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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30화 (30/233)

30화. 친구의 정의

사이나는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직시하자, 엘리자베스는 잠깐 움찔하는 기색이었으나, 입가에 드리운 꿀같이 달콤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열아홉. 벌써 의도를 숨기고 행동을 할 수 있는 나이구나.’

자신은 당시에 그리 못 했기에 생각도 못 했다.

그나마 지금은 사이나의 정신연령이 10년여가 추가되었기에 저런 모습이 보이는 거지, 예전이었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사이나는 일어섰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안녕하세요. 사이나 드보프입니다.”

생소한 얼굴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얼굴이었다.

보아하니 중앙에 있는 두 명이 이 무리의 중심인 듯했다.

메릴린 하퍼와 일레인 반즈.

“메릴린 하퍼예요.”

그녀는 하퍼 후작의 딸로서, 애크로이드 후작가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영애다.

“황자비인 일레인 반즈일세.”

“…….”

일레인 반즈가 황자비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사이나는 슬쩍 눈썹이 올라갔다.

그녀는 헤베타다. 황자비가 아니라.

‘비’라는 명칭을 달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사이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 황자비가 아닌 그녀는 사이나에게 하대를 할 권리가 없었지만, 이 역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별 관심이 없는 사람과 뭐가 옳네, 그르네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갓 데뷔를 치렀으니 함께 어울릴 다른 친구들을 열심히 찾고 있을 시기로군.”

일레인 반즈는 사이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렇지는 않지만, 역시 반박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양의 친구라지? 내 특별히 그대를 나의 궁 티 파티에 초대하도록 하지.”

“…….”

“아는지 모르겠으나, 아무나 올 수 있는 티 파티가 아니야. 그대는 운이 좋군.”

사이나는 눈을 깜빡이며 할 말을 골랐다.

엘리자베스는 분명 전생에 유일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얄팍했을지언정 나름 우정이라고 이름 붙였던 감정은 고된 삶의 여정을 지나며 소모되었고, 현생에서는 얼마 전 그녀가 자신에게 조지 홀랜더를 소개해주려고 한 것 때문에 기피 순위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대놓고 척을 지는 기색을 보일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

“그런가요.”

그래서 사이나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뭐, 아프다든지 핑계를 대거나 그냥 영지로 내려가서 요양을 빙자한 여행이나 하다가 와야겠다.’

대충 이 상황만 넘겨야겠다고 생각하며 휴게실을 나갈 타이밍을 찾는 중에.

벌컥.

또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연회 초반부터 휴게실이 북적거리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또 누구야, 하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 사야아~?”

키얼스틴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 키… 키 언니?”

“후후. 우리 예쁜이. 여기 있었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온 키얼스틴이 인사 대신 그녀를 꼭 안았다. 물론, 머리가 흐트러지거나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는 각도에서 말이다.

같은 여자인데 그녀가 자신을 좀 안아주었다고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기분이 드는 거지?

사르르한 미소를 보자 더 빨리 뛰는 것 같다.

“아, 맞다. 예쁜아. 다음 주에 시간 있지?”

“…네, 네?”

“티 파티 초대장 보낼 테니 꼭 오기다?”

“아, 음. 네.”

“뭐야, 지금 싫다는 거야?”

키얼스틴이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며 웃었다.

“어, 그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서.”

“올 거지?”

“…네.”

“좋아.”

키얼스틴은 손가락으로 사이나의 볼을 닿을 듯 말듯 살랑살랑 만지며 사르르 녹아내릴 꿀처럼 웃었다.

이성을 유혹할 때 써야 할 것 같은 달콤한 미소인데 정작 사이나가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연회 초반부터 왜 이렇게 인구밀도가 높은 거람?”

키얼스틴 말고도 그녀의 일행이 같이 들어온 덕분에 휴게실은 꽉 찼다.

키얼스틴은 두리번거리더니 마릴린 하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찌릿. 순간적으로 그 사이에 번개가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무리는 불구대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머, 애크로이드가의 위세가 세다지만 어쩜 황자비께 인사도 드리지 않네요.”

메릴린 하퍼는 헤베타를 본 척도 안 하는 키얼스틴을 나무라듯 말했다.

“음? 황자비께서 이 방에 계시면 당연히 인사를 드렸겠죠? 영애, 나는 인사성은 물론 시력도 아주 좋답니다.”

키얼스틴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기 황자비가 어디 있느냐’는 의문을 표했다.

키얼스틴과 함께 들어온 영애들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반면, 헤베타님은 보이는군요. 안녕하세요.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시나요?”

일레인 반즈가 매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두 무리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사이나 혼자서만 난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 다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일레인 반즈와 키얼스틴 애크로이드 중에서 누구의 신분이 더 높은가를 따지면 살짝 애매하긴 했다.

일레인 반즈가 자작가의 영애라는 것과 별개로 헤베타의 신분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녀가 약혼한 지 이미 2년째라는 것이 문제였다.

황자인 길리언 맥페이든의 전례를 보았을 때, 약혼 기간은 최대 2년 반이었다. 그 안에 후계의 증표를 보이지 못한 헤베타와는 모두 파혼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일레인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

일레인은 거세게 키얼스틴을 노려보다가, 그녀의 무리를 한 명, 한 명 훑으며 매서운 눈빛을 보내더니 마침내 사이나에게까지 닿았다.

‘내가 정말로 황자비가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가만두지 않겠어.’ 같은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어 사이나는 투덜거리고 싶어졌다.

“흥!”

일레인 반즈가 거칠게 몸을 돌리며 휴게실을 나갔다. 하퍼 영애는 피식, 하더니 뒤를 따랐고 나머지 무리도 그 뒤를 이어 우르르 나갔다.

그 와중에 사이나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행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힐끔 보더니, 슬쩍 사이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사야. 지금은 길게 대화 못 하겠다. 다음에 같이 놀자.”

매우 상냥한 말투로, 우리가 언제 같이 만나서 놀기로 한 것이 확정된 사항이기라도 하듯 말하고는 흘끔 키얼스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이나를 향해 예쁘게 웃고는 손을 흔들며 휴게실을 나갔다.

“흐음. 사야. 저 라임 블론드랑 친구야?”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키얼스틴이 그녀를 끌어다 카우치에 앉혔다.

앉고 나니 하이힐에 조여졌던 발에 피가 통하며 찌르르한 느낌이 퍼졌다. 사이나는 치마 아래에서 발뒤꿈치를 몰래 빼내며 대답했다.

“음, 친구의 정의가 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요.”

애매한 사이나의 말에 키얼스틴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물었다.

“사야, 네가 아주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고 했을 때, 그걸 아까 그 라임 블론드에게 말할 수 있겠어?”

사이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키얼스틴이 정의하는 친구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란 말인가? 그것도 ‘치명적’인 비밀을?

귀족 사회에 그런 친구 사이가 있단 말이야?

“키키 언니는 그런 친구가 있어요?”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정말 궁금하다고 묻는 그녀를 보며 키얼스틴은 콧김을 마구 내뿜더니 사이나의 볼을 쥐어댔다.

“헛, 아우, 귀여워 진짜.”

살짝 잡았다가 놓았음에도 원체 하얀 피부라 금세 분홍색으로 물들어버렸다.

“그래. 치명적인 비밀까지는 기준이 너무 높네. 그럼 조금 낮춰볼까. 음…….”

“…….”

“아! 네 남자 형제를 이성으로서 소개해줄 수 있겠어?”

엘리자베스를 세이지 오빠나 유리에게?

그럼 내 시누이가 되는 건가?

“…….”

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별로 반기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아냐, 이것도 경우에 따라 다를 것 같아. 음, 그래! 이게 좋겠다.”

“…….”

“너에게 매우 좋은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좋은 일이요?”

“응. 대부분의 영애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그런 일 말이야. 예를 들어…….”

키얼스틴은 턱에 검지를 올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엄청나게 잘생기고 돈도 많고 신분도 좋은 남자와 결혼하게 된 거지!”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즐거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결혼 자체가 회의적인지라 전혀 부러움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상상이 잘 되지도 않았다.

“그래, 크레이머 공작 각하 같은 상대 말이야! 잘생기고 돈 많고 미혼 공작님! 딱이네.”

“…….”

“사야, 만약 네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라임 블론드가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것 같아?”

……예를 들어도 하필 크레이머 공작이라니.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남자가 나와 결혼한다는 가정을 하라고……?’

…저기요?

뭐, 객관적인 조건으로만 따지자면 크레이머 공작과 비교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겠지.

지난 생에 엘리자베스가 ‘그’ 크레이머 공작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어떠했던가.

온 사교계가 뒤집혔었다.

다들 엄청난 축하의 말들을 건네고 난리도 아니었지.

특히 엘리자베스는 친구가 많아서….

‘잠깐.’

…친구가 많아서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는 욕을 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그때 이미 사이나는 조지 홀랜더와 결혼해서 심신이 피폐한 상태였다. 억지로 참석했던 연회마다 구석진 곳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있었던 탓에 의도치 않게 뒷담을 많이 들었다.

‘하, 여우 같은 것.’

‘앞으로는 공작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잖아? 정말 너무 분해!’

‘발데즈 가문 삼녀 따위에게 공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도 너무 속상해요.’

겉으로는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던 사람들이 커튼 뒤에서는 그렇게 욕을 해댔다.

‘나는 어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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