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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29화 (29/233)

29화. 적극적인 당근 요법

첫째, 황가의 핏줄을 품을 수 있는 여자를 찾아내는 것.

헤베타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외비라 정확히 무슨 조건이 필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둘째, 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황자와의 약혼은 곧 황실로 들어가 그와 동침함을 의미했다.

굳이 약혼 상태에서 동침을 해야 하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황가의 피는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기에, 매일매일 동침한다고 해서 회임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선 이유들로 황자의 약혼녀는 한 명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몇 년이 지나도 회임이 되지 않는 경우, 파혼을 한 뒤 새로운 헤베타를 들이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다섯 번째까지 가는 경우는 드문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대에는 유독 후계자를 보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이런 특이성 때문에, 중앙 귀족일수록 딸을 황가로 시집보내지 않았다.

황후가 되는 그 과정이 지나치게 불명확했다.

회임에 실패하여 약혼을 파기할 때 황가에서 나름 큰 보상을 하고 신랑감도 구해주지만, 중앙 귀족은 대부분이 부호였다. 그들에게 금전적 보상은 그다지 큰 메리트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무릅쓰더라도 황후가 되었을 때 권한이 크다면 도박이라도 해보겠지만, 맥페이든 제국에서 황후의 지위는 애석하게도 정치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여러모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다.

‘또 파혼하는 거 아니야?’

사이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 놀랐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 약혼녀와 춤을 추고 있던 황자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

불경한 가정을 하던 중이라 지레 찔린 사이나는 얼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음악이 끝나고, 황자와 약혼녀가 플로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템포가 다른 새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곡이다.

“한 곡 추지.”

크레이머 공작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의 리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본처럼 딱 떨어졌다.

정석과 같은 거리감, 절도 있는 스텝, 우아한 움직임.

‘…근데 뭔가 다른 것 같아.’

이번 춤에서는… 뭐랄까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가 허리를 젖힐 때 꽉 붙잡아오는 아귀의 힘이나, 한 바퀴를 돌 때 축이 되게끔 붙잡는 손에 이상하리만치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그리고 역시 그 눈빛.

온기 하나 없는 것처럼 차갑지만, 마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사람을 울렁이게 하는 집요함이 담긴 눈이다.

사이나가 정말 열아홉이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그런 종류의 눈빛이었다.

“그거 아나?”

“…네?”

춤이 끝나갈 때 즈음 공작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크레이머 영지에 아직 발굴 안 된 유적지가 남아 있는 거?”

“…네?”

“<아를-프로메사> 시절의 유적이다.”

“…진짜요?!”

사이나는 너무 놀라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를-프로메사> 시절의 유적은 얕은 층만 대충 파내도 어마어마한 것들이 쏟아진다고 들었다.

그런 유적이 어떻게 아직까지 보존될 수 있다는 거지?

“아니, 어떻게… 어째서 아직 발굴을 안 했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와, 세상에. 궁금하네요. 미발굴 유적이라니…….”

“관심이 있다면, 구경시켜주겠다.”

“정말이요?”

“그래.”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가, 이내 흠칫했다.

‘당분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기로 해놓고….’

또 이런다.

사이나는 반짝반짝하던 눈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흥미… 롭긴 한데…. 너무 멀고….”

“원한다면 마차와 호위대 일체를 보내도록 하지.”

“…괜히 소문도 무섭고요.”

“…….”

왜 갑자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나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러다 음악이 끝났다.

사이나는 인사를 끝내자마자, 다시 외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공작이 다시금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홀을 돌았다.

“각하?”

두 번 연속으로 같은 상대와 춤이라니, 이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하지 않는 일이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네? 뭐, 뭐에 대해서요?”

당황해서 물었으나, 공작은 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던 그가 말했다.

“그대가, <아를-프로메사>와 아를어에 대해 관심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그렇긴 한데요.”

“모레프, 를 보고 싶지는 않은가?”

“…네?”

“가까이서.”

…가까이서?!

당연히! 보고 싶다!

퍼레이드를 통해 저 멀리서 보는 것과는 엄청 다르겠지?

사이나의 눈동자 안에 지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원한다면.”

‘원한다면’이라니. 그럼, 그냥 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단 말인가?

“보여주신다면, 저야 정말… 감사하고 좋을 것 같지만…….”

“좋을 것 같지만?”

“그 커다란 짐승을 어디서 꺼내시려고요?”

“크기야 조절하면 돼.”

“…정말이요?”

역시 수호령은 신기하다.

퍼레이드에서 본 것이 다인지라, 항상 그 크기인 줄 알았더니!

‘아니,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럼 크레이머 저택으로 가야 하는 거잖아?

굉장히 끌리는 제안이기는 한데, 뭔가 이상하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이유 없는 호의를 겪어본 경험이 별로 없던 그녀인지라,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다. 대귀족은 만남의 기회를 내어주는 그 시간 자체가 금과 같으니.

그런데 그 귀한 시간을 쓰는 것도 모자라 수호령까지 보여준다고…? 왜?

기본적인 의문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겠군.”

그녀의 의문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공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음. 잘 보이고 싶어서.”

“……네?”

또렷하게 그녀를 잡아채오는 곧은 시선에 묶인 채, 사이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흥미가 있다고 했었지. 이게 이성으로 관심이 있다는 뭐, 그런 뜻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사이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라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는데 음악이 끝이 났다.

그는 딱히 당장 어떤 대답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부디, 날 잘 보아주게.”

속삭이듯 귓가에 말을 남기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춤을 마치고 플로어를 벗어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이 제국에는 공작가가 딱 네 개 있지만, 다들 얼굴 보기가 극히 드물다 보니, 한 번씩 이렇게 나타날 때마다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크레이머 공작과 애버딘 공작은 미혼이라 더 그러했다.

‘역시 인기가 대단하네.’

사이나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처 생각 못 한 것은, 사이나에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말을 많이 걸었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어머, 드보프가의 영애지요? 이번에 데뷔한.”

“세상에, 어린 영애들은 이런 색 잘 안 입던데 너무 독특하네요.”

“그러게요. 어린데 벌써 자기 스타일이 확고해요.”

“게다가 잘 어울리고요.”

사이나를 통해 공작과 말을 한 번 섞어 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칭찬의 말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음 곡에 춤을 청해도 될까요?”

“그다음 곡에는 저와 춰주셨으면 합니다.”

춤을 청하기 위해 다가온 알 만한 가문의 영식들도 잔뜩 이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항상 벽의 꽃으로 살아왔기에 이런 과열한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그나마 표정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실례하지만, 잠시 휴게실에 다녀올 참이었어서요.”

처음 한두 번은 춤에 응했으나 신청이 줄을 잇자, 사이나는 휴게실로 도망쳤다.

* * *

아,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입장해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피곤해졌다.

사이나는 여성용 휴게실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드레스 구겨지게 그렇게 털썩 앉으시면 어떻게 해요!”

유모가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한소리 했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털썩 앉은 것도 모자라 사이나는 구두까지 슬쩍 벗으려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었더니 너무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크나큰 실례겠지만 아직 연회 초반이라 그런지 휴게실에는 사이나밖에 없으니… 잠깐, 몰래…….

딸깍.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사이나는 찔끔해서 하이힐에서 막 빠져나오던 발뒤꿈치를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사야?”

사이나는 구두에 부은 발을 꼬물꼬물 밀어 넣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눈앞에 엘리자베스가 서서 환히 웃고 있었다.

“베쓰?”

엘리자베스는 금세 친구를 꽤 사귀었는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일행이 여럿 있었다.

“응. 여기서 만나네? 쉬는 중이었어?”

“어, 응. 발이 좀 아파서.”

“발? 벌써?”

“내가 평소에 하이힐을 잘 안 신어서 그런가 봐.”

“아, 하긴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근데, 그런 거치고는 춤도 잘 추고, 드레스도… 엄청 신경 쓴 것 같은데?”

“음?”

“…이것도 마담 샤를리즈 드레스지?”

“응.”

내가 맞춘 것은 아니지만, 마담 샤를리즈 건 맞으니까.

“……그렇, 구나. 예쁘네.”

엘리자베스의 미소가 어딘가 삐끗해 보였지만 웃는 낯은 여전했다.

엘리자베스는 삼녀다. 발데즈 가문에는 딸만 셋이 있어서, 드레스 비용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그나마 데뷔탕트 볼 드레스는 발데즈 백작이 무리해서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에서 맞춰줬던 거 같은데 파티 드레스까지는 무리였겠지.

“사야, 너에게 아주 잘 어울려.”

엘리자베스는 크게 미소 지으며 칭찬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뭐랄까, 지나치게 화사해서 오히려 가짜 같은 느낌을 풍겼다.

“…고마워.”

“아 참, 소개를 잊었네. 여긴 내가 데뷔하고 나서 알게 된 분들이야. 사야, 넌 내 친구니까 함께 대화라도 나누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연회 초반이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휴게실이 붐빌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따라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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