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짐승의 이름
“아….”
사이나는 갑자기 또 북받치는 기분이 들어서 짐승을 끌어안았다. 답답한지 바동거리는 작은 생물체를 꼬옥 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에.
“율아…. 넌, 왜…….”
…없는 것일까. 대체 네 존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금 서늘해지는 가슴을 외면하려 애쓰며 사이나는 품 안의 온기에 집중했다.
짐승을 안고 있으니 그래도 좀 괜찮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녀석이 유리처럼 잘 자라는 인사를 해주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심경을 느꼈는지 얌전해진 짐승을 품 안에 꼬옥 안은 채로, 사이나는 천천히 수면에 빠져 들었다.
* * *
“엣취!”
코가 간질거리는 감각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기침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난 사이나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몽롱하게 떠진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하지만 최소한 눈앞에서 뭔가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알겠다.
“흐엣…!”
또 터져 나오려는 기침에 사이나는 입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원스럽게 터지지 못한 기침 때문인지 코가 더 간지러운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꼬리털 때문이었다. 그녀를 깨우려고 했던 건지, 우연인 건지, 그도 아니면 심술인 건지는 몰라도 바닥을 털썩털썩 쳐대는 꼬리 끝이 그녀의 콧방울 근처를 계속 스치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또 이럴까…….”
더 자고 싶은데 강제로 깨어난 사이나가 의욕 없이 중얼거렸다.
사이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으함.”
기지개를 켜며 아침 햇살이 넘실거리며 창 안으로 들어차는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은 무얼 할까, 하는 고민이 든다.
전에 아를어에 미쳐 있을 때는 매일 매일 하루가 짧았는데, 공부는 그만하고 열심히 살아보리라, 다짐하자 오히려 할 게 없는 것 같다.
‘다른 귀족 영애들은 매일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걸까…?’
자연스럽게 그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사교 활동을 그다지 해본 적이 없어서, 본격적으로 했을 때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는지 도무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녀가 한 사교 활동이라고 해봐야 결혼 이후 강제로 하게 된 것들이 다였고, 당연하게도 잘하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곳에 가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가문 내에서 해야 할 잡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이런 걸 고민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긴 하지.”
더 이상은 그 개판인 집안과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사이나는 침대 옆 설렁줄을 한 번 당기고는 침실 문을 열었다. 종소리를 듣고 곧 세안을 준비하러 하녀들이 올라올 것이다.
응접실로 향하며 사이나는 중얼거렸다. 대답은 못 해도 짐승이 쫄래쫄래 따라오는 게 느껴지니 어쩐지 말을 거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어, 잠깐. 너 침대에서 어떻게 내려왔어?”
분명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어느새 짐승이 바닥에 있었다.
고양이면 이해하겠는데… 저건 강아지 아닌가?
갯과 짐승들의 점프력이 원래 저리 좋았었나?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너, 좀 커진 거 아닌가?”
어제 자기 전에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커진 기분이다. 하루 만에 갑자기 이렇게 크는 게 말이 되나?
너무 이상해서 사이나는 허리를 굽혀 짐승을 들었다. 손안에 들어차는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데 무게만으로는 딱히 모르겠다. 별 차이 없이 가벼웠다.
짐승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 모름’ 모드를 실행할 뿐이었다.
사이나는 정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짐승을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구석에 녀석의 것으로 보이는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었다. 그릇을 들여다보니 깨끗했다. 싹 비워 먹은 것처럼.
“…이거 네가 다 먹었어?”
살랑.
짐승은 말없이 꼬리만 느른하게 움직였다. 녀석은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고, 변덕이 심한 것 같았다. 꼭, 누구처럼…….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유모가 노크한 후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옷이 너무 얇잖아요. 또 감기 걸리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유모는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얇은 잠옷을 보고는, 숄을 가져와 어깨에 꼼꼼하게 두르며 잔소리를 했다.
작년에 감기에 걸려 누웠다가 일 년간 깨어나지 않았던 탓인지, 유모나 세이지는 그녀가 약간만 추워 보여도 난리를 피워댔다.
“음…. 지금 겨울도 아닌데.”
“겨울이 코앞이에요.”
“실내인걸. 안 추워, 하나도.”
“무슨 소리세요. 목덜미가 새하얀 거 보세요.”
“…….”
본래 피부톤이 창백한 것까지 나무랄 기세다.
사이나는 얌전히 숄을 여미며 말을 돌렸다.
“전에 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둔 거 있다고 했지? 새끼 잃은 어미 개 있는지.”
“어머, 이 녀석이에요?”
“응.”
유모가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강아지를 들어 살피며 유모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들어온 녀석일까요? 어미 개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그런 개는 없다고 했다.
“원래 허락 없이 짐승을 키우면 안 돼요.”
사용인들이 짐승을 키우고 돌보는 경우는 주인이 원해서 키우는 경우 외에는 거의 없단다.
마구간에서 키우는 값비싼 말이나 사냥용 개, 혹은 전서구 등 말이다. 그도 아니면 도축용으로 키우는 가축이었다.
“흐음. 그럼 몰래 키우던 경우도 없어?”
“네. 그런 경우도 감안해서 알아보았는데 없었어요. 도무지 어찌 스며든 녀석인지 모르겠네요.”
유모도 강아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됐네. 내가 키우는 것으로 확정.”
어미 개가 있다고 밝혀진들 흔쾌히 녀석을 보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리되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사이나는 유모에게서 녀석을 받아들며 웃었다.
“그럼… 너, 이름이 필요하려나?”
처음에야 사이나가 계속 키워도 될지 알 수가 없어 부러 생각을 안 했지만, 이젠 이름을 지어주어도 될 거 같다.
그녀의 물음에 짐승이 다시 꼬리를 살랑거렸다.
“좋다는 뜻이야?”
또다시 살랑살랑.
“그래. 그럼 음, 뭐가 좋을까.”
살랑살랑.
“뽀삐? 피피? 댕댕이?”
짐승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려다보니 꼬리의 움직임이 멈춘 데다 약간 입을 헤 벌리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표정이 어쩐지 어이없다는 느낌이었다.
“……별로야?”
이번엔 포옥, 하고 한숨까지 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내 눈이 이상한 건 아니겠지?
“…너 내 말 알아듣는 거 맞지? 응?”
사이나의 질문에 짐승이 갑자기 얌전해졌다. 그러다가 급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방정맞게 꼬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괜히 찔려서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면… 말도 안 되는 걸까?
“음. 그래…. 말이 안 되지. 안 되겠지?”
“…….”
“아냐. 뭔가 좀 이상해.”
사이나는 짐승이 고개를 돌린 쪽이 정면으로 오게 몸통을 돌려 잡았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
사이나는 가느다란 눈초리로 잿빛 짐승의 엉덩이를 받치며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짐승은 별수 없이 사이나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응접실 한쪽 벽에 자리한 커다란 테라스 창으로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찼다. 그 햇살에 반사된 빛이 짐승의 눈동자에서 반짝거렸다.
제비꽃이 그 눈동자 안에서 피어났다.
“…유리…….”
사이나의 입에서 예기치 못하게 이름 하나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들여다본 거울 안에서 늘 보던 그 색, 유리의 것과도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짐승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짐승의 눈동자 안에서 제비꽃 색을 발견한 순간, 사이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주 그리운 것 같으면서도 안도감이 들고, 외로우면서도 사랑스럽고, 슬프면서도 희망에 찬…….
그 상반되면서도 다양한 갖가지 감정을 느끼는 동안, 사이나는 시간이 잠시 멈추고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짐승이 껌벅거려 두 눈을 닫기 전까지 말이다.
다시 뜬 녀석의 눈에는 더 이상 그 색이 없었다. 제비꽃 색이 사라지자 사이나는 급작스럽게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었다.
“아….”
대체 뭐였을까. 방금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얼마 전 퍼레이드에서 모레프를 처음 보고 느꼈던 기묘한 감각과 약간 비슷했다.
사이나는 짐승을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계속해서 살폈지만, 사라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똑똑.
“아가씨. 세안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사이 하녀들이 올라왔는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옹기종기 들어온 하녀들이 응접실 한쪽에 연결된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사이나가 씻을 수 있게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가 끝나자 나와서 사이나를 이끌었다. 그 와중에 소파 위에 있던 짐승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머, 귀여워라.”
하녀 한 명이 짐승을 보고 발을 구르며 감탄했다. 욕실에 있던 다른 하녀들도 나와 뭔가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이 아이군요. 그 강아지가.”
“진짜 귀엽다.”
“아가씨,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하녀들은 눈을 초롱초롱 뜨며 사이나에게 물었다.
짐승의 꼬리가 바닥을 털썩털썩 치며 움직이는 것을 보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 모양새가 웃겨서 사이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이 별로 맘에 들어 할 것 같지는 않네.”
사이나의 대답에 하녀들이 대번 울상을 지었다.
“보송보송해 보여요.”
“아, 진짜 만져보고 싶어요.”
“괜히 손댔다가 물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 그만둬.”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기는 해도 사람을 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이나는 부러 그리 말했다.
“이름은 정하셨어요?”
“이름?”
“네, 이 강아지 이름이요.”
이름이라. 아까는 단순히 짐승의 이름을 짓는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이나가 지긋이 녀석을 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귀를 쫑긋대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짐승의 눈동자는 현재 회색으로 보였다. 어두울 때는 검게 보이는 은회색. 그 안에 보랏빛은 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응. 정했어.”
그래. 이 이름이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