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번 안아 봐도 될까?
키잉-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몇 번 경험했던 기이한 공명음이 다시 관자놀이를 자극했다.
사이나는 이마를 짚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몇 초간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막 인사를 할 타이밍으로는 여백이 있다고 여길 만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두통처럼 찾아온 찡함이 잦아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사이나는 스밀라의 다급한 외침을 제일 먼저 맞닥뜨려야 했다.
“앗! 나가면 안 돼!”
뒤에서 바구니를 들고 있던 스밀라 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품 안에 익숙한 털 뭉치가 달려들었다.
바구니를 빠져나온 욜리 녀석이 거의 날아오다시피 도약해서 사이나의 품 안으로 안겨든 것이다.
털썩.
“…욜리?”
이 녀석, 웬 말썽이람?
얼결에 달려들어서 품에 안기는 했으나, 자각하고 나니 갑자기 주변이 싸한 기분이다.
“어, 죄송합니다. 제 강아지가 몰래 숨어들….”
사이나는 갑작스러운 소동을 사과하기 위해 욜리를 안고 공작 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작의 등 뒤쪽으로 검은 기운이 빠져나가듯이 흘러나오더니 하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고가 높디높은 공작저의 로비 층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래졌다.
육중한 몸과 네 다리, 거대한 한 쌍의 날개, 머리 주위로 일렁이는 풍성한 흑색의 갈기, 이마에서 빛나고 있는 문양.
거대한 흑사자. 바로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인 모레프였다.
‘…아니, 뭔가 좀 다른데…….’
모레프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분위기가 이질적이고, 검은색의 명도도 달랐다.
퍼레이드에서 보았던 모레프는 몸체가 반투명했는데, 눈앞의 녀석은 불투명에 가까웠고 크기도 더 작았다.
‘…크기야 조절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게다가 정확히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검은 기운의 종류가 다른 느낌이랄까?
사이나는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의 기운에 놀라 눈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너…!”
공작은 어쩐지 화가 난 듯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불러낸 것이 아닌 걸까?
갑작스럽게 나타나 형태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공작 스스로도 놀라는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캬아앙!”
욜리도 보고 놀랐는지 흑사자를 향해 소리쳤다.
흑사자는 욜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 거대한 몸을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며 다가왔다.
사이나의 앞에 가까워지자 욜리에게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둘의 체격 차이는 엄청나서 사자가 혀를 내어 입맛 한 번만 다셔도 욜리는 홀딱 삼켜지고 말 것 같았다.
사이나는 홀린 듯 흑사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들이민 콧잔등 위로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말았다.
“칼리고!”
공작이 흑사자를 향해 소리치며 다가왔다.
그의 소리침에 놀란 것과 동시에,
“컁!”
욜리가 몸을 들썩거리는 바람에 사이나는 뭔가를 채 만져볼 틈도 없이 손이 엇나갔다.
허공에 뜬 손을 채 내리기도 전에 흑사자는 실체화를 풀며 다리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휘리리릭.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공작에게 흡수되듯이 사라져버렸다.
‘…칼리고라고? 모레프가 아니고?’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 건가? 아니면 쌍둥이 수호령 같은 건가?
그렇지 않아도 느낌이 이질적이었는데, 칼리고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니 의문이 배가 되는 기분이다.
“하…. 미안하군, 영애. 본래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녀석이 아닌데…….”
표정의 변화가 크지는 않았으나, 미세한 눈썹의 각도 차를 보아 공작은 약간 당혹해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차피… 모레프를 보여준다고 하셨잖아요?”
“그… 렇긴 한데, 갑자기 이렇게 내보일 생각은 아니었어. 놀라진 않았나?”
“네. 전혀요. 신기하고, 좋았어요.”
다시 또 보고 싶을 만큼요.
멀리서 본 모레프도 멋있었지만, 가까이서 본 모레프는 정말 존재감 자체가 남달랐다. 마치, 이 로비 전체의 온도 자체가 한 단계 달라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모레프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덕에 욜리가 부린 말썽이 슬쩍 묻혔으니, 내심 고맙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 때문인 것 같은데.”
“네?”
“일부러 데려온 건가?”
“…그게 아니고, 이 녀석이 몰래 짐 바구니 안에 숨어들어 있었지 뭐예요.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갑자기 뛰쳐나올 줄은 저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근데 정체가 뭐지, 이건?”
“…강아지요?”
크레이머 공작은 갑자기 자신의 턱 밑을 손으로 잡으며 욜리를 관찰하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아지라고? 이게?”
“…….”
사이나도 사실 약간 미심쩍기는 했으나 강아지가 아니면 뭐겠는가. 강아지라고 여기고,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강아지라고 알리고 다녔다.
“강아지라기보단….”
“…….”
공작은 고개를 약간 틀며 지긋이 욜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약간의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그 기세를 욜리도 느꼈는지, 녀석은 몸을 부풀리는 자세를 하며 괜스레 크릉, 크르릉거렸다.
“생긴 건 개보다는 오히려 늑대에 더 가까운데….”
“…늑대요?”
사이나는 늑대를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새끼 늑대는 더욱이 없다. 그러니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늑대와 개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다들 어딘가 개 같지 않다고 했던 게 그래서였나?’
“그렇다고 늑대라고 하기에도 뭔가…….”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중얼거리던 공작이 시선을 들어 사이나의 눈길을 붙잡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한번 안아 봐도 될까?”
“…네?”
공작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 팔을 내밀며 다가오는 통에 사이나는 쿵,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 말이야.”
“……아.”
욜리를 말한 거구나.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데 대체 왜 난 당황한 거지?’
스스로 민망해져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허둥지둥 공작에게 욜리를 내밀었는데, 하필 이 녀석이 또 싫다고 온몸을 바동거렸다.
“크아앙!”
온몸뿐 아니라, 목소리로도 싫다고 호소를 해댔다.
아니, 너 대체 왜 이러니. 날 망신 주려고 따라온 거니?
갑자기 녀석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고 싶다는 욕구가 물씬 피어올랐다.
하지만 욜리의 어떤 반항도 사실 하잘것없었다. 공작은 개의치 않으며 녀석의 작은 몸을 덥석 받아서 얼굴 가까이 가져가더니 욜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
욜리의 눈 안에 다시 제비꽃이 피어났다. 저번에 얼핏 보고 사라졌던 색상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공작의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더 가까이 보겠다고 얼굴을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라 눈만 크게 뜨고 기웃대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공작은 한참 동안 욜리를 들여다보더니 사이나에게 돌려주었다.
“착한 녀석이군. 다 크면 도움이 될 거야. 잘 키우도록.”
사이나는 욜리를 받아 얼른 다시 녀석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으나, 어느새 평소의 눈으로 돌아왔다.
‘분명, 잘못 본 건 아니었지?’
눈 색이 변화하는 시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변하는 건가? 전에 사이나를 만난 초기에 그랬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선, 들어가지.”
“아, 네.”
그러고 보니 계속 복도에서 서서 이러고 있었다. 사이나는 다시 욜리를 맡기려고 스밀라를 찾았으나, 공작이 말렸다.
“그냥 데리고 와도 된다.”
“…네. 감사합니다.”
늑대라고 해도 사실 공작에게는 위협조차 되지 않아서인가. 흔쾌하게 동행을 허락해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 남자는 사이나에게 줄곧 관대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본의 아니게 사이나는 계속 무례를 저질렀는데 말이다.
‘그 남자는 심장이 없는 것 같아. 허구한 날 마수만 잡더니 본인이 마수가 된 거 같다고!’
엘리자베스가 남편에 대해 하던 불평을 들으면 크레이머 공작은 세상에 둘도 없는 냉혈한에 무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냥 둘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공작이 특별히 엄청나게 차갑고 무심하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얌전히 그의 등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어떤 문 앞이었다.
공작은 스스로 문을 열고 몸을 한쪽으로 비켜서며 사이나가 들어오게끔 했다.
이 저택은 문조차 공작처럼 커다랗고 육중했다. 고풍스럽고 복잡한 문양이 잔뜩 새겨진 문은, 그 자체만으로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충분히 커다란 문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공작이 서 있자, 그 옆을 지나는 사이나에게 어쩐지 심리적으로 움츠리게 하는 느낌을 선사했다.
그에게 옷깃이라도 닿을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좋은 향기가 사이나의 폐부로 파고들었다.
어딘가 숲 깊은 곳에 들어서면 나는 새벽의 향 같은…. 청량하기는 하지만 어딘가 외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향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감상을 느꼈었는데, 아마도 공작이 사는 환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입구에서부터 침엽수가 늘어서고, 화원보다는 수목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런 향기가 몸에 배는 게 아닐까.
쪼르르.
자신의 잔에 찻물이 채워지고 있는 광경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사이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공작과 있으면 자꾸만 가볍게 넋을 놓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리드는 항상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인지도 못 하고 이끌려가는 것이다.
자신은 10년을 더 살다 왔으니 사실 정신연령으로만 치면 그와 비슷하거나 더 높아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숨 쉬면서 나이만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하긴, 나이 먹는다고 철이 들 거라면 조지 홀랜더 같은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겠지.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새삼 깨달아졌다.
사이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이며 내부를 관찰했다.
공작의 응접실은 온통 검고, 또 희었다. 제국의 어디에도 없는 스타일의 인테리어였다.
평소 공작이 몸에 걸치고 다니는 의상 스타일처럼, 응접실도 그랬다. 가구는 검은빛이 나는 목재로 되어 있었고 커튼이나 다른 장식물은 흰색이 대부분이었다.
“이것.”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