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달갑지 않은 선물
하지만 한참을 고민해도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음…. 모르겠어.’
키얼스틴의 티 파티에 갈 예정이라 반즈 영애의 초대는 더더욱 응낙할 수 없었다. 키얼스틴이 아니었더라도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 같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 말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겠다.
‘안 그래도 척진 판에, 더 척지겠네.’
딱히 친해지고 싶은 관계는 아니었으나, 의도치 않게 적의를 계속 쌓아가는 것 같아서 약간 알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생각 따위를 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똑똑.
한참을 그렇게 서신들을 살피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사야.”
방문자는 세이지였다. 그는 품 안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뭐야, 그건?”
세이지는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쉬며 사이나에게 말했다.
“…너 저번 파티 때 뭘 한 거야.”
“응?”
열 마디 말보다 직접 보라는 듯이 세이지는 꽃다발을 사이나에게 넘겼다.
풍성한 꽃다발이 사이나의 양팔 안에 가득 들어참과 동시에 장미 향이 훅 끼쳐 들었다.
“어머, 이거… 로열 로즈 아니에요?”
마르다가 놀랍다는 듯 꽃다발을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로열 로즈였다.
황성에서만 키울 수 있는 장미 묘목인 푸른 장미. 황족의 대표색인 하늘빛 꽃잎이 만개한 장미는 송이 송이가 주먹만 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사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꽃다발을 살폈다가 안쪽에 봉투가 끼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꺼냈다.
‘황금색 봉투…?’
봉투 색을 보고 사이나는 주춤했다. 누가 자신에게 이 꽃을 보낸 건지 아직도 추측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황자가 왜 사야 네게 꽃을 보낸 거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황자?”
봉투 뒷면의 발신자를 살피자 아닌 게 아니라, 황자의 이름이었다.
꾸밈이 한껏 들어간 필기체로 ‘길리언 맥페이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아까만 해도 예뻐 보이던 장미가 갑자기 매우 부담스러워졌다. 사이나는 미간을 묘하게 찌푸리며 꽃을 유모에게 넘겼다.
“유모, 이거… 저기 저어 방에다 놔둬 줘.”
“…저 방이요?”
“응.”
“네, 알았어요.”
사이나가 가리키는 방은 드레스 룸 중 하나로 액세서리를 주로 보관하는 방이었다. 귀한 물품이 많다 보니 보통 문을 잠가 두고는 했다.
그 말은 황족이 보낸 꽃이니 함부로 버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곳에 두고 보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뜻이었다.
나중에 황자가 알게 되더라도 귀한 꽃인지라 귀한 물품을 보관하는 방에 장식해 두었다고 하면 되겠지.
꼼수에 가까운 처세였다.
‘…우리 아가씨가 다 컸네.’
마르다는 사이나를 묘한 표정으로 보고는 꽃을 가지고 일어섰다.
그사이에 사이나는 황금색 봉투를 열었다. 황족이 보낸 편지라 세이지도 차마 이건 미리 뜯어보지 못했나 보다. 인장이 아주 튼튼하게 붙어 있었다.
인장을 뜯는데 욜리가 다시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와서는 자리를 잡았다.
“컁!”
봉투에서 내지를 꺼내 펼치자 욜리가 앞발을 들어 자꾸 그것을 잡으려 하기에 사이나는 위쪽으로 높이 들었다.
“욜리, 이건 찢으면 안 돼.”
사이나의 경고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욜리가 또 꼬리를 탁탁 쳤다.
“아, 이 녀석이구나? 이름이 욜리야?”
“응.”
사이나는 욜리라는 이름에 혹시 세이지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눈을 돌리며 조용히 관찰했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정말 잊힌 것 같았다.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고, 사이나는 편지지에 다시 눈을 돌렸다.
[고귀함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의 그대여.]
“…….”
서신의 도입부부터가… 말문을 닫게 했다.
사이나는 네 손가락으로 쥐고 있던 편지를 슬그머니 물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 쥐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후의 내용은 별 내용이 없었다. 왜 보냈는지도 모르겠는 얄팍한 인사와 사이나의 외모를 칭찬하는 내용이 다였다.
‘플러팅인가…?’
황자가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러팅이지, 이거?”
혹시라도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사이나의 착각일까 하여 세이지에게 보여주었으나 매우 분개하며 씩씩대는 것을 보니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하-! 돌았나?”
“오라버니! …불경하게.”
“미친 거 아니야? 이 새끼….”
사이나는 황족을 향해 중얼거리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한 세이지에게 놀라 얼른 주변을 돌아보았다.
드보프가의 고용인들은 대를 이어 일한 자들이 많았다. 들은 말을 밖으로 옮길 만큼 입 가벼운 자는 거의 없었으나, 상대가 황족인지라 한 번 더 확인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유모 외의 사람은 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저번 연회 때 황자랑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말해 봐.”
“정말 별거 없었어. 춤 한 번 춘 게 다인데…?”
“춤추기 전부터 헤어질 때까지 했던 대화와 상황을 설명해 봐. 황자가 여색을 밝히기는 해도 중앙 귀족 영애에게 이런 적은 없었어. 작정하고 접근할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음….”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사이나는 기억나는 대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물었어.”
“공작님?”
“응. 크레이머 공작과 무슨 사이냐, 결혼할 거냐 등등.”
세이지의 구겨졌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리고 그런 사이가 아니란 걸 알고는 다행이라고 했어.”
“…뭐?! 하…. 이거, 심각한 상황 아닌가?”
세이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더니, 테이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파 팔걸이에 올라가 있던 그의 검지가 탁, 타악 일정한 속도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뭔가 깊이 생각에 빠졌을 때 세이지가 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욜리의 꼬리가 덩달아 바닥을 탁, 타악 쳤다. 그 타이밍이 세이지의 손가락이 내는 것과 일치했다.
‘얘는 또 왜 이래.’
둘이 리듬이라도 맞추는 것처럼 함께 탁, 타악 대는 소리에 사이나는 세이지와 욜리를 번갈아 봤다.
둘이 일부러 맞추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사이나는 웃음이 나왔다. 심각한 둘의 표정과는 별개로, 귀엽고 뿌듯하고, 뭔가 따뜻한 그런 기분?
“후우, 사야. 너 그리 웃을 때가 아니야.”
“…응?”
“특히 황자 앞에서는 절대 웃지 마.”
“…….”
세이지는 결론이 안 나는지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며 짧게 욕설을 내뱉고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혹시 앞으로도 이런 서신이나 선물, 연락이 오면 다 거절하도록 해.”
“응.”
어차피 거절할 참이었으므로 흔쾌히 그러마 했다.
“그리고 네 선에서 거절하기 힘든 초대 같은 경우는 꼭 나한테 말하고.”
“알았어.”
“그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만남 등, 황자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나에게 말해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사이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세이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야. 황자는 굉장히 집요한 성격이야. 그렇지 않아도 황족이라서 거절하기 힘든데, 그쪽에서 작정하고 나오면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
“아버지께도 미리 말씀드릴 생각이야. 그만큼 심각해.”
“……음. 알았어.”
사이나는 이때까지도 본인의 매력에 대해 매우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세이지가 그저 오라버니로서의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지의 경고를 우습게 보았던 것을 훗날 매우 후회할 날이 올 줄 모르고.
* * *
햇살이 아주 예쁜 날이었다.
그리고 애크로이드가에서 티 파티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간만의 외출이 예정된 날임을 찰떡같이 기억하고 있던 유모 마르다가 아침부터 들이닥쳤다.
“아가씨! 단장을 시작합시다!”
“…유모오.”
사이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썼으나, 금세 햇살을 맞아야 했다.
“무려! 애크로이드가의! 티 파티인데! 대충! 입고 갈 수는 없다고요, 아가씨!”
“여자들만 모이는 곳인데 왜….”
“뭘 모르시는군요! 여자들만 모이는 곳일수록! 더! 완벽하게! 꾸미고 가야 한다구요!”
비몽사몽간에 중얼중얼 핑계를 내뱉던 사이나는 마르다의 격렬한 주장으로 인해 강제로 기상을 해야 했다.
‘키키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야….’
변명해도 소용없겠지만, 사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나마 중얼거려보았다. 그나마 세 시간짜리 풀코스 마사지를 하는 도중에 중간중간 쪽잠을 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르다의 노력에 힘입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갓 깐 삶은 달걀처럼 반질반질해진 사이나는 마담 샤를리즈가 보낸 새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 올랐다.
간만에 루퍼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말이다.
황도 타운 하우스로 이동한 김에 여러 가지 볼일을 한꺼번에 해치울 작정이었다.
티 파티 약속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이르게 나온 사이나는 마차를 로하튼 거리 외곽 서점 거리로 가라고 지시했다. 얼마간을 달린 마차가 목적지에 이르렀다.
벨류아 고서점이었다.
“루퍼트 경. 안은 혼자 들어갈게요.”
“하지만 아가씨.”
“그냥 책방이에요. 출입구도 이거 하나뿐이고. 정 뭐하면 일정 시간마다 들여다보면서 나 잘 있나 확인해요.”
루퍼트는 딱히 마음에 드는 것 같지 않았지만, 안을 한번 훑어보고는 나름 수긍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 크지 않은 가게 내부에 통로에까지 책이 이리저리 높이 쌓여 있었다. 그 같은 덩치로 들어갔다가는 책 무더기가 우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
“경이 들어가는 게 제가 더 위험할 것 같죠?”
“좀… 그렇긴 하군요. 서점이 아니라 창고 같습니다.”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사이나는 짧게 웃고는 내부로 들어섰다. 시야가 좁아 일부러 달아놓은 듯한 종이 문을 열자 딸랑거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할아범?”
벨류아 고서점의 주인장은 머리가 희끗한 노인으로 어쩌다 보니 호칭이 할아범으로 자리 잡았다.
사이나는 쌓여있는 책들을 어깨로 치거나 옷자락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내부로 들어섰다.
안쪽에 나름 카운터를 겸하는 책상이 있어 할아범은 보통 거기 앉아 있곤 했었다.
“할아…….”
그런데 할아범은 어디 가고 웬 낯선 남자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심상치 않게 잘생긴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