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가 계약 결혼을 했던 사정?
미리 잠금을 해제해 두었던 건가 보다.
“아니에요. 음… 바쁘실 텐데 제가 최대한 조용히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그대가 찾아와 주는 것은 내게도 기쁨이니.”
“……네?”
“수요일이 좋겠군.”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수요일’을 내밀며 사이나의 동의를 구했다.
“…예. 수요일.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마다 방문할게요.”
그렇게, 공작과 사이나 사이에 기묘하고도 지속적인 만남이 성립되었다.
* * *
돌아오는 마차에서 사이나는 욜리를 들고 닦달했다.
“너, 진짜 왜 이렇게 말썽을 부려? 다 알고 그런 거지, 엉?”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알을 굴리는 모양새가 분명 모른 척 발뺌하는 얼굴이었다.
“진짜 확, 때려주고 싶어.”
욜리의 이마 위에서 주먹을 흔들자 귀가 아래로 축 가라앉는 것이, 분명 다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컁!”
그러고는 짖는 게 꼭 ‘난 억울하다’ 이런 뜻처럼 들렸다.
“뭐, 억울하다고?”
꼬리를 탁탁 치는 걸 보니 그렇다는 것 같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또 이러기만 해봐. 다음엔 케이지를 챙겨올 줄 알아.”
“큥….”
귀를 다시 늘어뜨리며 중얼거리는 욜리는 여전히 억울하다는 기색이었으나, 불쌍한 척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베쓰의 남편이었던 사람과 이상하게 자주 엮이네.”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엘리자베스의 남편과 대화하는 기분에 매우 어색했었는데, 그래도 그런 기분은 점차 상쇄되었다.
전생의 그와 지금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으니 말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전처럼 또 둘이 결혼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뭐 어떠랴.
그렇게 생각한 사이나는 조금 이상하던 기분을 마저 털어버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서인가.
그날 밤, 사이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지금 사교 시즌이잖아요! 꼭 지금 내려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 사교계에서 자리 잡는 것도 공작부인으로서 큰 역할….』
『내가 언제 그런 걸 요구했었나? 크레이머가는 당신의 사교계 활약 따위가 없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아.』
『…….』
화려한 복장을 한 엘리자베스와 냉기가 철철 흐르는 크레이머 공작이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연극을 보는 듯한 관조자의 입장에서 사이나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입술을 깨문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모습보다 몇 살 더 나이를 먹은 듯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어딘가 인간미가 사라진 인형 같은 미모를 그려내고 있었다.
『선택해. 당장 영지로 내려가든지, 여기 머물든지.』
『…여보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변했다. 굳은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공작에게 다가섰다. 부드러운 목소리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그분이 당장 어떻게 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달만, 한 달만 있다가 같이 내려가요.』
『…….』
『음, 아니면 2주만요. 황실 연회까지만 딱 참석하고, 바로 내려가도록 해요. 네에?』
그의 팔뚝 위로 느른하게 손을 올리며 엘리자베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남자들이라면 다 껌뻑 넘어가고 말 것 같은 꿀 같은 목소리와 태도였다.
하지만 공작은 거침없이 엘리자베스의 팔을 걷어냈다. 그것도 모자라 뭐라도 묻은 것처럼 그녀가 팔을 얹었던 자리를 손으로 털어냈다.
공작은 언제나처럼 목 끝까지 올라오는 제복에 장갑까지 꼼꼼하게 착용해서 얼굴 외의 피부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차림새였다. 단정함을 초과해 강박증을 연상시켰다.
『그게 당신의 선택인가?』
『…네?』
『황도에 머무르겠다는 것이 선택이냐고.』
『…….』
『긍정으로 받아들이지.』
『…….』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 결혼은 계약일 뿐이야. 그 일을 하겠다고 먼저 찾아온 자가 당신 아닌가. 그런데 벌써 이렇게 이행능력에서 오차를 보이다니,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
『이런 자와 계약을 한 과거의 내 몹쓸 안목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야.』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굴욕으로 점차 굳어졌으나, 공작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니, 타운 하우스에 머물도록 해.』
순간적으로 다시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는 개방을 금한다. 그리고 공작부인 앞으로 배정된 내비 예산을 절반으로 줄인다.』
『…여보!』
『그 ‘여보’라는 호칭도 금하도록 하지. 의미 없는 호칭이 아닌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꽉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계약은 신성한 것이다. 맹약을 기반으로 한 제국에서 발붙이고 사는 주제에 그것을 모르다니, 그 대가가 당신에게 찾아올 거라고 장담하지.』
할 말이 끝난 크레이머 공작이 훌쩍 방을 떠나버렸다.
엘리자베스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아악-!’ 소리를 지르며 방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챙강-!
화병이 깨져나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이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이게 대체 뭐지?
잔상이 너무 강해서 꿈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엔 또 이상했다.
사이나가 둘 사이에 저런 일이 있었는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게 생생하네.”
계약 결혼이라….
대체 어떻게 발데즈가의 엘리자베스가 크레이머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꿈속의 내용처럼 결혼이 수단이 되었던 거라면…….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반해 결혼했다는 설이 보편적이기는 했으나, 그런 것치고는 공작의 태도가 굉장히 냉랭했었다.
공작은 반드시 와야 하는 경우에만 황도에 왔고, 와서도 필참인 연회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다.
그 연회에서도 부부 동반으로 입장해서 얼굴이나 비추면 그뿐. 특별히 부인을 챙기거나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당시 알려진바, 크레이머 공작은 본디 본성이 차갑고 과묵하다 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남편이 좀 과묵하죠? 호호. 둘이 있을 때는 잘해 준답니다. 바깥에서만 그런 거예요.’
부인인 엘리자베스가 그리 변호를 했기에 사람들은 또 그런가 보다 했다.
하나 그렇다 해도 공작부인의 자리가 찼으니 드디어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가 개방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기대에 찼다.
공작가와 관련된 것들은 항상 다른 귀족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인지라, 타운 하우스를 다들 매우 보고 싶어 했기 때문.
엘리자베스는 그저 지긋이 웃기만 했었다.
‘크레이머가의 전통이래요. 영지의 성은 개방해도 타운 하우스는 개방하지 않는다네요. 영지까지 오시면 제가 한번 연회를 개최해볼 수는 있습니다만. 후훗.’
그런 핑계를 대며.
마수가 득실대기로 유명한 그 머나먼 영지까지 연회 한번 참석하겠다고 길을 나설 귀족들이 어디 있겠는가.
황도의 귀족들은 그저 황도에서 멀어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인데 말이다.
크레이머가의 전통이라는데 더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
근데 타운 하우스를 개방하지 못했던 이유가 실은 저런 사연 때문이었다면 납득이 간다.
크레이머가의 지원이 반 이상 끊긴 상태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사교계에서 흔들림 없이 군림했으니, 새삼 그녀의 사회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며 사교계를 향한 야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꿈이 사실에 가깝다면 말이지.’
기묘한 일이기는 했으나, 사이나는 어쩐지 그 꿈이 진짜일 것 같았다.
그것은 묘한 예감 같은 것으로, 딱히 왜냐고 물으면 설명은 할 수 없었다.
사이나는 잠에서 깬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 * *
월요일이면 황도로 와서 화요일에는 키얼스틴 등과 소모임을 갖고, 수요일에는 크레이머 저택에 가서 해독 작업을 하다가 다시 내려가는 생활이 반복되자 사이나는 당분간 아예 타운 하우스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말에만 다시 델본 저택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이런 루틴으로 몇 주쯤 지났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키얼스틴, 에비앙, 플로리아 그리고 사이나. 사인방이 모였다.
열심히 수다를 떨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묘했다.
“…무슨 일 있어?”
플로리아가 제일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신분상 공녀이다 보니 공대를 했는데, 나머지는 다 말을 편하게 하는 분위기라서 사이나도 강제로 말을 놓아야 했다.
아직도 약간 공대와 반공대가 섞여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흐응.”
키얼스틴이 손에 종이 하나를 팔락거리며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라….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정확히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랄까.”
대체 저게 무슨 소리람.
사이나는 설명을 듣길 포기하고 착석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야 널 독점하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정식 티 파티로 옮겨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공교롭게 되었지 뭐야?”
“뭐가 공교로워요?”
“이거. 방금 이게 도착했거든.”
키얼스틴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팔락거리며 눈짓했다.
초대장 같은데 저게 어쨌다는 것일까. 사이나는 약간의 힌트를 더 얻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략적인 정보는 본래 속지보다 봉투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그리고 눈에 뜨인 것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에비앙이 손가락으로 쥐고 팔랑거리는 봉투다.
‘황금색….’
봉투가 황금색이다. 황가에서 보낸 서신이라는 건데…. 황가에서 보낸 서신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성의 없어서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황가에서 온 거네?”
“흐응.”
“와, 황가에서 서신이라니. 대단해, 언니.”
사이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키얼스틴은 황가에서 서신도 오는구나, 대단하다, 하고.
본인도 황자에게 서신을 받았었던 적이 있으면서, 그것은 까맣게 머릿속에서 지운 채로 말이다.
“근데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거란 말이지.”
키얼스틴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