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뻔뻔한 불청객
푹 빠진 게 아니고 미쳤다더라, 완전 괴짜라더라, 뭐 이런 식의 소문이었을 것 같지만 나름 미화해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네. 제가 좀… 그쪽에 관심이 많아요. 수호령도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 수호령! 이번 퍼레이드가 생각나는군. 정말 인상 깊었지. 그렇지 않소?”
황녀도 퍼레이드를 보았는지 흠뻑 웃으며 말했다. 하나 모두 애매한 표정이었다.
다들 오후에 있을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퍼레이드를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파티가 있는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는 영애들이니 사실 이게 보통이었다.
사이나가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네. 그 검은 갈기, 엄청난 존재감. 너무 멋있었어요.”
“어머, 사이나 영애는 그날 데뷔인데 퍼레이드도 본 거예요?”
“진짜… 보고 싶었거든요.”
약간 민망한 얼굴로 사이나가 대답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그 소문이 정말이었군.’ 이런 표정이다.
“아하하핫. 그랬군. 그랬어.”
황녀는 왜인지 몰라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참을 웃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사이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하나하나 말을 걸며 개개인을 챙기는 황녀는 상당히 사교성이 좋았다. 황녀라는 지위상 뭔가 고고하게 앉아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도도하게 굴 것이라는 이상한 편견(?)이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능숙하게 화제를 이끌면서도 영애들을 웃게 만드는 위트가 있었고, 생각 외의 소탈한 면도 있었으나 그게 황녀의 권위를 깎는다기보다 되레 매력을 부가시켰다.
오늘 황녀와 한 마디라도 말을 섞어본 이곳의 영애들은 모두 황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황녀라는 신분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동경과 친해지고 싶은 욕망과 별개로, 사람 자체가 멋져서 생기는 감정이었다.
‘좋은 분인 것 같다. 모임도 훌륭하고, 정원도 아름답고….’
사이나는 생각했다.
문제의 그날이 될 것 같았던 전조와는 다르게 티 파티는 아주 순조롭다고.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황자 전하 드십니다!!”
…일이 터졌다.
아니, 황자라니. 정말 황자라고?
사이나는 약간 경악스럽기까지 한 얼굴로 입구 쪽을 응시했다.
“하하핫.”
시종과 시녀들을 잔뜩 뒤에 달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티 파티 영역으로 들어서는 화려한 복장의 남자.
분명, 황자였다.
‘대체 황자가 왜 여길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조율이 되어있던 일인가 싶어 키얼스틴과 에비앙을 살폈으나, 설핏 굳었다가 펴지는 얼굴들을 보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황족에 대한 예우로 참석자들이 들고 있던 찻잔이나 포크를 얼른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스트인 키얼스틴과 에비앙은 유려한 몸짓으로 일어나 황자에게 다가갔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다른 참석자들도 영문을 모르는 듯했으나, 정해진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내리깐 황자의 목소리가 인사를 마무리하더니 또 하하핫 웃었다.
“예고 없이 방문하여 놀랐는가?”
그럼 놀라지 안 놀랐겠느냐만 황자에게 왜 놀라게 했느냐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감읍합니다.”
그저 감읍하다고 할 수밖에.
“오라버니? 어쩐 일이십니까?”
아무리 호스트라 해도 대놓고 여긴 왜 왔냐고 물을 수는 없는 법. 차라리 황녀가 물어주어서 다행이었다.
“하핫. 동생아, 명화의 정원이 개방된 것은 아주 오랜만이 아니냐. 네 공식행사도 오랜만이고.”
“그렇지요.”
황녀는 외부 활동이 드문 편이기는 했다.
몸이 허약해서 그렇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소문으로 치부하던 사람들도 황녀가 워낙 궁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자 기정사실로 여길 정도였다.
오늘 황녀가 보여준 활달한 모습을 보면 허약하다는 게 결코 믿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오라비가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하여 참지 못하고 와보았느니,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다만… 이 행사는 제가 주최한 자리가 아닌지라.”
“어디 나 하나 앉을 자리가 없겠느냐. 괘념치 말아.”
키얼스틴과 에비앙의 티 파티는 자리 배치의 특수성 때문에 다섯 배수 혹은 여섯 배수로 참석자의 수를 딱 맞추고는 했다.
딱 다섯씩 앉게끔 된 테이블 크기에 한 명이 더 끼어드는 것 자체가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황자가 하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키얼스틴과 에비앙은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잘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자리를 배치할 시간이 되었네요. 운이 좋은 영애들은 황자 전하와 함께 차를 마시는 영광을 가질 수 있겠군요.”
본래는 중간 자리 변경이 한 번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지를 발휘해서 한 번 더 할 생각인 듯했다.
그러면 운에 따라 적용되는 거니 말이 나올 요소가 더 줄어들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내린 판단이지만 좋은 수였다.
…사이나는 운이 나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황자 전하. 여기서 카드 세 장을 뽑아 주시겠습니까?”
다시 예의 그 다섯 장의 카드가 놓인 쟁반이 등장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각각 다른 세 명이 한 장씩 뽑았던 아까와 달리 황자에게 세 장을 모두 넘겼다는 거지만.
기왕 이리된 것 재빨리 착석 문제를 끝내려는 의지가 보였다.
“오, 그 유명한 제비뽑기로군.”
황자도 이 티 파티의 제비뽑기 착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웃으며 세 장의 카드를 택하여 뒤집었다.
“흠. 4번, 1번, 5번이로군.”
이번에는 사이나도 이동할 인원에 걸렸다. 플로리아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가볍게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일어섰다.
사이나가 다음 테이블로 가서 앉는데 옆 빈자리에 먼저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는 깜짝 놀랐다.
“흠, 난 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군. 여기에 의자를 하나 더 추가하도록 하지.”
황자였다.
‘…왜 하필 이 테이블에?’
그것도 자신의 바로 옆에?
시종 하나가 재빨리 의자 하나를 가져와 끼워 넣고는 간격을 조정했다. 미리 준비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등장한 여분의 의자였다.
그리고 시종이 물러나자 황자가 다시 일어나 갑자기 영애들의 착석을 차례차례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하핫. 숙녀분들께 봉사하는 것이 곧 보람이 아니겠는가.”
뭐가 봉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러했다. 1번 테이블의 영애들은 황자가 의자를 빼주는 것을 기다렸다가 밀어주는 것에 맞추어 앉기 시작했다.
딱히 그의 ‘봉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이 사이나도 기다렸다가 앉았다.
사이나가 앉고, 마지막으로 황자가 자신의 의자를 크게 빼냈다가 다시 당기며 앉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황자와 사이나의 거리가 다른 참석자들 간의 거리에 비해 아주 가까워졌다.
황자가 몸까지 사이나 쪽으로 약간 기대듯 앉은 탓에 둘이 꼬옥 붙어 앉은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길 정도였다.
‘…….’
부담스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사이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허리를 세웠다. 저도 모르게 황자 반대편으로 몸이 기울었으나 그것까지는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시종들이 또다시 재빠르게 테이블을 세팅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모든 사람의 찻잔을 다 수거했다가 다시 세팅했다.
“영애들을 위하여 선물을 가져왔소. 황가에서 주로 마시는 로열 로즈 티라네. 여기서 함께 맛보면 좋겠군.”
황성에서만 자라는 장미종인 로열 로즈가 만개하기 직전, 가장 향기로울 때 안쪽의 어린 꽃잎만을 따서 잘 말린 뒤, 차로 만든 것이 바로 로열 로즈 티다.
양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황족만 마시는, 혹은 황족이 상으로나 가끔 내리는 아주 귀한 차였다.
“로열 로즈 티!”
“어머, 색 좀 보세요. 너무 예뻐요.”
당연히 영애들의 입에서 찬탄사가 새어 나왔다.
로열 로즈 티는 시각과 후각, 미각을 모두 만족시킬 만큼 확실히 대단한 티였다. 화려한 색상이 찻잔 안에 피어남과 동시에 화사한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고, 들이켠 한 모금은 단숨에 입 안을 장악할 정도로 다채로운 맛이었다.
“아, 세상에. 너무 맛있어요.”
“입 안에서 꽃이 피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아마 황가가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황자비를 들이고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면, 황자의 인기는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수호령 승계 방식의 난해함으로 인해, 황후는 인력만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지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황자를 대하는 영애들의 태도 역시, 정말 먹음직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생김은 탐스러우나 그림 속 과일에 불과할 뿐,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족은 황족.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황족이 이 자리에 둘이나 있으니, 참석자들의 들뜬 기분은 누가 보아도 당연했다.
“맛이 어떠한가, 사이나 영애?”
“…아주 훌륭합니다. 확실히 로열 로즈구나 싶을 정도로 놀랍고 풍성한 맛입니다.”
황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사이나에게 묻는 바람에 깜짝 놀랐으나 그런대로 대답했다. 로열 로즈 티의 맛은 속일 것도 없이 훌륭했으므로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다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은 애써 외면했다.
“그거 아는가. 로열 로즈 티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렇군요.”
“여기 이 소금을, 많이는 말고 아주 약간만 타면 풍미가 훨씬…”
“제가…….”
“아니다. 이리 저어서… 엇!”
그때, 일이 터졌다.
황자가 소금이 담긴 동그란 함을 가져와서는 사이나의 잔에 넣고 저어주다가 그것을 엎고 만 것이다.
잔을 젓던 힘이 어찌나 과했는지 찻잔이 넘치다 못해 소서 바깥으로 떨어지며 사이나의 앞섶을 한껏 적시고 말았다.
“아!”
펄펄 끓는 물은 아니라고 해도 아직 뜨거운 상태라 사이나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