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새침한데 귀여워
“음, 2로군.”
“어머, 전하의 자리를 뽑아 주셨네요. 이동하셔야겠어요. 괜찮으시죠?”
모든 테이블의 2번 자리는 이동 대상이 된다.
“괜찮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네 장의 카드가 놓인 쟁반을 들고 키얼스틴이 이번에는 사이나에게 다가왔다.
“다음 카드는 마찬가지로 오늘 처음 참석한 사이나 영애에게 부탁드릴게요.”
사이나에게만 보이게 살짝 윙크를 하며 그녀가 쟁반을 내밀었다. 사이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카드 하나를 들어 키얼스틴에게 내밀었다.
“1번이군요. 마지막으로 한 장만 더 뽑을게요. 혹시 자원하실 분?”
3번 테이블의 한 영애가 손을 들었다. 키얼스틴이 다가가서 쟁반을 내밀자 카드 하나를 뒤집었다.
“음, 5번입니다. 자 그럼 각 테이블의 1번, 2번, 5번에 앉으신 분들은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 주실까요?”
영애들은 자리 이동이 익숙해 보였다. 해당자들이 각자 일어나서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시계 방향에 놓인 다음 테이블이었다.
사용인들 역시 익숙한지 영애들이 새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기존에 있던 찻잔 등을 치우고 새 잔과 커틀러리, 냅킨 등을 재빨리 세팅했다.
한 테이블에 다섯 명. 총 세 테이블.
참석자의 반 이상이 움직이는지라 어수선할 만도 한데 일련의 과정들이 굉장히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사이나는 이동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대로 남아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묘하게도 플로리아였다.
‘앗…!’
새로이 착석한 사람들을 보자 입이 떡 벌어질 것 같아 사이나는 입매를 단단히 잡았다.
그중 한 명이 황녀였다.
황녀는 플로리아 우측에 앉았는데 사이나의 맞은편이라 고개를 들면 시선이 딱 마주치고는 했다.
“자아, 새로운 얼굴들이 있으니 다시 통성명을 해볼까?”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
황녀 기준 시계 방향인 플로리아부터 주욱 돌아가며 짧게 통성명을 했다.
간략한 소개가 끝나자, 시작점이었던 플로리아를 대상으로 먼저 황녀가 입을 열었다.
“애버딘 공작은 무탈하오? 작년과 올해 유독 마수가 들끓어 고생이라는 소식은 들었소만.”
황녀의 입에서 공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영애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해졌다.
미혼 공작의 근황이다. 당연하게도 귀가 솔깃할 것이다.
“네. 유난히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마수를 토벌하고 서북 경계선을 지키는 것은 애버딘의 의무니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 분명한 영애들이 귀족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플로리아의 답변을 듣고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그리고 거의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수호의 주간이 머지않았으니, 황도로 올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 이상하게 플로리아가 사이나를 흘끔거렸다.
‘…왜 그러지?’
플로리아가 사이나를 대하는 태도는 꽤 모호한 면이 많아, 완전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적의는 아닌 것 같아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반면 영애들은 그 소식에 환호했다.
“4대 공작님들이 다 모이시는 그 날이군요.”
“그러게요. 벌써 기대가 돼서 못 참겠어요.”
수호의 주간은 한 해의 가장 마지막 주를 말하는 것으로 4대 공작가가 일제히 모였다.
귀족원까지 다 모여 금년 있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논하고 다음 해에 새로이 행하거나 의논이 필요한 국가 중대사에 관해 회의를 한다.
그리고 황가와 4대 공작가만 따로 모여 또 회의를 한다고 들었다.
국가적으로야 중요한 행사지만 사이나는 사실 딱히 큰 관심이 없었다.
‘수호의 주간에도 퍼레이드 좀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
수호령을 볼 수 있는 행사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단순한 기준.
수호령이 구경거리도 아니고 4대 공작이 그리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 싶어도 볼 기회가 없다 보니 사이나로서는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드보프가의 영애라고 하였던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황녀가 사이나 쪽으로 화제를 옮겨왔다. 플로리아가 테이블 아래로 슬쩍 발을 차 주어서 흠칫, 정신이 들었다.
“…네. 사이나 드보프입니다. 전하.”
황녀의 질문을 무시하게 될 뻔한 탓에 약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자네가 그 영애로군? 크레이머 공작과 최초로 파트너로 온 영애 말이오.”
난감한 화제가 나왔다. 또 다른 미혼 공작의 화제에 영애들의 눈이 또다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네. 어쩌다 보니 그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번 건국제 이전에는 영애를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맞소? 혹시 내 기억이 잘 못 된 거라면 양해를 바라오.”
“아닙니다. 제가 이번 건국제 때 데뷔했으니 황녀 전하의 기억은 정확하십니다.”
“그러오? 데뷔가 좀 늦은 것이 아니요?”
다른 영애들도 궁금했는지 질문을 거들었다.
“그러게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나요?”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사이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작년에 데뷔하려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미루었습니다.”
“그렇소? 이런, 지금은 괜찮소?”
“네.”
“다행이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아니에요, 다 나았는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황녀와 황녀 우측에 앉은 영애가 걱정의 말을 남겼다.
사이나는 어릴 때부터 교류하던 친구가 없었기에 거의 1년을 누워있었음에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문이 유명해서 ‘드보프 백작이 딸이 아파서 걱정이 많다더라.’ 정도로 소문이 났을 뿐이다.
“작년에 데뷔했어도 꽤 늦은 편인 것 같은데, 몸이 원래 약한가 봐요. 지금도 좀 창백해 보여요. 진짜 괜찮아요?”
“아, 네. 정말 멀쩡해요.”
창백한 건… 해를 잘 못 봐서 그렇다. 현재의 몸은 매일 서재에 박혀서 아를어 번역이나 들이 파던 그 몸이다. 말할 만한 이유가 아닌지라 약간 민망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묘하게 사이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플로리아가 갑자기 한쪽 손을 들었다.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재빨리 다가와 물었다.
“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플로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상태로 나직하게 시종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시종이 알겠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사이나는 오가는 이야기에 적당히 말을 맞추다가 테이블에 새 접시가 올라오는 것을 흘끔 보게 되었다.
‘…자몽 타르트?’
플로리아가 따로 요청한 모양이다.
‘달달한 디저트를 더 좋아하지 않았나?’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몇 주 만나는 동안 사이나는 플로리아 영애가 잘 먹던 디저트 종류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보통 초콜릿 케이크나 생크림 케이크, 부드러운 티라미수 등이었기에 좀 의외였다.
‘가끔은 상큼한 것이 당기기도 하니까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플로리아가 오른쪽에 있던 접시를 들더니 왼쪽으로 놓고는 손끝으로 천천히 밀었다. 사이나가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플로리아의 오른손은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 중이었는데 왼손은 계속 자몽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슬며시 밀고 있었다.
‘……?’
그러더니 적당히 사이나 쪽으로 넘어갔다 싶었을 때 움직이던 접시가 멈추었다.
대체 뭐 하는 걸까 싶어 플로리아를 주시하던 사이나의 시선이 흘끔 시야를 올린 그녀의 것과 딱 마주쳤다.
“쿨럭.”
플로리아가 작게 기침을 했다.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는지 얼른 무릎 위에 있던 냅킨을 들어 입을 톡톡 두들겼다.
그 일련의 행동들은 물 흐르듯 우아했으나 사이나는 이미 보고 말았다. 약간의 찻물이 새어 나와 슬쩍 턱으로 흐른 것을 말이다.
플로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새침했으나, 볼이 살짝 달아오른 것을 보아 약간 당황한 듯도 했다.
‘…설마 나 먹으라는 건가?’
시간을 되돌아오면서 입맛이 약간 달라진 사이나였다. 또래 영애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류보다 단맛이 덜한 얼그레이 케이크나 새콤한 파이, 혹은 타르트류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몇 번의 만남을 가지는 동안 사이나가 플로리아의 입맛을 알게 된 것처럼 플로리아 역시 그런 걸까.
아까 아팠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해서 나름 위로해준다고 이러는 것 같기도 했다.
‘은근히 귀엽잖아.’
아까 발을 톡톡 차서 사이나의 주의를 환기시켜 준 것도 고마웠는데,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모습을 보자 그간 자신이 플로리아를 오해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이나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어나 만개했다.
“고마워요.”
진심을 담은 미소가 입가로 그려지며 눈매가 접히자 사이나의 인상 전체가 달라졌다.
플로리아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사이나를 보다가, 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흠흠거리며 다시 차를 들어 마시는 그녀의 볼은 꽤 빨개져 있었다.
“그런데 사이나 영애. 크레이머 공작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소감은 어땠소?”
“쿨럭.”
이번에는 사이나가 찻물을 뱉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수습했다.
흘깃 마주친 플로리아의 얼굴에도 미소와 궁금증이 같이 묻어있었다.
다른 영애들의 눈빛도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공작을 그렇게 가까이서는 본 적이 없어 궁금하군.”
“저도요.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께서 개회사 이후에 계시는 것도 전 처음 보았지 뭐예요.”
“맞아요. 그리고 춤도 신청하셨었죠!”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어요.’ 공격이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별 사이가 아니라는 걸 어찌 강조한담. 사이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각하께서 제가 아를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 관련해서 물으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아를어? 아, 그러고 보니 영애, 고대어 공부를 좋아한다지요? 그런 이야기 저도 들었어요.”
“맞아요. 고대 문명에… 그, 푹 빠진 영애가 있다고. 그게 영애였군요.”
모르긴 해도 저게 아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