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사이나 비독점 출범식
일레인 반즈는 손가락을 까닥하며 주변 영애들을 향해 다짜고짜 명령했다.
“저것을 이 앞에 꿇려.”
“네?”
“뭐 해! 얼른!”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무릎을 꿇리라고? 대체 이 무슨….
어이가 없어 사이나는 자신을 데려온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도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뭔가 나서서 어떤 행동은 취하지 않고 그저 눈알만 굴려댔다.
다른 영애들 또한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사이나 근처로 다가오기는 했으나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너희 뭐 하느냐! 얼른!”
“기어코 무릎을 꿇게 하시겠다면 전, 당장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뭐? 감히 내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딜 간다는 거지? 누가 보내주긴 한다더냐!”
스밀라는 확실히 눈치가 좋았다. 약간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싶으니 저 멀리 있다가 바로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분명 루퍼트 경을 부르러 간 것일 테지.
“제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헤베타야!”
“네. 헤베타죠.”
독립적인 지위인 헤베타라고 해도, 고작 헤베타. 명예 지위이고 임시 지위일 뿐이다.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면 ‘고작’ 헤베타에서 끝인, 그런 자리인 것이다.
일레인 반즈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 앙다문 입술이 바로 그 증거겠지.
“아가씨.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퍼트가 딱 맞게 등장했다. 눈치 빠른 루퍼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장난기를 싹 빼고 날이 서린 기세로 응접실에 들어서서 사이나에게 물었다.
영애들만 있는 자리에 커다란 남자가 들어와 냉기를 풀풀 풍겨대자 대번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네, 돌아가겠어요.”
“잠깐!”
일레인이 소리쳤으나, 사이나는 무시하고 돌아섰다.
“너! 명화의 정원 티 파티에 참석하지 마! 절대 참석하지 마! 알았어?!”
그러더니 사이나가 문가에 이르렀을 때 외치는 소리가 저랬다.
명화의 정원 티 파티라……. 하긴, 일레인의 이름을 빌려 도착했던 서신이니 당연히 그녀도 알고 있겠지.
설마 저게 본론이었던 걸까.
사이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일레인을 보았다.
“정말이야! 거기 참석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
키얼스틴 쪽에 초대장을 보낼 때 사이나도 포함인 걸 알지 않았나? 왜 유독 자신에게만 이러는 거지?
이제는 숫제 악에 받친 듯 외치는 모습을 보며 사이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레인 반즈가 난리 친다고 해서 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완전 돌아서기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잠시 시선을 멈췄다. 찔리는 것이 있는지 눈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사이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짐하기가 무섭게 한 번 까먹네. 대단해, 엘리자베스 발데즈.’
보아하니 일레인 반즈의 닦달에 못 이겨 사이나를 데려온 것 같기는 한데,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어야지. 엘리자베스의 낯을 보아서라도 안 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고개를 슬쩍 저으며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루퍼트의 경호를 받으며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 * *
근래 중심 사건이었던 대망의 ‘명화의 정원 티 파티’에 참석하는 날이 되었다.
키얼스틴의 표현대로라면 ‘사이나 비독점 출범식’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인방이 모이던 단출한 모임이야 매주 열어도 상관없었으나, 정식 티 파티인지라 본래 일정에 맞춰 진행했다.
거기다 장소가 황성이 되면서 신경 쓸 게 매우 많아진 키얼스틴과 에비앙은 대충 봐도 근래 아주 바빠 보였다.
트렌드 세터답게 키얼스틴과 에비앙의 티 파티는 특이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드레스 코드였다.
그냥 모여 수다나 떨었던 소모임과는 다르게 사교 모임의 축이라는 기분이 확실히 들었다.
[명화의 정원 개방 기념 드레스 코드 : 붉은색 포인트 컬러 필수!]
붉은색이라…. 역시 특이하다. 미혼의 영애들이 쉽사리 시도하는 색은 아니었다.
사이나 역시 붉은색을 베이스로 한 옷을 차려입은 경험은 거의 없었다.
화려한 인상의 미인인 데다 적발이 특징인 키얼스틴이야 붉은색을 소화하는 게 큰 난제는 아니겠지만, 사이나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명화의 정원은 처음이다.
살면서 황성에 올 일이 많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들어서자마자 처음 느낀 감상은 ‘아, 역시 황성이네’랄까.
드높은 천장과 거기에 그려진 색색의 문양, 소소하게는 기둥 하나, 마감재 하나, 몰딩 하나, 문손잡이 하나까지 아름답게 조각되어 웅장함이 느껴졌다.
명화의 정원은 ‘정원’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 정원은 아니고 커다란 홀이다. 대대로 황실에서 수집하고 지원하여 키워낸 화가들의 명화가 전시된 홀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크기가 족히 큰 데다 관람객들이 산책하듯 거닐며 감상하기에 좋아 명화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했다.
입구에 선 담당자가 사이나의 초대장을 확인하는 동안 가볍게 안을 둘러보았다.
문 안쪽은 바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고 일차적으로 시선을 차단하는 벽이 있었는데, 문짝만 한 거대한 그림이 그 벽에 걸려 있었다. 3-4대 전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었다.
입장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시 키얼스틴.
그녀는 포인트 컬러 수준이 아니라 네이비와 레드가 투톤으로 어우러진 과감한 패턴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와, 예쁘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색상과 디자인을 골라 매칭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키얼스틴은 매우 바빠 보였다.
주최자이니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되니 저 바쁜 사람이 그동안 사이나에게 얼마나 잘해준 것인지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사이나를 내놓기 아쉽다고 한 게 키얼스틴인데, 그 비슷한 기분을 그녀 역시 느끼고 있었다.
“사야?”
“언니.”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멀리서 키얼스틴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목소리에 담긴 애정이 느껴져서 방금 한 생각을 다시 고쳤다.
키얼스틴의 독점보다는 비독점이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반면, 키얼스틴은 사이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아무리 내가 애정하는 사야라고 해도 드레스 코드 위반은 참석이 불가한데요?”
“저, 코드 지켰어요.”
사사로운 소모임에선 서로 평어를 쓰지만, 공식 티 파티이기 때문에 공대를 했다.
그래도 키얼스틴의 공대를 듣자니 살짝 어색하기는 하다.
“대체 어디요? 설마, 속옷? 어머, 사야. 매우 열정적인 발상이지만, 그건 좀 그렇잖아-요?”
“……아니에요. 속옷이라니.”
사이나는 대답 대신 드레스 자락을 슬쩍 들어 발을 내밀었다.
빼꼼 드러난 발에 새빨간 하이힐이 반짝거렸다. 강렬한 색깔 때문에 사놓고도 생전 신을 일이 없던 구두였는데 이참에 착화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어머. 세상에, 센스쟁이 같으니. 통과- 아, 아니지.”
“네?”
“이거 뽑고 가셔야죠.”
키얼스틴은 입구를 지난 통로 양쪽에 놓인 테이블로 사이나를 이끌었다.
테이블 위에는 팔 하나가 겨우 드나들 정도로 상단에 동그랗게 구멍이 난 검은 상자가 있었다.
“뽑은 종이에 적힌 숫자가 본인이 앉을 자리랍니다.”
키얼스틴과 에비앙의 티 파티는 특이한 방식의 자리 배치로 유명했다.
자리 배치는 파벌이나 인맥에 따라 호스트가 심사숙고하여 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끼리는 멀리 떨어뜨려 앉히고, 주최자가 친해지고 싶거나 측근인 경우는 가장 중심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조건 운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제비뽑기.
사이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종이 하나를 꺼냈다.
꺼내고 보니 그냥 쪽지가 아니고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크기의 작은 봉투였다.
봉투를 열고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자 싱그러운 향기와 함께 번호가 보였다.
[2-4]
2번 테이블의 4번 자리라는 뜻.
보통 티 파티라면 1번 테이블이 가장 상석이겠지만, 제비뽑기로 착석하는 방식이다 보니 의미가 없었다.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다른 참석자들이 사이나를 흘끔거렸다. 아무래도 첫 참석이다 보니 눈길이 많이 와서 꽂혔다.
‘음. 약간 어색하네. 아는 얼굴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결과적으로 사이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세 명의 지인 중 가장 데면데면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플로리아 애버딘이 같은 테이블이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네.”
가볍게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니 같은 테이블인 것도 모자라 바로 옆이었다. 사이나는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자리에 착석했다.
몇 번에 걸친 만남을 통해 처음의 어색함은 많이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해주던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사라지자 서먹함이 대번에 되살아났다.
“같은 테이블이네요.”
“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말문을 열었으나, 역시나 머쓱할 정도로 단조로운 화답만이 돌아왔다.
‘대답이라도 해주는 게 어디야.’
무시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생각하며 사이나는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런데 뭘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옆에서 자꾸 시선이 느껴졌다.
플로리아가 몰래몰래 흘끔거리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지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시 말이라도 걸어봐야 하나.
‘…왜 그러는 거지?’
사이나는 자신이 참으로 사교에 젬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거의 서른까지 살다 왔으니 삶의 경험치가 그래도 좀 늘었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말주변이 엄청 늘어나거나 없었던 사교성이 생겨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붙임성 좋은 키얼스틴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해서 운 좋게 이리 어울리고는 있으나,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친구 하나 못 사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던 그때.
“세상에!”
“정말 오셨어!”
탄성과 감탄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터졌다. 입구 쪽으로 일제히 시선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명화의 정원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