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포악한 짐승
남이 보면 사이나가 철딱서니 없이 엘리자베스의 아픈 곳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서러워 보였다.
“나, 용돈 같은 거 없는데?”
그러나 눈물 뚝뚝 흘리는 엘리자베스의 앞에서 사이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물론, 돈이 없어 하나뿐인 딸에게 용돈을 안 주는 것은 아니었다.
드보프가는 재력으로 유명한 가문답게, 용돈을 주더라도 매년 일종의 내탕금처럼 소비의 적합성에 대해 심사가 있었다.
근데 과거의 사이나는 그 적합성 심사에서 매번 실패했다.
그 결과 용돈이 줄고 줄다가……
‘내년엔 네 앞으로 예산 없다!’
…아버지가 그렇게 선포해버린 경우였다.
사실 심사라고 해보아야 별것도 없었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기에, 소비의 건전성에 대한 부분만을 최소한도로 걸러내기 위한 목적이다.
술, 약, 혹은 뒤 세계의 금지된 물품을 소비해서는 안 되고, 시야를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한 가지에만 돈을 다 몰아서 써도 안 된다는 것.
두 가지만 지키면 되었다.
그런데 사이나는 매번 두 번째 조건 때문에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돈이 생기면 죄다 <아를-프로메사> 관련 물품이라든가, 아를어 관련 서적 같은 것들만 사 모았기 때문이다.
‘드레스라도 하나씩 섞어서 샀으면 통과했을 것을….’
알면서도 못 한 것은, 고대 관련한 물품들은 하나같이 너무 비싸서 있는 돈을 다 쏟아부어도 살 수 있을까 말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산 것도 가짜가 많았다. 사기를 당해 눈물짓는 사이나를 보고 화난 아버지가 결국 용돈을 압수해 버린 것이다. 필요한 것을 사려면 선심사 후지급 방식으로 사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작년까지의 일. 병석에서 깨어난 데다 여러모로 달라진 사이나의 모습에 용돈 압수는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돈을 쓰면 쓸수록 좋아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드보프 백작이었다.
‘얼마 전에도 고서를 한 권 사기도 했고…….’
하나 당연하게도 엘리자베스가 이런 사정까지는 알 수는 없는 법.
아직 공식적으로 제재가 풀린 것은 아니니 엘리자베스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부유한 드보프가가 딸에게 용돈도 안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당황해서 눈물마저 멈춘 듯했다.
“뭐, 뭐…?! 거짓말 마!”
“진짜야. 돈만 생기면 아를어 서적만 산다고 아버지가 압수해 버리셨거든.”
“…….”
이유를 듣자 납득이 되는지,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눈물은 이미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외곽에 있는 화방에 갔다가 그랬다는 거지?”
“아, 응.”
“큰일 날 뻔했네. 앞으론 조심해.”
“응.”
“근데 그 남자도 귀족 같던데 거기 왜 갔대? 그쪽도 화방을 가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림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이게 생겼던데.”
“어, 그걸… 어떻게 알아?”
어찌 알긴. 겪어 보았으니 알지.
조지 홀랜더는 손에 붓을 쥐어 본 적도 없는 것은 물론, 딱 봐도 모작인 것이 분명한 그림을 속아서 사와 놓고 의기양양해할 만큼 그쪽으론 안목이 없는 인간이니까.
모작이라는 그녀의 의견에 되레 화를 냈으면서 나중에 사기꾼인 것이 드러나자 왜 자신을 안 말렸냐며 더 분을 토했었다.
‘하…….’
하나하나 떠올려 볼수록 일말의 동정심도 가지 않을 만큼 다방면으로 그렇게 쓰레기 같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겼어.”
“…….”
“아, 거기 유곽 같은 거 있지 않아? 그런 데서 놀다가 나온 거 아닐까?”
“…….”
“소매치기 잡아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다. 아니면 귀족 남성이 그런 데 갈 일이 뭐가 있겠어.”
사이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란다.’
실제로 조지 홀랜더는 고급 코르티잔이 있는 살롱보다 황도 외곽에 있는 유곽을 더 자주 다녔다.
처음에는 돈 때문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더러운 성벽 때문이었다. 그쪽은 신분이 낮은 여자들이다 보니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항의할 데가 없었으니까.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유형의 인간이 바로 조지 홀랜더였다.
“어, 음. 그런 분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매, 매너도 엄청 좋았고. 생긴 것도 잘생겼고. 안 그래?”
완전히 숨기지 못한 당혹감을 얼굴에 드러낸 채, 엘리자베스가 나서서 변명했다.
“그래? 네 취향이 그런 타입이었구나. 미처 몰랐네.”
“…그게 아니고.”
“난 전혀 흥미가 안 생기더라. 잘해봐.”
“…….”
평소 남자의 취향에 대해 말한 적도 없고 이성에 대한 관심조차 없던 사이나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 당황한 것 같았다.
전에 없이 단호하기까지 하니, 약간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하고 싶지도 않은 조지 홀랜더 관련 화제로 너무 오래 떠들었네. 이제 얼른 본론이나 말하고 빨리 떠나주었으면 좋겠다.
“너… 유력 집안 영애들이랑 요즘 어울린다더니… 그래서 이제 나한테 소홀해진 거야?”
“…….”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정말 서운하다. 너만은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른 줄 알았는데……. 잘나가는 영애들과 어울리더니 너도 계산적이고 속되게 변했네.”
비련에 빠진 표정이었지만 하는 말이라고는 죄다 비난이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종류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찾은 건 너 아니야?”
사이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내가?”
“베쓰, 넌 단 한 번도 단순하게 온 적이 없잖아? 심지어 병문안이라고 왔었을 때도 결국 드레스 이야기만 하다가 갔잖아.”
“그건……!”
생각해보면 엘리자베스는 자주 찾아왔지만 단순하게 수다나 떨자고, 혹은 보고 싶어서 왔다고 온 적은 없었다.
명목상은 그렇게 온 날들도 알고 보면 다 목적이 있었다.
사이나에게는 엘리자베스 외에는 다른 동성의 친구가 없어 비교할 대상이 없다 보니 잘 몰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가장 속되고 계산적인 무리와 어울려보니 되레 엘리자베스의 모순이 더 부각되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에 있어 목적성을 말하는 거라면, 응. 충분히 알아들었어.”
키얼스틴을 위시한 셋이야말로 ‘사교’ 외의 목적으로는 사이나를 대한 적이 없었다.
‘하나같이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이니 내게 원하는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사이나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오히려 대놓고 물어볼 것 같다고.
“사야, 너도 먼저 내게 다가온 적은 없잖아. 사람이 한쪽에서만 노력하는 것 같을 때, 얼마나 맥 빠지는지… 알기나 해?”
에?
“내가 하기 전에는 생전 먼저 연락한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보통 이런 내용을 말할 때 엘리자베스라면 처연한 듯 울며 말할 텐데, 이번엔 분한 얼굴이다.
그 얼굴에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나?’
사이나는 고대 문명에 대한 열정과 가족, 그리고 유리라는 아주 작은 테두리 안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살았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사이나도 필요에 의해 엘리자베스와 교제한 것이 맞았다.
‘음……. 진짜네. 기억에 없어.’
자신이 먼저 나서서 같이 놀자거나 만나자고 했었던 기억이 없다.
사이나는 무심하고 무지했던 자신의 어린 날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 외에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틀린 말은 아니네. 나도 반성을 해야겠어.’
새삼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컁컁!”
응접실 문에 틈새가 있었는지, 갑자기 욜리가 나타났다.
사이나가 타운 하우스로 올라올 때 처음에는 본저에 두고 오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숨어서 같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는 포기했다.
지금은 그냥 사이나가 오갈 때마다 함께 했다.
아침에 침실에서 잘 자는 것을 보고 외출했다가 바로 응접실로 와서 엘리자베스를 만난 참인데, 이 녀석은 대체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어찌 알고 나타났단 말인가.
정말 신출귀몰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크르르…. 캬앙!”
“꺄악! 이, 이거 뭐야!”
그런데 욜리가 좀 이상하다.
엘리자베스를 향해 미친 듯이 이를 드러내며 짖어댔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욜리! 왜 이래, 이리 와!”
사이나가 녀석을 잡아서 밖으로 내보내려고 벌떡 일어나자 욜리는 그녀를 피하며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다.
“키야앙!”
“꺄아아아! 싫어! 치워줘!”
엘리자베스는 말 그대로 기겁을 하며 욜리를 피하고자 소파 위로 올라갔다. 혼비백산하여 우아함이고 뭐고 소파 위에서 방방 뛰어댔다.
“야! 이 녀석!”
사이나는 후다닥 뛰어 욜리를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여태까지 녀석을 본 중에서 가장 격분한 상태여서 그녀도 놀랐다.
그렇다고 해도 욜리가 그녀를 물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지만 말이다.
“욜리! 진정해! 얘가 왜 이럴까?”
“크르르르르…….”
사이나는 욜리를 혼내며 엘리자베스로부터 멀어졌으나 고개를 계속 빼 들며 소파 쪽을 노려보며 크르르거렸다.
“아가씨? 무슨 일… 어?”
응접실의 소음이 어지간했는지, 루퍼트가 찾아왔다.
“루퍼트 경.”
“아니, 이 녀석이 어찌 여기 있답니까? 이리 주십시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사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욜리를 루퍼트에게 내밀었다.
루퍼트도 이를 드러낸 험상궂은 표정에 물리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지, 목덜미를 누르며 아주 조심스럽게 녀석을 붙잡아 들었다.
“크아아앙!”
“어, 어?! 얌마!”
근데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나 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욜리가 루퍼트의 손을 쪼르르 벗어나 재빠르게 점프했다.
“?꺄아아아아악!”
소파 위에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욜리는 소파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미친 듯이 짖어댔다.
사이나와 루퍼트는 다시 욜리를 붙잡으러 허둥지둥 몸을 날렸다.
“요 녀석!”
“컁!”
재빠른 몸짓으로 루퍼트가 욜리를 잡았다.
“하아… 미안, 베쓰. 뭣 때문에 왔다고 했지?”
“흐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