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수상한 초대장이 잔뜩
“욜리.”
“네?”
“욜리라고 부를 거야.”
유리를 떠올리게 하는 녀석이다. 이따금 그를 놀리듯이 부를 때 쓰던 ‘욜리’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살랑.
제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녀석은 꼬리로 느릿하게 물결을 그리며 폭신한 소파 위에 엎드렸다.
눈을 감은 표정이 편안한 듯했으며, 잿빛 털은 햇살에 감싸여 보송해 보였다.
* * *
“아가씨. 점심은 잘 드셨어요?”
유모 마르다가 네모난 함을 들고 들어왔다.
“아, 응. 유모는?”
“저도 먹었어요.”
마르다는 함을 사이나의 옆쪽에 내려놓으며 뚜껑을 열었다.
함 안은 온갖 봉투의 향연이었다. 초대장과 편지들인 것 같았다.
“…뭐가 이리 많아?”
“우리 아가씨가 데뷔탕트 볼을 환상적으로 치르신 데다가, 얼마 전 종막 무도회까지 잘 다녀오셔서 그렇죠.”
마르다는 뿌듯하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이것도 추리고 추린 거예요. 얼른 살펴보세요.”
전생에 가주 대리로 처리하느라 보았던 서신 말고 개인적으로 이리 많은 서신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썩 좋다기보다는 ‘이거 답장 언제 다 써, 귀찮게.’ 이런 생각만 든다.
“난 앞에서부터 읽을게. 유모는 뒤에서부터 좀 확인해줘. 그냥 초대장이면 가문이랑 이름만 알면 되니까 두고, 내가 직접 읽어야 하는 것만 따로 분류해줘.”
“아, 그럴까요?”
추려온 것들임에도 혼자 보기엔 양이 많아서 유모를 끌어들였다. 유모는 사이나 앞으로 이리 많은 서신이 왔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귀찮다는 생각도 않는 듯했다.
완벽하게 정렬된 것은 아닐지라도 앞쪽에 주요한 서신들이 주로 놓였을 것이다. 사이나는 앞쪽에서 적당히 한 움큼 꺼내어 들었다.
색색의 봉투들 가운데서 지나치게 무난한 흰색 봉투가 하나 있어 오히려 눈에 뜨였다.
“음?”
[벨류아 고서적 전문점]
“…오랜만에 보네.”
한때는 굉장히 익숙했으나, 지금은 생소한 느낌이다. 회귀 전에는 문턱이 닳도록 자주 찾아가던 곳이었는데…….
“어쩐 일이지?”
벨류아 고서점의 주인은 보통 그녀가 부탁해 놓은 서적을 구하는 데 성공했거나, 요청한 것은 아니더라도 평소 구매 유형과 맞는 서적이 들어왔을 때 이리 서신을 보내고는 했다.
잠시 아를어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신의 내용은 궁금했다.
사이나는 유모 눈치를 슬쩍 보고는 서신을 열었다.
[드보프 영애님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방문이 잦아들었다 싶었더니 데뷔를 준비 중이셨나 보군요.
소문에 어두운 제게도 소식이 들려왔을 정도니 성공적인 데뷔를 치르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이나는 첫 장을 읽다 말고 흠칫했다.
“…아니, 무슨 소문이 어찌 났기에…….”
알아보고 싶은 마음 반,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다.
[……이런 때에 제게 아주 희귀한 서적이 들어왔습니다. 영애님처럼 아를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해석은 하지 못하지만, 글자의 형태로 보아 이전에 많이 보지 못한 글자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새로운 글자라고?’ 민망한 기분에 도로록 굴러가던 눈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해석은 못 해도 고서적을 다룬 지가 수십 년 된 사람이라 착각할 리는 없었다.
“이건 꼭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책의 구매 여부를 떠나, 새로운 글자라니. 확인해 보아야 한다. 기존에 해석할 수 없던 문장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사심이 아주 많이 섞인 타협이기는 했으나 이런 유의 책은 금세 구매자가 생겨 사라지고는 했으니 확인이 필수였다.
그나마 사이나가 열혈 단골이라 제일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벨류아 고서적에서 온 서신을 한쪽에 잘 갈무리한 뒤에 집어 든 것은 진한 보라색의 봉투였다.
[사야~]
봉투에는 발신자도 없이 자신의 애칭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우아한 필체로.
‘음, 이건 또 누구야?’ 인장이 찍혀 있기는 했으나 가문의 문장이 아니었다. 개인 인장인 듯했다.
봉투를 열고 내지를 꺼내자 진한 꽃향기가 같이 흘러나왔다. 종이 질도 그렇고 향도 고급스럽다.
사이나가 안의 내용을 읽으려 손에 드는 순간이었다. 소파 한쪽에서 자는 듯했던 욜리가 쫄래쫄래 다가와서는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빼꼼하니 목을 내밀고서는 종이를 킁킁댔다.
“어, 욜리 너 이 냄새가 좋아?”
강한 향수 냄새에 이끌려 온 것일까?
“발톱에 걸리면 드레스 옷감 상하는데, 이 녀석 이리 오지 못해?”
그녀의 무릎 위로 타고 오르는 녀석을 보며 유모가 녀석을 다그쳤다.
“발톱은 안 세우더라고. 내버려 둬.”
“어휴, 너무 봐주면 안 돼요. 버릇없어져요.”
사이나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서신으로 눈을 돌렸다.
“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초대장을 보냈다. 키키 언니였다.
티 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으나, 예의로 점철된 공식 문구가 아니라 친구에게 쓴 편지 같은 느낌의 내용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오라고 했던 그건가 보네.’
사이나는 피식 웃으며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
“여긴 참석.”
승낙의 답장을 보내기 위해 사이나는 키얼스틴의 초대장을 한쪽에 따로 구분했다. 그 와중에 마르다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이나가 대외 활동을 한다는 말이 기쁜 듯했다.
“어딘데요?”
“애크로이드가. 티 파티.”
“어머, 거기 영애님이 유명한 살롱 멤버 아니에요?”
“응. 그럴걸?”
유모는 어쩐지 놀랐다가, 감탄했다가, 글썽이는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아련하게 사이나를 보았다.
“세상에. 아가씨…. 죄송해요. 여태 제가 아가씨의 사교 생활을 오해했었나 봐요.”
…아니야. 유모의 생각이 맞아.
이건 그녀의 능력이라기보다는 회귀의 여파로 어쩌다 얻어걸린 거라서 자랑할 만한 게 아니었다.
민망함에 사이나는 고개를 돌리며 다음 서신을 살폈다.
“흠.”
그리고 그다음 서신.
“흐음.”
이후의 서신들은 다 형식적이었고, 한번 찔러보듯 초대한 것들 일색이라 거절해도 될 것 같았다.
다만, 사이나의 입에서 묘한 탄식을 뽑아낸 두 개의 서신이 있었으니…….
하나는 엘리자베스로부터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자의 약혼녀인 일레인 반즈로부터 온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다 치고, 반즈 영애는 대체 왜 내게 서신을 보냈을까?’
얼마 전 파티에서의 분위기로 보아 앞으로 자신을 적대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설마… 협박장, 이런 건 아니겠지?’
거참,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꺼림칙해서 그나마 좀 익숙한 사람인 엘리자베스의 것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야.
안녕. 잘 지냈니?
제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이런저런 행사를 치르느라 서로에게 소홀했던 것 같아.
오랜만에 로하튼 거리에서 만나서 둘이 데이트하지 않을래?
쇼핑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수다도 떨고 그러자.
난 돌아오는 수요일이 좋을 것 같아.
기대된다. 답장 부탁해.
- 항상 널 친애하는 베쓰가.]
사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엘리자베스의 서신을 내려놓았다.
‘…뭔 생각이지?’
이전 생에서도 딱히 큰 의미를 둔 사이는 아니었지만, 유일한 동성 친구라서 의지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는 했다.
하지만 사이나는 엘리자베스가 단순하게 움직이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우정이나 애정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수단에 가까우리라.
의아함을 가지고 내려놓은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새에, 욜리가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보낸 편지지 위로 벌떡 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발톱을 세워서는 편지지를 박박 긁었다. 송곳니가 다 보이도록 입을 벌린 틈새에서는 곧이라도 ‘크르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요, 욜리?!”
갑자기 이 아이가 왜 이럴까.
사이나는 당황해서 욜리를 잡으려 했으나, 유모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발톱 안 세운다면서요?!”
“…….”
“이리 난폭한 짐승은 아가씨 곁에서 키울 수 없습니다.”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좋다고 놔두었던 유모도 사이나의 안전이 걸리자 매우 단호해졌다.
“당장 도련님께 말씀드리겠어요.”
“유, 유모!”
둘이 하는 모양새가 소란스러웠는지, 욜리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얌전히 쪼그려 앉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매우 순한 녀석이었는데, 방금 왜 그랬는지는 사이나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욜리. 너 왜 그랬어. 유모가 오해하잖아.”
욜리는 사이나의 말에 솜뭉치 같은 앞발을 들어 이미 넝마가 된 편지지를 향해 콩콩 치며 꼬리를 탁탁거렸다.
“편지가 마음에 안 드나 봐.”
“…아가씨. 강아지를 변호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짐승이 글이라도 읽을 줄 안다고 할 셈이세요?”
“아냐, 정말이야. 이 녀석 냄새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아. 뭔가 이 편지지에서 나는 냄새가 마음에 안 든 게 틀림없어.”
사이나는 자신을 향해 킁킁댔던 이야기와 보라색 봉투에서 난 향기는 좋아하지 않더냐 하는 설명들을 덧붙이며 변명했다.
변명임은 알지만 첫눈에 호감을 느꼈고 벌써 정이 든 녀석이라 욜리는 제 곁에 있어야 했다.
이름까지 지어주었으니, 정말 못 보낸다.
“…어릴 때도 안 키우시던 짐승을. 휴.”
갑작스런 동물에 대한 집착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마르다는 갸름하게 눈을 뜨며 욜리를 흘겨보았으나, 이내 별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흠흠. 다음 걸 읽어 볼까아~”
유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가려는 기색이 보이자 사이나는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일레인 반즈가 보낸 봉투를 집어 들었다.
황족만이 쓸 수 있는 황금색 봉투는 아니었다. 본인이 ‘황자비’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아직은 황자의 약혼자에 불과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음?’ 티 파티 초대장이었다. 저번에 언급했던 것처럼 헤베타의 궁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그 티 파티.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나에게 초대장을 보낼지 몰랐는걸?’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휴게실에서의 사건과 황자와 춤까지 춘 것 때문에 이미 틀어진 사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던 사이나였기 때문이다.
‘반즈 영애가 그리 뒤끝이 없는 성격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지.’
사이나는 굳이 그녀가 초대장을 보낼 이유가 또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