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31화 (31/233)

31화. 가족이 되는 방법?

욕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 부럽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레프를 엄청 가까이서 직접 볼 수도 있겠네? 만져볼 수도 있고?」

크레이머 공작은 수호령의 소유자가 아닌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이내 접었다.

자신 때문에 약혼자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엘리자베스를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여서야 되겠느냐고 자책했었다.

그렇기에 사이나는 더더욱 최대한 진심을 담아 엘리자베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려 노력했었다.

‘그런데 만약 그 반대 입장이면…….’

자신이 만약 크레이머 공작과 결혼한다고 발표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발데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말을 듣는 즉시 웃음을 띠며 축하의 말을 건네줄까? …과연?

사이나는 어쩐지 그 장면이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

“알아들었어.”

키얼스틴이 피식 웃으며 사이나의 볼을 살짝 퉁겼다.

“…네?”

“고민이 이렇게 길다는 것 자체로 이미 대답을 들은 거 같은데.”

사이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상념에 오래 빠져 있었던 듯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새삼 친구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 친구 사귀는 걸 잘 못 해요.”

정확히 말하면 친구라는 존재를 만들려는 노력 자체를 해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만큼 지난 시간의 그녀는 한쪽으로 치우쳤던 사람이었다.

“…사야!”

그런데 키얼스틴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자신을 포옥 안았다.

이 와중에도 머리 모양이나 화장이 지워지지 않게끔 당겨 안는 힘에는 기교가 넘쳤다.

수욱 당겨지며 키얼스틴의 가슴팍 위로 손을 얹고 만 사이나는 손에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깜짝 놀랐다.

“어, 죄송해요. 언니.”

같은 여자인데도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빨개진 얼굴을 보며 키얼스틴이 깔깔 웃었다.

“어지간히 키키 마음에 들었나 보네.”

반대쪽에서 키얼스틴이 하는 행태를 보며 웃는 다른 사람은 에비앙 드미트리.

드미트리 백작가는 대대로 황실 재무관을 역임해온 아주 유서 깊은 가문이다.

바깥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키얼스틴이 차갑고 도도, 에비앙은 화사하고 상냥한 느낌인데 막상 대면해보니 정반대였다.

지난 시간을 통틀어 둘의 실제 성격이 이러리라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친한 사이에만 보여주는 성격이라는 건가…….

“사야가 대체 왜 친구가 없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키얼스틴이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키얼스틴은 첫 만남부터 사이나를 굉장히 예쁘게 봐주고 있었다.

“공부에 미쳐서 다른 데는 전혀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 친구가 없지.”

에비앙 드미트리가 당연하다는 듯 첨언했다.

공부에 미쳤다니……. 소문이 저 정도였던가.

“음. 제가 좀… 그랬죠.”

민망한 표정을 수습하며 겸연쩍게 덧붙였다.

“이제부터라도 활동을 좀 해보려고요.”

또 그놈을 만나면 안 되기도 하고, 전생처럼 살아서도 안 되니까요.

“걱정 마. 이 언니가 친구 해줄게.”

키얼스틴은 후후 웃으며 걱정 말라고, 자신만 믿으라고 속살거렸다.

“아, 근데 저 키키 언니라면 제 오라버니 소개시켜 줄 수 있어요.”

사이나의 말에 키얼스틴의 눈이 커졌다.

“아니, 잠깐. 이미 받으셨지요. 음, 아무튼 그렇다고요.”

단순히 데뷔탕트 볼의 파트너를 바꾸기 위한 목적이기는 했으나, 이미 세이지를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아우- 귀여워! 나는 왜 시커먼 남동생밖에 없는 거야!”

키얼스틴이 갑자기 또 흥분을 해서는 사이나를 향해 손을 벌렸다.

이번에는 키얼스틴의 표정이 조금 위험해 보이기까지 해서 그녀는 흠칫했다.

“가족 만들고 싶으면 결혼하면 되지.”

흥분한 키얼스틴을 보고는 에비앙이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아무리 귀여워도 내가 사야랑 어떻게 결혼을 하니!”

“너 말고. 네 남동생이랑 사이나랑 하면 되지 않겠어?”

“호오?”

‘저기, 저 여기 있거든요?’ 제 의사는요…?

누가 봐도 농담일 것이 분명하건만 키얼스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이나를 응시하더니,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번에 보니 그 자식이 여엉 못 미덥더라고. 평소엔 맨날 어깨에 힘주고 다니면서, 사야 앞에서는 멍청이 같더라니까?”

“키키, 네가 드보프가 장남이랑 하는 방법도 있고.”

“호오. 그것도 방법이네.”

농담인데 어째 점점 더 농담 같지 않게 변해가는 이 상황은 뭐지.

‘저기, 결혼이라는 게 보통 그런 이유로 하지는 않을 텐데요……?’

세이지 정도면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고, 성격이나 인성 면에서도 좋은 남자라고 장담할 수 있기는 하다.

자신의 오빠라서가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도 그렇다.

‘이번 생엔 좀 푼수 같은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길게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키얼스틴이라면 세이지와 결혼해서 잘 살 것 같기도 했다.

저번에 봤을 때 의외로 잘 어울리기도 했고.

“키키 언니라면 환영이에요. 세이지 오라버니 좀 구제해주세요.”

결혼 시장에서 세이지 드보프의 가치는 절대 낮지 않다. 가문을 물려받을 것이 분명한 장남인 데다, 드보프가의 부귀와 명성은 널리 알려진 상태.

또한 대대로 드보프가의 남자들은 부인에게 충실했다. 이런 가문의 분위기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여자 입장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황도 기반 중앙 귀족이니 드보프가는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혼처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렇잖아?’

딱히 결혼할 마음은 없지만, 세이지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같은 가문인 사이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전생에 조지 홀랜더는 그렇게 사이나에게 부족하고 못났다며 투덜대기만 했었다.

새삼 거지 같은 놈이라는 게 다시금 입증되었다.

“아부성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데 입 안의 혀 같은 저 달콤한 말이라니. 확실히 키키 네가 좋아할 만해.”

에비앙은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사이나를 보며 말했다.

아부라니……. 아부 아닌데.

“제가 대화 기술이 좀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 뭐가 이상하면 지적해주세요.”

이래서 친구가 없는 걸까. 친구가 없어서 더 말을 못 하는 것일까.

뭐가 우선인지는 몰라도 약간 시무룩해진 사이나가 나름 변명했다.

“쿡. 아하하하.”

“사야. 후…….”

에비앙은 이내 웃어버렸다. 키얼스틴은 더 깊게 그녀를 안아왔다.

“안 되겠다. 나가자, 사야. 오늘 카이언이랑 춤 한번 춰줘. 아까 보니까 그 자식 멍청하게 벽에 붙어 있더라고.”

“……그럴, 리가요?”

“카이언이랑 춰줄 거지? 내가 부탁할게.”

카이언이 그렇게 인기가 없지 않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

“아, 언니도 그럼 우리 오라버니랑 한번 춰주세요.”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데뷔탕트 볼 때처럼 기브 앤 테이크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다시 깔깔 웃는 키얼스틴의 무리와 함께 사이나는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 * *

“오늘 예쁘네.”

앞서 있었던 이유로 카이언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사이나에게 카이언이 말했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은근히 이 녀석, 칭찬을 잘한다.

“고마워. 오늘 너도 멋있다.”

칭찬을 받았으니 되돌려주자. 그래, 이런 게 다 사회적 스킬 아니겠는가.

그리고 의례적인 칭찬의 말이 아니더라도 카이언은 멋졌다.

약간 웨이브가 진 적발은 보기 좋게 넘겨진 채 고정되어 있었고, 나이답지 않은 관록이 전체적으로 묻어났다.

갓 성인이 된 참인데 큰 연회에서 들뜨지 않는 태도만으로도 교육을 잘 받은 대귀족의 여유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이언은 사이나의 대답을 듣고, 무어라 덧붙이고 싶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가 결국 꺼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의외로 둘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춤만 열심히 추었다.

마무리 인사를 하는 시점까지도 카이언의 입술은 자꾸 들썩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면 하지, 어째서 저렇게 망설이는 걸까 싶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중에 사이나는 주변이 웅성거리는 기색을 느꼈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인데……?’

등 뒤부터 소란함이 따라오며 시선이 엉겨 붙는 느낌.

전에 크레이머 공작이 자신에게 춤을 청했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설마…….’

불길함에 싸해지는 목덜미의 감각에 사이나는 모른 척하기로 결정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얼른 앞으로 걸어 자리를 벗어날 참이었다.

“……!”

그러나 누군가 턱 하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사이나의 내면에 아주 다양한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1-2초 상간에 말이다.

손목은 왜 잡는 거야. 무례하네. 대체 누구야. 설마 또 공작?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등.

결국 뒤를 돌아본 사이나의 눈이 커졌다. 예상은 틀렸지만, 상황은 더 안 좋았다.

‘…대체?’

길리언 황자였다.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다.

“한 곡 추지.”

인사할 타이밍이나 춤을 거절할 타이밍도 없이 사이나는 대번에 플로어로 끌려갔다.

“아…….”

손목이 아팠지만 감히 황자의 손을 떨어낼 수는 없어서 사이나는 급히 보폭을 올렸다.

‘…장갑 끼길 잘했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자가 잡은 팔목이 굉장히 불쾌했다.

아무리 황자라지만 멋대로 이렇게 사람을 끌고 가다니. 설마 공작은 이런 것도 예상했던 것일까?

황자의 리드는 거침없었다. 매우 자신감에 찬 몸짓이 짧은 파트너 경험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묘하게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 움직임이라서, 같이 추는 사이나가 배로 힘이 들었다.

‘공작님과의 춤이 그리워질 지경이네…….’

최소한 크레이머 공작과 춤을 출 때는 어색할지언정 힘은 안 들었으니까.

“크레이머 공작이 데뷔탕트 볼 때 그대에게 춤을 청했다지?”

공작의 생각을 해서인가, 황자가 대뜸 그 화제를 꺼냈다.

“…네.”

“어땠는가?”

“그냥 평범하게 춤을 한 곡 추었을 뿐입니다.”

황자가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몰라, 사이나는 무난하게 대답했다.

허나, 대답이 황자의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은 두 곡이나 연달아 추었나?”

“…….”

바로 그녀에게 면박을 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