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43화 (43/233)

43화.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찌푸려진 미간에서 불쾌감이 묻어났다.

“그렇지, 말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에비앙이 따라서 중얼거렸으며.

“언니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플로리아까지 흥분해서 소리쳤다.

대체 누가 보낸 무슨 서신이기에 저런단 말인가.

“대체 일레인 반즈가 어떻게 황금색 봉투를 쓸 수 있었을까?”

“황성 홀 개방은 어떻고! 일레인 반즈에게 이런 권한이 있었으면 본인 모임에다 썼겠지. 나 참.”

“맞아! 이걸 왜 우리한테 줘? 음모가 있어, 언니들!”

대강 들어보니 일레인 반즈의 이름으로 황가에서 서신이 왔는데,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주도하는 티 파티에 황성의 유명한 홀인 ‘명화의 정원’을 개방하겠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근데 일레인 반즈는 사사건건 이쪽과 반목하는 하퍼 영애파의 일원이다 보니 이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서로 깎아내리기 바쁜 라이벌에게 이런 기회를 일부러 준다? 당연히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수상해하는 중이다.

“그럼, 결론은 한 사람뿐이네?”

“여기 이 구문만 봐도 그런 것 같기는 해.”

[본래 ‘천년의 올리브 나무’에게 내리고 싶은 선물이었으나 이미 황실의 홀을 대관하여 정기 모임을 가지는 것을 알고 있는바, 이 선물은 티 파티를 위해 사용해 주시면 좋을 것 같소.

유서 깊은 모임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 참석해 보고 싶은 마음이 깊으나, 엄정한 규칙을 황가라 하여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대신 티 파티에서나마 교류하는 시간을 갖도록 황가의 다음 세대를 초대하여 주길 요청하오.]

‘천년의 올리브 나무’는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주축이 되어 돌아가는 유명한 살롱의 이름으로, 그 이름처럼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살롱이었다.

귀족의 의무를 위한 공익의 성격이 강한 살롱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

대대로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어 온 까닭에 가입 그 자체만으로도 귀족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했다는 명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사회적인 명예는 덤이었다.

오래된 만큼 가입이 까다로운 살롱이다 보니 서신에서 규칙을 운운한 것이다.

“여기 이 구절도.”

[성별을 떠나 제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자들의 좋은 교류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바요.]

나머지 셋은 서신의 구문 구문을 손으로 짚어가며 추리하더니 결론을 지었다.

“황자.”

“황자네.”

“황자, 같지?”

황자가 약혼녀인 일레인 반즈의 손을 빌려 서신을 보냈다는 결론이다.

황자의 이름이 거론되자, 사이나는 순간 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근데 황자가 굳이 왜 우리 모임에 오겠다는 거야?”

“키키, 너 전에 뭐 실례한 거 없냐?”

“에비앙. 너야말로 기억 좀 잘 뒤져 보라구.”

“일레인, 그 여자가 뭔가 일러바쳐서 그런 거 아닐까, 언니들?”

셋은 또다시 추리에 들어갔다.

“둘이 그렇게 애정이 깊어 보이지도 않더만, 뭘.”

“그래. 약혼녀가 뭐 이른다고 쪼르르 혼내주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둘이.”

“하긴, 또 갈아치울 거 같던데. 그 제도 정말 별로야. 제국 초기에는 안 그랬다던데 황가 남자들이 문제인가.”

“모르지. 처첩 제도가 없어서 그렇게 변한 건지도.”

“근데 손이 귀한 건 또 사실이잖아. 수호령 계승은 해야 하고.”

세이지가 황자 욕할 때도 속으로 기함했건만,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황실 모독죄를 쓰고도 남을 것 같은 발언을 들으면서 식은땀 흘리는 건 사이나뿐인 거 같았다.

“그럼 황자 전하 초대하고, 일레인 반즈도 초대해야겠지?”

“언니들, 그럼 일레인 무리까지 다 초대해야 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여기 황가의 다음 세대를 초대해 달라고 쓰여 있지, 다른 말은 없잖아.”

“그럼 사실 일레인 반즈도 굳이 부를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근데 황자 전하만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약혼녀가 한자리에 있어야 그게 뭐든 좀 자제를 하시지 않을까?”

전에 사이나와 춤을 추고 나오는 자리에서 일레인 반즈에게 했었던 황자의 행동을 보면, 약혼녀가 있다고 과연 신경이나 쓸까 싶었으나, 일레인이 워낙 도끼눈을 하고 따라다니는 걸 생각해보면 또 어지간한 것은 적당한 선에서 자동 검열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사이나는 황자에 대한 본인의 감정과 별개로 약간 놀란 것이 있었다.

다들 이미 황자의 성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부분이었다.

정말 물정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그녀뿐인 듯했다.

“아무튼, 우리 사야의 비독점 출범식은 황성에서의 티 파티로 하자구.”

키얼스틴은 사이나를 향해 사르르 웃었다.

“아쉽지만 별수 없지. 더 길어지면 또 쓸데없이 뒷말이 나올 테니.”

“맞아. 뭔가 문제가 있어서 안 데리고 나오는 거다 어쩌고 그럴걸?”

사이나 스스로는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부분인데 나서서 이리 생각해주는 걸 보니 고맙고, 또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친구’ 같네…….

“음, 근데 굳이 황자 전하가 아니어도 될 것 같은데…….”

“…뭐라고?”

사이나는 문득 든 생각에 한 마디 중얼거렸다.

“‘황가의 다음 세대’라는 이 표현대로라면… 황녀 전하여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물론 ‘성별을 떠나’라는 문구에서 큰 암시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사이나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헐.”

“헛.”

“세상에.”

그리고는 이상한 탄식을 한 마디씩 내뱉더니, 이윽고 다들 미친 듯이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그러네. 깔깔.”

“와, 제대로다.”

황자와 얼굴 맞대고 싶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말해 본 건데 반응이 과했다.

거의 황자를 골려 먹는 수준이라서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쪽에서도 정체를 밝히기 싫어서 에둘러 한 제의이다 보니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지 않을까 예상하기에 한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성별 불균형 때문에 티 파티가 아니라 연회성 모임으로 바꾸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러면 단번에 해결되겠는걸?”

“오히려 초대를 못 받았으니 이후에 무슨 의도인지 드러나겠군. 아주, 흥미로워.”

키얼스틴이 사이나의 양 볼을 잡고 늘리며 또 녹일 듯한 미소를 지어댔다.

“귀여워. 사야.”

“애 이애(왜 이래). 으아!”

잡힌 볼 때문에 이상한 발음이 나오자 또 그걸 보며 좋다고 웃어댄다. 정말 키얼스틴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 * *

사이나가 타운 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손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손님?”

“예. 아가씨 친구분 되시는-”

“혹시 발데즈 영애니?”

“예.”

이렇게 연락 없이 찾아올 사람은 엘리자베스밖에 없다.

얘가 전생에도 이랬던가?

문득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음……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격의 없는 사이니까 그렇겠지, 하며 별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저런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약간 불쾌하게 느껴졌다.

특히 마지막 만남 때문에 그녀를 꺼리게 되어서 더 그런 듯했다.

“흠.”

그렇다고 대놓고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 엘리자베스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내가 황도에 올라온 건 또 어찌 알았을까.’

크게 티를 내고 다닌 것도 아니고, 엘리자베스와 근황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야!”

그녀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자베스가 크게 반기며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너 황도에 왔으면서 연락도 안 하고, 너무해.”

“…….”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좀 어색하게 헤어졌잖니. 난 네가 먼저 연락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저런 말을 꺼내어 놓는다. 대체 왜 내가 먼저 연락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둘의 약속에 타인을 그것도 조지 홀랜더를 데려온 무례를 저지른 사람은 사이나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였다.

그쪽 사정에 맞춰 먼저 은원을 해결하라고 비켜 주었으니,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 건 엘리자베스 쪽이 아닌가?

“널 도와주었다던 그 남자랑은 이야기 잘했고?”

사이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타부타 없이 그것부터 물었다.

“어, 어…. 응.”

“소매치기랬나?”

“응.”

“로하튼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일이 있는지는 몰랐네. 그쪽 치안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 뭐 어디 외곽에라도 다녀왔던 거야?”

“아, 그게…….”

이렇게 갑자기 세세한 질문까지 예상치는 못했던지,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눈치였다.

사이나는 누가 말을 하면 하는 대로 그런가 보다 하는 편이었기에 엘리자베스도 그녀가 이리 깊이 캐물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 그림 그리는 거 아버지가 싫어하시잖아. 그래서 화방 거리에 몰래 다녀오다가 그랬지 뭐야.”

“화방은 로하튼 거리 바로 뒤에도 있을 텐데…?”

그림 그리는 거 그냥 취미 아니었나?

엘리자베스는 다른 귀족 영애들과 본인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림 그리는 취미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지, 화가가 될 수 없는 귀족이 가지기에는 지나친 재능을 가져서 안타깝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고는 했다.

물론 사이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그린 그림은 확실히 그녀의 외모처럼 아기자기하고 어여쁘기는 했으나, 지극한 열정과 재능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사실 어딘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 엘리자베스에게 취미 이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뭘 굳이 아버지 몰래 다녀오기까지…?

“너, 너….”

엘리자베스는 몇 마디 더 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말까지 굳이 해야겠니? 난 너처럼 용돈이 풍부하지 않잖아! 없는 돈을 쪼개어 화구를 사려면 좀 외곽에 있는 화방에 갈 수밖에 없어!”

마치 사이나가 지나치게 풍족하게 사는 나머지 세상 물정을 몰라 자신의 힘든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듯 애절하게 사연을 늘어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