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장갑 아래의 비밀
“얼른 말하고 가는 게 낫겠다.”
“너랑…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함께 가 달라고…….”
“아, 그래? 알았어. 언제인지 서신으로 알려줘.”
엘리자베스는 붙잡혀 있는 욜리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아래로 내려섰다.
“꼭이야. 같이 가줘야 해!”
문을 통과해 나가며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후아.”
이 무슨 소란인가. 욜리 덕분에 급작스럽게 뺑뺑이를 돈 사이나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와, 저 녀석 그새 조용해졌네.”
엘리자베스가 사라지자마자 조용해진 욜리를 보며 사이나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졸지에 손님 하나를 내쫓은 꼴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아니, 너 대체 왜 그러니. 자꾸 이러면 내가 ‘이 녀석은 안전한 동물입니다.’라고 어필을 할 수가 없잖아.”
욜리는 아직도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꼬리를 탁탁 쳐대는 것이 여전히 불만이 많아 보이는 기색이다.
‘냄새 때문인가?’
저번에 녀석이 엘리자베스가 보낸 서신을 박박 찢어버렸던 게 기억난다.
사이나는 엘리자베스가 뿌리고 온 향수 때문인가 싶어서 허공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그녀에게는 그저 달콤한 꽃향기에 불과했다.
‘이상하네.’
짐승의 후각이란 인간에 비해 엄청 발달했다고 하니, 뭔가 꽃향기 외에 냄새가 따로 존재하는 걸까?
……모르겠다. 사이나는 그냥 욜리가 엘리자베스를 ‘매우’ 싫어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인지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같이 가자고…….”
그게 과연 어디일까.
과거의 자신을 반성한다고 하긴 했지만, 근래 엘리자베스를 따라갔거나, 혹은 만난 곳에서 딱히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보니 의심부터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난… 베쓰, 널 멀리해도 되는 합당한 이유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가 나쁜 사람이라야 멀리해도 마음이 편한 게 사실이니까.
솔직히 말해 새로 사귄 친우들이 없었다면 사이나는 엘리자베스를 그냥 감내했을지도 모른다.
유리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마저 없는 이번 생에서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엘리자베스 탓만 할 게 아니네.’
본인의 마음속에서도 어떤 목적성을 발견한 사이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베쓰에 대해 당장 판단할 수는 없겠어…. 어느 정도 여지를 좀 둬 볼까.’
저번에 조지 홀랜더를 데려오려 했던 것만으로 엘리자베스는 사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참는 것도 세 번이라 했으니. 그래, 베쓰. 세 번의 여지를 둘 거야.’
네가 정말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세 번까지는 참겠다고, 사이나는 마음먹었다.
물론 지나치게 선을 넘는 행동이라면 세 번까지 갈 일도 없겠지.
이 다짐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사이나는 엘리자베스의 인성을 내심 파악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돌아보았을 때, 세 번의 여지를 모두 까먹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 * *
또다시 수요일.
사이나는 크레이머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로 향했다.
이 기묘한 만남도 몇 번 반복되자 적응이 되었는지 나름 익숙해졌다.
사이나는 공작의 집무실 한쪽에 자리 잡았다. 앞서 말했던 보안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작의 책상 옆에 사이나의 몫으로 새로 놓인 책상에서 보석을 굴려 가며, 눈도 같이 굴려 가며 새겨진 글자를 파악하느라 열심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보석과 씨름하는 동안, 공작은 보통 업무를 보았다. 외부인인 사이나가 뭐라도 보면 안 된다는 걱정도 없는지, 서류 작업에 거침이 없었다.
‘바쁜 게 당연하겠지.’
그녀의 아버지만 보아도 그렇듯, 한 가문의 가주이자 거대 영지를 굴리는 영주들의 일거리는 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도… 거참 단정하고 잘생기셨네.’
크레이머 공작은 워낙에 표정이 없고 차가운 인상에다가, 결벽증 환자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채로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치고 있다 보니,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이 컸다.
외모에 대한 감상이 끼어들기 힘들 정도로 처음부터 대하기가 어려운 유형이다.
그런데 이 기묘한 만남이 반복되고 긴장이 좀 풀려선지, 요즘은 새삼스럽게 공작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객관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크레이머 공작은 참 잘생긴 남자였다.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기운 자체가 너무 강하고 차가워서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거지, 꼼꼼히 뜯어보면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설원 같은 백색의 머리 색은 자칫하면 노인의 그것 같은 인상을 주기 십상이었으나, 그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티끌 하나 없는 하얀 눈 같은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는 느낌이었다.
같은 색의 눈썹과 속눈썹이 풍성해서 느낌이 더 묘했다. 차가운 겨울 호수 같은 파란 눈동자가 희디흰 속눈썹에 꼼꼼하게 감싸인 모습을 보면 묘하게 얼음물에 손을 담갔을 때의 그 저릿함이 떠오르곤 했다.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지만 각진 턱선과 반듯한 이마, 높은 눈썹 뼈 등은 남성미를 더 부각시키며 음영을 드리워 고귀하면서도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선사했다.
유일하게 입술만이 붉었는데, 여자가 연지를 바른 것만큼이나 붉어 차가운 인상 가운데서 묘하게 색기를 풍긴다고나 할까.
‘…색기라니! 대체 무슨!’
자신이 한 생각에 어이가 없어진 사이나가 잠시 넋을 빼고 있던 그 순간에, 예의 그 색기를 풍기는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할까?”
“…네?”
헤 벌린 입을 하고 되묻는 사이나를 공작이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하기 싫은가?”
하, 하자니, 뭘 하자는 건가요?
“뭐, 뭘요?”
자꾸만 엄한 생각이 드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공작이 덧붙였다.
“차 한잔?”
“…아, 네. 음, 아니요.”
“…….”
아, 네. 음, 아니요, 라니. 대체 뭔 소리야!
“아니, 좋다는 뜻입니다!”
이 순간 어리바리한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공작은 ‘그냥 유명한 학자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란 후회를 하겠지.
속으로 자책했지만 공작은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이끌어 집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령 체계가 어찌 된 것인지 로이터가 어찌 알고 요정처럼 티세트를 가지고 찾아왔다. 공작은 먹지 않을 것처럼 생긴 아기자기한 디저트도 함께였다.
“유명한 제과 명인이 만든 것입니다. 드셔보시지요. 영애님.”
역시나 공작의 몫은 아니었던지 로이터는 알록달록 먹기도 아까운 예쁜 디저트들을 죄다 사이나 앞으로 밀어주고는 차를 따랐다.
크레이머 공작과 단둘이 티 타임이라니.
차 마시다가 사레들릴지도 모른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시간은 무난하게 흘렀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도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대화 없이 조용히 먹고 마시기만 하는데도 부담스럽지 않은, 의외로 편안한 종류의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사이나는 무난한 화제로 입을 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요.”
나름 인생의 쓴맛(?)을 보고 돌아와서인지, 사이나는 전과 달리 단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게 되었는데, 이 나이 때의 영애들은 대부분 단것을 좋아하다 보니 그녀의 취향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살이 찔까 봐 잘 안 먹는 영애들이 대부분이지, 좋아하지 않아서 안 먹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로이터가 내온 디저트는 하나같이 적당히 달고, 같이 내온 차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감탄이 새어 나왔다.
“공작님도 좀 드셔보세요.”
사이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권했다. 그런데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호불호의 문제라고 하기엔 뭔가 반응이 이상했지만, 그런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많이 있으니, 갈 때 챙겨가도록 해. 로이터?”
“예. 각하. 준비해 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챙김까지 받게 된 사이나가 감사를 표했다.
이 기묘한 회동 이후(아니, 사실 그 전부터 좀 그랬지만) 공작이 예상치 못하게 섬세한 모습을 자꾸 보여주는 바람에 사이나의 가드가 지속해서 무너졌다.
그래서인지 평소의 그녀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사적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런 거 여쭤보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
“혹시 불쾌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듣고 판단하도록 하지.”
“음, 공작님은 왜 항상 장갑을 끼고 계세요?”
사실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철옹성처럼 살갗을 가리고 있는 저 장갑이 그가 자신의 주변에 둘러 세운 철벽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탄탄해 보이는 공작의 가드를, 자신의 것처럼 약간은 내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침묵이 길어지자 사이나는 후회했다.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나 봐….’
사연은 모르지만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이나가 입을 열고 막 사과를 하려던 찰나.
“난.”
그가 말을 하다말고 찻잔을 내려놓더니, 자신의 손을 허공에 들고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자신의 손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덩달아 사이나도 그의 손을 보았다.
장갑을 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크기, 기다란 손가락의 자태, 도드라진 손등 뼈의 굴곡.
그 아래 손은 분명 굉장히 예쁜 모양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시선을 읽었는지 공작이 물었다.
“보고 싶나?”
“…네?”
“보고 싶다면 보여줄 수 있는데.”
“…….”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보고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네! 보여주세요!’ 하기는 또 좀 이상하다.
사이나가 망설이는데 공작이 입꼬리를 묘하게 올리더니, 자신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장갑의 중지 끝부분을 살짝 물더니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와 동시에 시선은 사이나에게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