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황가의 다음 세대
연한 하늘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반짝이는 장신의 여성. 매디얼 맥페이든, 제국의 황녀였다.
황족에 대한 예우로써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호스트인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입구로 다가갔다.
“참석해 주셨군요. 감읍합니다, 황녀 전하.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먼저 키얼스틴이 입을 열었고 다른 참석자들이 합창하듯 반복했다. 황족을 만나면 기본으로 하는 축언사였다.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황녀가 이를 받아 대답했다.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이 넘쳐나지만 황가는 그 위에 존재한다. 태생부터 남다른 황녀는 그 권위가 핏속에 흐르기라도 하는 것인지, 온화하게 웃고 있는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남달랐다.
특히 사이나는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황녀를 본 적이 없어서 더 신기했다.
같은 황족이라도 황자는 꺼림칙하기만 했는데, 황녀는 느낌이 또 달랐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시에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자리표를 뽑아 주시겠습니까?”
와아. 황녀라고 해도 예외는 없나 보다. 어떤 의미로는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더 대단했다.
“아,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제비뽑기 자리 배치요?”
“예. 재미라고 생각하고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만큼은 저도 호스트의 권리를 휘둘러 황녀 전하와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었으나, 모든 참석자들이 같은 심정일 것이기에 참았답니다.”
에비앙과 키얼스틴의 말에 참석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제발 황녀가 자신의 테이블에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상자에 손을 넣었다 빼고,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내는 황녀의 일련의 동작을 모두가 숨죽이며 주시했다.
“흠. 1-2번이 나왔소만.”
황녀의 말이 나오자마자 1번 테이블의 참석자들이 꺅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이쪽 테이블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알겠소.”
황녀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키얼스틴을 따랐다. 사이나는 그 드높은 존재가 점점 가까워졌다가 앞을 지나 걸어가는 모습을 거의 넋 놓고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그 잠깐 사이, 잠시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다. 움찔한 사이나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황녀는 가볍게 웃으며 지나쳤다.
“환대에 감사하오. 모두 앉으시오.”
“예, 전하.”
황녀의 자리가 정해지자 키얼스틴과 에비앙의 자리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호스트는 가장 마지막 남는 번호, 즉 빈자리에 앉는다.
에비앙은 황녀와 같은 1번 테이블, 키얼스틴은 3번 테이블이었다. 무작위 배치였으나 호스트가 한 명이라도 황녀와 같은 테이블에 배치되었으니 다행이다.
서 있던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사용인들이 재빨리 담당 테이블을 오가며 티 푸드 접시를 세팅하고, 빈 잔을 채웠으며, 식은 차를 교체했다.
재빠르면서도 조용한 움직임들을 보니 얼마나 교육이 잘된 사용인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황성 소속일까, 아니면 키키 언니가 사적으로 데려온 사람들일까. 그런 궁금증이 들 정도로 훌륭했다.
사이나의 생뚱맞은 궁금증과 별개로 테이블 세팅이 끝나고 사용인들이 외곽으로 물러나자, 본격적으로 티 파티가 시작되었다.
채앵-.
가볍게 빈 유리잔을 튕기는 소리가 참석자들의 집중을 요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너무 반갑습니다. 그동안 다들 잘 지내셨나요?”
에비앙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짧은 개회사를 하려는 모양이다.
“오늘은 헤베타이신 일레인 반즈 님이 명화의 정원을 열어주셔서 이렇게 멋진 홀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 헤베타 님이?”
“…그분이 왜 그러셨을까요?”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었다. 라이벌인 하퍼 영애 파벌의 주축 중 하나인(물론 키얼스틴은 전혀 라이벌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 않지만) 일레인 반즈가 명화의 정원을 열어 티 파티를 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하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 하겠지.
게다가 이 소식이 하퍼 파벌 영애들의 귀에 들어가면 얼마나 불평불만이 새어 나오겠는가. 왜 우리가 아니라 저쪽에 열어주었느냐, 우리는 안 열어주느냐 등, 꽤나 골치 아프게 될 것이다.
감사를 표하면서도 일레인 반즈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또 황가의 다음 세대이신 황녀 전하를 이 자리에 모실 수도 있었죠.”
‘황가의 다음 세대’라는 명칭을 사용해 소개하는 것을 보니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아마도 황자는 지금 분을 삭이고 있을 것 같은데.’
일레인 반즈가 편지를 쓸 때 표현을 제대로 못 해서 황자 대신 황녀를 초대한 게 아니냐며 약혼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짧았지만 잠깐 본 성격으로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전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사교계 다음 세대 간의 좋은 교류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와 상기된 분위기.
지금 분위기는 거의 그런 느낌이다. 일레인 반즈‘조차’ 사교계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주축들은 이쪽임을 인정하고 명화의 정원을 열어준 그런 느낌 말이다.
말 그대로 일레인 반즈는 오늘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오늘 새로운 얼굴이 한 명 더 있답니다.”
이번에는 키얼스틴이었다.
그녀가 어느새 사이나의 뒤쪽으로 다가와 서서 어깨를 감싸며 웃었다.
“영애, 가볍게 소개를 좀 해주실까요?”
황녀 전하야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앉아서 인사를 받았지만, 사이나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롱또롱한 시선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어쩐지 데뷔를 치를 때보다 더 시선이 부담스러운데……?
“안녕하세요. 드보프가의 사이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황녀 전하처럼 위트 넘치는 멘트를 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저 냉랭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엷은 미소만 지으며 틀에 박힌 인사말을 했다.
짝짝짝.
그리고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이나는 만족했다.
홀랜더 자작부인으로 살던 시절만 해도 사람들이 그녀에게 던지는 시선에 좋은 의미라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경멸이나 동정의 시선이 아닌 것으로 사이나는 충분했다.
황녀 전하가 계시는데 더한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되기도 하고 말이다.
전체적인 인사가 끝나고, 각자의 테이블에 집중할 시간이 되었다.
2번 테이블에 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은 새로운 얼굴인 사이나를 위해 간략하게 서로 소개를 하고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진입했다.
“……그래서 그 영식이 글쎄 갑자기 무릎을 꿇었대요.”
“어머, 진짜요?”
“요즘 꽃집에 붉은 장미가 동난 게 그 때문이라나 봐요.”
“아, 저 포인트 색으로 장미를 이용하려다가 다른 것으로 바꿨는데, 그게 그것 때문이었군요? 세상에.”
초반이라서일까. 그간 일어난 일들과 사교계 가십, 유행 등의 화제가 오갔다.
사이나야 이 자리가 처음이지만 이 티 파티는 오래된 모임이고 굉장히 사람을 가려 받는 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무작위로 한 테이블에 앉게 된 사람들일지언정 다들 친해 보였다.
공작 영애인 플로리아에게 유독 더 친절하게 구는 것이 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 당연한 거라 적당히 맞장구만 치며 차를 마셨다.
‘넷이서만 모였을 때랑 완전 다르네.’
키얼스틴과 에비앙에게 ‘언니, 언니’ 하며 귀엽게 굴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다른 영애들을 대하는 플로리아의 모습은 또 그것 나름대로 귀여웠다.
“자아, 여러분. 같은 테이블의 분들과 대화 많이 나누셨나요.”
자리에서 일어난 키얼스틴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지며 다들 그녀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과도 두루두루 친해지는 것이 좋겠죠. 황녀 전하께서도 더 다양한 영애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실 테고요.”
자리를 바꿔야 할 시간이 된 모양이다. 황녀 전하보다도 아마 다른 영애들이 더 간절하게 원하는 바겠지만 말이다.
사실 오래된 모임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친할 수는 없었다. 보통은 셋만 모여도 더 친한 두 명이 생기는 것이 사람 사이다.
또한 친한 사이가 있다면 싫어하는 사이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무작위로 자리를 앉다 보면 그 싫은 사이끼리도 한 테이블에 앉게 되기 마련이고.
하나 잠시만 참으면 된다. 이렇게 중간에 자리를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주요 세력들이 메인 테이블에 함께 앉고 세가 약한 집안일수록 말석에 자리 잡는 것이 당연한 사교계에서, 운이 좋으면 고위 귀족과 같이 앉을 수 있는 배치 방식은 차라리 은혜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공정성이라는 면에 지나치게 침몰한 것은 아니니, 그게 더 대단하다니까.’
이런 형태는 사실, 조금만 삐끗해도 오히려 배로 욕을 먹는다. 관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의 자리 배치는 공정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흥미와 재미의 영역처럼 보이면서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참석자 다수에게 공정함을 주면서도 사교계의 핵심은 잊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사이나더러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것 같았다. 이건 분명 어떤 의미로 재능의 영역이었다.
키얼스틴은 우아한 몸짓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 시종이 다가와 네모난 은쟁반을 넘겨주었다.
쟁반 위에는 고급스러운 비로드 천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다섯 장의 카드가 뒤집혀 있었다.
키얼스틴이 쟁반을 들고는 황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의 추첨은 새로 오신 분께 먼저 부탁드릴게요. 전하, 한 장 뽑아 주시겠습니까? 참고로 순서는 무작위이랍니다.”
“호오. 소문은 들어보았소. 진짜 자리를 중간에 이동하는군?”
“네. 다양한 만남을 위해 하는 방식이니 부디 함께 어울려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물론이오.”
황녀가 가장 중간에 있던 카드를 들어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