. 그런 게 아니고.”
“아니, 그럼 어떤 멍청한 하녀가 실수라도 한 겁니까?! 혹시 데이셨어요? 어디-”
“아냐! 멀쩡해! 데인 데 하나도 없고, 그냥 드레스만 망친 거야.”
“어휴, 대체 어느 멍청한 인간이 차 한 잔 제대로 서빙을 못 하고! 큰일 날 뻔했네요!”
멍청한 하녀가 아니고 황자가 그랬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어쩐지 유모는 황자라고 밝혀도 비난을 멈출 것 같지 않다고나 할까. 유모가 황족모독죄를 범하게 하느니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다.
“정말 데이신 곳은 없는 거지요? 상처라는 게 초기 처치를 잘해야 흉터가 안 남는 법입니다.”
“응. 정말 없어. 보면 알잖아.”
유모 마르다는 듣고서도 찜찜한지 목욕을 하는 동안, 착·탈의를 하는 동안, 매의 눈을 뜨고 사이나의 앞뒤를 꼼꼼히 살폈다.
자신의 눈으로 다 살피고 나서야 손님 맞을 준비를 하러 가보겠다며 나갔다.
‘대체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평소에 사이나가 거짓말을 일삼는 것도 아닌데 건강에 관련한 사항에서는 이상하게 자신의 말을 믿지를 않았다.
‘저번에 말괄량이 짓을 보니 앞으로도 필요할 것 같아.’
공작도 저번에 그랬고.
자신은 말괄량이 짓을 한 게 아니고, 피해자일 뿐인데 말이다.
뭐, 엄청난 포션의 효과를 다시금 확인한 터라 투덜댈 마음조차 사그라졌지만.
“아가씨. 마차가 정문을 지났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티 타임이 되자 하녀 스밀라가 손님들이 왔음을 알렸다.
사이나는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향했다. 포치에서 그들을 맞아 그녀가 아주 멀쩡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야!”
“왜 나와 있어?”
“괜찮은 거야?”
포치에서 그녀들이 마중을 나온 사이나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들은 각각 가문의 마차를 타고 왔으나, 같은 곳에서 출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도착해 내리고 있었다.
“어서 와, 언니들. 플로리아 공녀…, 어?”
당연히 셋이리라 생각했는데, 애크로이드가의 마차에서 한 명이 더 내렸다. 카이언이었다.
“카이언?”
“사이나. 어제 큰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따라왔어.”
“큰일이라고 할 건 없었는데. 그렇지만 어서 와. 반가워.”
이른 아침부터 서신을 누가 보냈느냐며 투덜거린 것도 잠시. 오히려 그랬기에 그들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사이나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아주 커다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함박 떠오른 미소를 보고 다가오던 넷의 발걸음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이쪽이야. 방문해줘서 고마워요.”
사이나는 그러한 멈칫거림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진짜잖아? 키키 언니가 말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