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철벽 전문가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가 사이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여기 원래 주인이시던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나요?”
서신을 받고 바로 왔는데 설마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
“할아범 찾아? 잠깐 볼일이 있다며 나갔는데 금방 올 거야. 그간 가게 안이나 둘러보고 있어.”
할아범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있으려니 살짝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저 사람은 초면부터 왜 반말이람?
‘나중에 다시 올까?’
금방 온다고 말은 하지만 어찌 장담한단 말인가.
슬쩍 발을 빼려던 차에 남자가 불쑥 말했다.
“진짠데. 10분 안에 올 거야. 바로 옆 가게에 간 거라.”
“…네에.”
이렇게까지 말하니 돌아가기는 좀 그랬다. 대신 루퍼트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겨 근처 책을 훑었다.
뭐 볼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시선을 돌리는데, 흥미로운 제목이 눈에 뜨였다.
[에렌혼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흠, 정말일까? 이 저자는 에렌혼을 직접 보고 이 글을 쓴 걸까? 과연 뭐라고 쓰여 있을까?
진실을 적은 것일 수도 있고 거짓을 그럴듯하게 적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뭐가 쓰였을지 궁금하기는 했다.
사이나는 그녀의 키에 비해 상당히 위쪽에 꼽힌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기는 했으나 책이 워낙 빽빽한 상태로 꼽혀 있어서 살짝 힘을 주는 정도로는 빠지지 않았다.
“이거?”
그때, 남자가 손을 뻗어서는 대신 책을 빼냈다.
“…에렌혼? 에렌혼 좋아해?”
남자는 책을 그녀에게 주지 않은 채 제목을 읽으며 물었다.
“주세요.”
“에렌혼에 대한 사실들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농을 쳤다.
“아, 그러시군요.”
남자들 특유의 허풍이려니 여기며 사이나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뻥인 줄 아나 봐. 진짜예요, 진짜.”
사이나는 물끄러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 분홍색이다.
애버딘 가문이 이런 머리카락 색을 가졌지? 어디 방계 쪽 인물인가? 그러면 완전 허풍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아가씨, 우리 만난 적 있나? 왜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나지?”
“…….”
좀 믿어지려던 차에 전형적인 작업용 말투를 듣고 사이나는 다시 관심을 접었다. 특유의 철벽을 다시 세우며 말했다.
“그리 에렌혼에 대해 잘 아시니 그 책은 분명 필요가 없으시겠네요. 제게 넘기시죠.”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응수하자 남자는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가씨. 뭔가 특이하네? 보통 이런 반응이 아닌데, 이상하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사이나 쪽으로 들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훅, 치고 들어온 남자의 얼굴은 뭐랄까, 마치 대리석 인형처럼 매끈했다. 그 매끈한 얼굴로 눈가를 휘며 웃는 것이 자신이 미소 지으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왼쪽 눈 아래에 눈물점까지 있어, 그 미소는 심히 시선을 끌었고 퇴폐적인 느낌까지도 풍겼다.
‘…뭐지. 들이대는 건가.’
왜 이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할 줄 알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미소는 자극적이었지만 그만큼 또 작위적이기도 했다.
“어이쿠, 아가씨 오셨소?”
“-할아범.”
적당한 타이밍에 할아범이 돌아왔다. 잘되었다 싶어 사이나는 단번에 남자와의 거리를 벌리며 할아범 쪽으로 움직였다.
“그 책 때문에 오신 거지요?”
“네.”
“이리 오소.”
할아범은 그녀를 카운터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한마디 했다.
“이 아가씨한테 집적대면 못 쓴다우.”
“응? 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집적이라니. 내가?”
“이 아가씨는 내 귀한 손님이라오. 귀히 대해주시오.”
“귀한 관심을 주고 있었는데?”
대체 뭐야, 저 남잔.
풍기는 분위기가 평민 같지는 않은데 뭔가 묘하게 경박한 것이 사이나를 의심스럽게 했다.
“주인장은 이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나 보네? 누군데? 통, 자기소개를 안 해주지 뭐야?”
“본인 입으로 말 안 한 것을 어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겠소. 그냥 모른 채 사시오.”
“그러지 말고 주인장.”
남자가 무어라 계속 속살거렸지만, 할아범은 무시하며 카운터 안쪽에서 나무함 하나를 꺼내왔다.
나무함을 열자 안쪽에 오래되어 보이는 서적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건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할아범이 책을 꺼내어 펼쳤다.
“저 위쪽 지방에 있는 한 폐저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나온 거라오. 지하 구석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이다. 방치되어 있었는지 썩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펴볼 만해 보여서 연락드렸다오.”
“잘하셨어요.”
사이나는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책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글자를 살폈다. 중간중간 뭉개진 곳이 많았지만 읽을 만한 곳도 많았다.
그리고 확실히 못 보던 글자들이 꽤 있었다.
“사 갈게요.”
뜻밖의 수확이다. 당장 연구 여부를 떠나, 분명 사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근데 책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괜찮을까요?”
“복원 처리를 맡기시겠소? 안 하는 것보다야 확실히 상태가 좋아질게요.”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당장 공부를 할 상황도 아니니.
“알겠소. 그럼 다시 연락을 드리리다.”
“네. 그리고 저 책도 주세요.”
사이나는 여전히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 알겠소.”
할아범은 남자의 손에서 책을 가져와 살피고는 사이나에게 넘겨주었다.
“아니, 에렌혼……. 그 책 내용보다 내가…….”
사이나는 뭐라고 중얼거리는 남자를 무시하며 평소대로 청구를 하라고 이르고는 서점을 나왔다.
* * *
마차는 다시 내성 쪽으로 이동했다.
애크로이드가의 타운 하우스 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롱 ‘천년의 올리브 나무’는 사이나가 알기로 석 달에 한 번씩 열리고, 살롱과 별개로 키얼스틴과 에비앙은 티 파티를 자주 열었다.
한 번은 애크로이드가에서, 다음번은 드미트리가에서 여는 식으로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있고, 2주에 한 번일 때도 있었다.
이번 순서는 애크로이드가에서 열리는 차례인 듯했다.
정문에서 잠시 멈춘 마차는 루퍼트가 미리 지니고 있던 초대장을 내밂으로써 금세 통과되었다.
땅값이 비싼 황도에서 넓은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비싸지기 이전부터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거나, 현재에도 아주 거대한 부를 유지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애크로이드가의 타운 하우스는 그러한 가문에 해당한다는 듯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이나는 전생의 경험을 통틀어 애크로이드가에 방문한 것이 처음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까운 가문이었음에도 말이다.
“와아….”
감탄을 하며 마차에서 내리는 사이나를 보조하던 루퍼트가 씨익 웃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아가씨.”
“아, 네. 고마워요.”
사냥제 같은 야외 모임인 경우 호위기사를 대동해서 참석하기도 하지만 티 파티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루퍼트는 따로 정해진 휴게실에서 다과를 대접받으며 쉬게 될 것이다.
“사이나.”
시종의 안내에 따라 티 파티 장소로 가던 사이나는 계단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 카이언?”
그러고 보니 여기는 카이언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 둘이 남매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오늘 참석한다는 말은 들었어. 예쁘게 하고 왔네.”
“고마워. 좀, 과한가?”
“아니, 예뻐.”
전에도 느꼈지만, 카이언은 칭찬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잘하는 것 같았다.
“너는 말을 참 예쁘게 잘하는 것 같아.”
“…어?”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겠어.”
카이언의 표정이 묘해졌다.
“키키 언니도 예뻐해 줬으면 좋겠다.”
“…뭐?”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언니 초대받고 온 거니까.”
“…….”
카이언은 이마를 슬며시 몇 번 긁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누나는 분명 예쁘다고 할 거야. 저번에도 널,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었으니까.”
“응. 좋은 사람 같아.”
사이나는 저번의 만남을 떠올리며 슬쩍 미소 지었다.
카이언은 가볍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사이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안내해줄게.”
카이언은 자신이 안내하겠다며, 시종을 물렸다.
“바쁜 거 아니야?”
사이나가 지금 객의 입장이기는 해도 굳이 카이언의 안내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후계자 수업이라는 게 얼마나 빡빡한 일정을 요구하는지 세이지만 봐도 뻔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인데 뭐. 전혀 상관없어.”
“그러면 다행이고.”
카이언은 걷는 동안 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이라든가 장식품 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며 사이나를 이끌었다.
드보프가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꽤 많은 편이라 비교하며 구경하다 보니 동질감을 느끼는 한편 신기하기도 했다.
“오, 신기한 거 많다. 날 잡고 다 구경하고 싶을 정도야.”
“원하면 언제든지 와서 구경해.”
카이언의 얼굴이 밝아지며 언제든 오라고 환영했다. 하나, 사이나는 벽에 걸린 액자 틀에 새겨진 섬세한 무늬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이거, 아를어를 기반으로 한 문양 같은데…. 액자 틀에다 이런 걸 새겨놓다니, 신기하면서도 예쁘네.’
“애크로이드가에도 아를어로 된 고서나 물건 많이 있나 봐. 봐, 여기 문양 보면 아를어 같아.”
“…이게 아를어라고?”
사이나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기 위해 카이언이 다가왔다.
무늬인 줄 알았던 그것은 세심하게 뜯어보자 정말 글자처럼 보였다.
“…여태 그냥 무늬인 줄 알았는데. 아니, 매번 이리 다녔어도 한 번도 유심히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네.”
“뭐 어쩌면 당연- 악!”
별생각 없이 고개를 카이언 쪽으로 돌렸다가, 사이나는 그의 턱에 이마를 쾅, 박고 말았다. 액자 틀을 보느라 거리가 매우 가까웠던 것을 몰랐던 탓이다.
“괘, 괜찮아?”
허둥지둥하던 카이언의 손이 발개진 사이나의 이마에 닿기 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