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고 치는 짐승
공작이 테이블 위에서 사이나 쪽으로 밀어준 것은 작은 상자 하나. 역시, 흑색이었다.
‘설마, 이거 죄다 흑목인가?’
마차도 흑목, 가구도 흑목, 보관용 함까지 흑목을 쓴다?
부유한 가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사이나는 그가 내민 상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들어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공작이 팔을 들어 손짓하자, 로이터를 제외한 시중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열어 보아도 좋다.”
뭘까. 시중인들을 다 내보낼 만큼 보안이 필요한 물품?
사이나가 상자를 들어 손에 올리자, 욜리 녀석이 쪼르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와 앉았다.
“크앙.”
욜리도 궁금한 걸까.
상자는 크기에 비해 꽤 묵직했다. 외관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자세히 보니 전체에 고대어가 빼곡히 새겨져 있어, 보석을 줄줄이 박아 넣은 것보다 더 비싸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잘은 몰라도 내부 물품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리라.
“…와.”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대체 이건 뭘까. 보석? 이렇게 커다란 보석도 있나?
검은색 함 안에는 비로드 천으로 완충재가 깔려있고 그 위에 아주 커다란 보석이 놓여 있었는데, 문제는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이게 과연 보석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말 그대로 주먹만 했다.
‘수정… 인가? 설마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액세서리를 즐겨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집안에서 보석 사업을 하는 덕분에 어지간한 보석은 다 구경해본 전력이 있는 사이나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나마 유색 다이아몬드가 가장 가까운 형태로 보이는데 그 색이 검은빛이다. 블랙 다이아몬드는 여태 시중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색상의 분포가 이상해서 더 의심스러웠다. 마퀴즈 커팅 형태로 다듬어진 보석은 중앙 내부 부분만 반투명한 검은 빛을 띠었으며 외곽으로 갈수록 투명한 다이아몬드의 색이었다.
차마 꺼내어서 볼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드는 압도적인 자태에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꺼내서 표면을 자세히 봐주게.”
조심스레 꺼낸 보석은 묘하게 차가웠다. 보석 자체가 가진 표면의 차가움이 아니라, 뭐랄까. 냉동고에 넣어 두었던 보석을 꺼내온 것처럼 한기를 뿜는 그런 느낌이었다.
“컁!”
그때, 욜리가 그녀의 무릎 위에서 번쩍 뛰더니 그녀의 손을 탁 쳤다.
귀해 보이는 보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느라 꽉 쥐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그 작은 타격에도 그것은 가차 없이 손에서 빠져 날아가고 말았다.
보석이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순간, 사이나의 심장도 같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야, 야!!”
깜짝 놀라 얼른 허리를 숙였으나 욜리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간 녀석이 그것을 입에 물고는 쪼르르 달아났다.
“크르!”
…달아나려다가 공작의 손에 잡혀 홀랑 들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너 정말 왜 그러냐.’
사이나는 진짜 울고 싶어졌다. 대체 사고를 몇 번을 치는 건지!
민망해 죽을 것 같은 사이나와 별개로, 공작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욜리를 달랑 들더니, 입에 문 보석을 꺼냈다. 어찌나 세게 물고 있는지 송곳니가 바짝 선 것이 보였다.
‘…흐, 흠집 난 거 아니야?’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사이나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욜리 저 자식을 어떻게 혼내주어야 잘 혼내주었다고 소문이 날까.
공작은 큰 애로 사항 없이 보석을 빼내더니 품 안에서 손수건을 한 장 꺼내어 그것을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는 다시 사이나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오늘따라 왜 이리 말썽인지.”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흠집이 났을지도 몰라요.”
조심스럽게, 하지만 아까처럼 쉽게 놓치지는 않을 정도로 힘을 주어 보석을 받아 쥐었다.
금세 체온에 데워지기라도 한 걸까. 다시 받으니 아까처럼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네. 고개를 슬쩍 갸웃하며 표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사이나는 절망했다. 보석 표면에 뭔가 죽죽 줄이 있는 것이 흠집이 장난 아니게 난 듯했다.
으아, 이거 어떻게 하지?!
“그건 크레이머 공작령에 있는 산맥에서만 나는 보석이다. 이빨 정도로는 절대 흠집 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그럼 이 자국들은 뭐란 말인가.
사이나는 눈을 찌푸리며 더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보석 표면에 난 자국들이 정말 흠집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상자처럼 이것에도 무언가가 잔뜩 새겨져 있구나.’
사이나는 보석을 허공에 들어 불빛에 자세히 비춰 보았다. 글자에는 따로 색이 있지 않고 홈이 파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석 표면에 보석과 같은 색의 잉크로 그려놓은 것 같았다.
빛에 이런저런 각도로 투과될 때만 글자가 보인다고나 할까.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그녀도 모르겠지만 표면 자체는 매끈한 느낌이어서 이렇다 할 설명이 불가능했다.
새겨진 형태는 제멋대로였다. 어떤 것은 너무 작고, 어떤 것은 너무 크고, 글자보다는 그림처럼 문양화 된 형태인 데다 겹쳐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종이와 펜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요구에 그가 한쪽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표면을 살핀 사이나는 몇 가지 익숙해 보이는 형태들을 먼저 골라 종이 위에 따라 그렸다.
한참을 그렇게 분리해서 적고 나서 이리저리 다시 조합해보자 어느 정도 형태가 보였다.
“…아를어군요.”
“그렇다.”
공작이 해석해주길 원한 게 이거였던 걸까. 딱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부담스러운 물건의 해석을 하필 자신에게 맡긴단 말인가.
“이거, 뭔지는 몰라도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제가 맡아도 될는지요.”
“누구에겐 하등의 쓸모도 없고 누구에게는 귀한 그런 물건이지. 어차피 보석으로의 가치는 없어. 블랙 다이아몬드는 유통용이 아니야.”
“…블랙 다이아몬드요? 이렇게 큰 게 다이아몬드란 말인가요?”
이렇게 커다란 캐럿의 보석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냥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블랙 다이아몬드라는 건 더 놀랍다.
“블랙 다이아몬드는 크레이머 공작령에서만 채굴되고, 대대로 보석이 아닌 다른 용도로만 사용해왔거든.”
“다른 용도요…?”
“마수 사냥에 관련된 용도라고 해 두지.”
아,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블랙 다이아몬드가 장신구로 사용되는 경우는 대대로 크레이머 공작부인 한정이야. 다른 자들에게는 팔 수도 없지. 추적이 너무 쉬워서 암시장에도 내놓을 수 없거든.”
신기해라…….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안의 ‘그’ 거대한 보석을 바라보았다.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막 다뤄도 상관없다. 그건 어차피 가지고만 있으면 되는 종류의 물건이라서.”
“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말이었다. 굳이 왜 자신이 이 일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음, 각하. 아를어 해석에 관한 일이라면 저보다 전문가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글쎄.”
글쎄, 는 또 무슨 뜻인가요.
“아를어 전문가들을 여럿 만나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실력을 보지는 못했다.”
“…….”
“그대가 읽어내는 속도가 제일 빠르더군.”
“…제가요?”
칭찬 같기는 한데 대체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것의 해석 작업은 나름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라서 말이야. 외부에 의뢰하는 건 아무래도…… 흠.”
“…….”
“대놓고 학자에게 의뢰하는 것보다 그대가 도와준다면 비밀을 지키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누가 감히 공작가의 일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게다가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저랑 소문나실 수도 있는데요.”
어쨌든 둘 다 미혼의 남녀였다. 사람들이 그와 사이나가 자주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 입방아를 안 찧을 리가 없었다.
온갖 상상력을 다 발휘해가며 소설을 써대겠지.
“…그 부분은, 음.”
공작도 약간 골치 아픈지 턱 아래를 손으로 쥐며 생각에 빠졌다.
“우선 지금처럼 문양 없는 마차를 이용하여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되, 필요한 경우 <아를-프로메사> 관련하여 작업하기 위함이라는 정도는 밝혀져도 무리가 없을 것 같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대가 해석하는 물품이 무엇인지, 내용이 무엇인지만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으면 돼. 정 안 되면 고대 물품 전시회라도 한번 열지, 뭐. 이쪽 관련된 일인 것처럼.”
“아…….”
그럴듯하다. 사이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사이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지만, 미래의 공작부인에게 쓸데없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진짜건 가짜건 간에 자신의 배우자에게 과거와 관련된 소문이 있다는 것은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알았어요. 그 부분은 각하를 믿고 있을게요. 최대한 잡음 없도록 해주시길 바랄게요.”
“…알겠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취미 수준으로 공부를 한 것뿐이라 사실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완벽하게 번역을 할 수 있을 거란 장담은 못 드려요.”
“그 부분 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어도 충분해. 일부분만 해석이 된다고 해도 큰 성과라고 보고 있으니 말이야.”
“네. 그럼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될까요?”
결과물을 얼마나 훌륭하게 뽑아낼 수 있는지와 별개로, 뭔가 합법적(?)으로 다시 아를어 관련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이나에게 기쁨을 주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자제하려고 해 오던 행동이기에 더더욱.
“기간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편한 속도로 진행해 주어도 괜찮네. 다만, 이 물건은 외부로 반출이 불가하니… 시간 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작업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럼… 매주 방문을 할까요? 어느 요일이 편하세요?”
“아무 요일이나 상관없나?”
“네. 각하께 제가 맞출 수 있어요.”
“이 상자는 나만이 열 수 있어서… 내가 있는 날 방문해야 하네. 혹시… 불편한가?”
어, 아까는 그냥 열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