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너 냄새나
“의상까지 맞춰 입고?”
“…….”
질문은 계속되었다.
“공작이 드보프가 살롱까지 참석했다고 들었네만?”
“…네.”
대체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어차피 제국의 다음 황제는 귀족들의 줄 서기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오롯하게 수호령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기에 맥페이든 황가는 다른 나라들처럼 피 튀기는 세력다툼이나 형제의 난 같은 것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이나의 말 한마디가 예민하게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할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둘이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네?”
저택에 한 번 방문했다고 바로 결혼이라니, 어째서 결론이 저런 식으로 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대체 왜 이런 걸 묻느냔 말이지.
“흠.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아닌가 보군.”
“…….”
“다행이야.”
…다행?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 그렇다 치고 다행은 또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대놓고 탐색을 하는 황자의 눈길이 느껴져 사이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이제 얼른 음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드디어……!’
음악이 잦아드는 소리가 세레나데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한 곡으로 호기심은 풀렸는지 순순히 플로어를 나서는 황자를 따랐다. 얼른 인사를 하고 멀어져야겠다고 사이나가 생각하던 그때.
웃고 있는 일레인 반즈와 딱 마주쳤다.
“길리언 님.”
황자를 맞이하러 온 모양이다.
“아, 일레인.”
“이번에는 저와도 한 번 추시면 어때요?”
“아까 첫 춤을 추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다른 여자와 춤 한 번 출 때마다 이리 쪼르르 달려오면 내 입장이 뭐가 돼?”
“길리언 님, 그게 아니라…….”
“쯧쯧.”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아니, 싸움은 둘이서 하시라구요!’
괜히 춤 한 번 췄다가, 굉장히 민망한 입장에 처하게 된 사이나는 멀뚱히 뒤에서 눈치만 보다가 일레인 반즈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사이나에게 닿아오는 눈빛에는 칼이 담긴 듯했다.
‘저기, 저라고 원해서 춘 게 아니거든요?’
마치 사이나가 황자를 꼬여내기라도 한 것처럼 눈총 어린 시선을 받고 나자 억울한 기분이 팽배했으나, 따지기도 애매하다.
아무래도 저 반즈 영애와는 제대로 척을 진 듯했다.
뭐 어쩌랴. 친해질 수 없으면 없는 거지.
사이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다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리란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베쓰?’
그런데 이 아이는 또 왜 이럴까.
일레인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마주친 엘리자베스의 눈빛이 매우 묘했다.
웃고 있으나 웃는 얼굴이 아니다. 미소가 무슨 소용이랴. 눈이 웃지 않는걸.
일레인 반즈처럼 적의로 가득한 그런 눈초리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더 꺼림칙한 눈빛.
열이 받았거나 화가 난 거라면 오히려 뜨거웠을 것이다. 그렇다기보다 그녀의 눈빛은 저 아래 저변에서 계산과 소용성을 따지는 무기질의 속성을 띠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와는 지난 생에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긴데, 어째 짧게 본 이번 생에 알게 된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엘리자베스의 눈빛은 사이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우선 여길 벗어나자.’
그녀는 황자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남기고 바로 돌아섰다.
다행히 핑계는 충분했다. 크레이머 공작이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름 파트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걸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공작님.”
그가 다가와 그녀를 맞이하자, 사이나는 불필요한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공작과 함께 자리를 이동하는데 뭉근한 시선들이 둘을 따라왔다. 지나친 관심에 피곤해진 사이나는 음료바 쪽으로 향하는 척하며 슬며시 기둥 뒤 사각지대에서 멈췄다.
집요하게 따라오던 시건이 차단되자 조금 살 것 같다.
기둥 앞을 지나가던 귀부인 일행의 수다가 귀를 파고드는 것까지는 차단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크레이머 공작이 드보프가의 살롱에도 참석했다면서요?”
“아, 저도 들었어요. 안 그래도 그 살롱 초대장을 못 구했다고 남편이 아쉬워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더 속상해하더라고요.”
“네네. 그날 나온 와인이 또 장난이 아니었대요. 공작 각하께서 맛을 보시고는 극찬을 하셔가지고 살롱에 참석한 분들은 죄다 그 와인 찾으려고 주류상이라는 주류상은 다 뒤지고 다닌대요.”
“왜요?”
“수십 배 뛸 와인이라니까 미리 선점해두려고 그런 거겠죠.”
“수십 배요? 어머, 이름이 뭔데요?”
“그게, 이름을 비밀로 했다더라고요. 그러니 더 난리죠.”
호오. 이건 좋은 소식인데?
크레이머 공작이 살롱에 참석한 덕분에 <봄날의 장미> 853년산 가격상승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질 모양이다.
그래봤자 공작 덕분에 받게 된 과도한 주목 때문에 생긴 불만을 상쇄하기 힘들었지만.
“내가, 뭔가 잘못한 모양인데.”
“…네?”
“뭔지 모르지만 사과하겠다고 하면… 더 화가 날 일일까?”
“…….”
혹시 내 표정이 엄청 안 좋았나…….
현 상황이 피곤해서 불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티를 낼 생각은 없었는데 참으로 민망했다.
“흐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벌써 표정 관리를 엄청 잘하던데, 난 왜 이리 허술하담…….
10년이나 더 살았는데 말이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저 사실 이렇게 큰 연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어설픈 핑계였으나 공작은 별말 없이 받아주었다.
“이 정도 있었으면 돌아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럼 돌아갈 텐가? 내, 마차로 바래다주지.”
“어, 그러셔도 괜찮아요? 볼일 있으면 더 계셔도 되는데요.”
“아니, 괜찮아. 딱히 다른 볼일은 없어. 그대 때문에 참석한 것뿐이라서.”
“…네?”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저번에 말한 그, 잘 보이고 싶어서… 의 일환인가?
혹시 농담인가 싶어 공작을 올려다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여상했다.
‘…으음. 뭐라 대꾸를 해야 하나? 아님…….’
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괜히 파고들었다가는 더 난처해질 것 같으니까.
“괜찮으시면, 네. 전 이만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지.”
* * *
건국제가 끝났다.
짧으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었는데, 사이나가 느끼기에는 묘하게 다사다난했다.
첫날과 마지막 연회에만 참석했음에도 그러했다.
‘끝났으니 다행이지.’
사이나는 종막 연회 다음 날 바로 타운 하우스를 떠났다.
델본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사이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풀썩.
“컁!”
사이나는 침대에 있던 뭔가가 파드득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악!”
놀란 몸을 일으키며 살피자 제 침대 위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몸을 일으키며 부르르 털고 있었다.
“아, 너로구나. 침대에 있었어?”
후원에서 데리고 왔던 그 강아지였다.
사이나는 혹시 자기가 짐승을 깔고 누웠을까 봐 조심스레 살폈으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침대 높이가 상당한데 여길 어떻게 올라왔지? 누가 올려주고 갔나?’
빼꼼 고개를 든 짐승이 사이나의 발치로 다가왔다. 그 모양새가 귀여워서 사이나는 짐승을 안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짐승이 갑자기 솜방망이 같은 앞발을 들어 그녀의 손을 후려쳤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앗, 왜 그래?”
짐승은 솜방망이 같은 한쪽 발을 여전히 든 채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강아지도 미간을 찌푸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표정을 굳이 묘사하자면 미간을 매우 찌푸린 얼굴이다.
“크르릉…….”
그리고는 그녀의 주변을 후다닥 맴돌며 사방을 킁킁거렸다. 킁킁거릴수록 짐승의 심기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곧 사이나의 정면으로 다시 돌아온 짐승은 코를 킁킁하고는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고, 다시 킁킁대고 꼬리를 타악, 탁 쳤다.
“…….”
누가 봐도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매우 불쾌하다.’라는 뜻 같았다.
‘마차 타고 오는 동안 무슨 냄새가 배었나?’
사이나는 팔을 들어 슬며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녀의 코에는 딱히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전날 밤 목욕 후 머리카락에 발랐던 향유 냄새와, 향기가 배도록 미리 드레스와 같이 걸어뒀던 향낭의 냄새뿐.
하지만 보통 짐승의 후각이 더 뛰어나니, 뭔가 자신은 맡을 수 없는 범주의 냄새가 나는 건지도 모른다.
사이나는 짐승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났다.
‘짧기는 해도 외출했다가 들어온 거니까, 그래. 씻자…….’
짐승의 눈치를 보며 씻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대로 있다간 짐승의 꼬리 탁탁 공격을 계속 겪어야 할 판이다.
하녀를 호출해 드레스를 벗고 목욕을 마쳤다. 머리까지 꼼꼼하게 다 말리자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때마침 저녁 시간이 되어 시종이 부르러 왔기에 간단한 복장을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오늘까지 타운 하우스에 머무실 예정. 세이지와 둘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는데 짐승이 여전히 깨어 있었다.
침대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다가 문소리를 듣고는 귀를 쫑긋대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씻고 왔어. 됐니?”
그녀가 다가가자 그새 일어나 킁킁대려는 기색이 보여 얼른 선수 치듯 말했다.
짐승 주제에 왜 이렇게 표정이 다양하게 읽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짐승은 ‘너 아직도 냄새나.’라는 표정으로 몇 번 킁킁대다가 ‘이 정도면 그래도 봐주지.’라는 모양새로 다시 털썩 엎드렸다.
‘시집살이하는 기분이네.’
이불을 걷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자 짐승이 들썩거리는 부분을 피했다가 도로록 다시 다가왔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모로 눕자, 짐승이 얼굴 앞에 서더니 자신의 코끝으로 이마를 두 번 콕콕 찍는다. 그리고는 바로 옆자리에 몸을 둥글게 말며 다시 엎드렸다.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자. 톡톡.’
‘너도 잘 자. 톡톡.’
짐승의 행동은 사이나에게 급작스러운 추억을 하나 불러들였다.
잠들기 전에 서로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톡톡하던 것. 그건, 유리와 사이나 둘만의 굿나잇 인사였다.
둘은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저들끼리만 아는 수신호를 많이도 만들어서 사용하고는 했다. 이따금 세이지가 툴툴거리며 불만을 표해도 알려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짐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