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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28화 (28/233)

28화. 떨어지고 받아주는 익숙한 구도

그녀가 자신의 차림을 살피는 것을 보더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가?”

“……네?”

“새로 맞출 것을 그랬나? 본래 있던 것을 입었는데… 혹시 티가 나는가?”

“아…. 그, 아니에요. 멋지세요.”

본래 있던 것이라고? 그래…. 흰색과 검은색은 무난한 디자인이지. 저 보라색 행커치프 때문에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

사이나는 문득 저 손수건을 뺏어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출발할까?”

공작은 그녀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세이지가 말을 걸어 온 것은 그때.

“하녀는?”

“응?”

세이지의 얼굴에는 어째 심통이 가득했다. 불만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연회에 동행할 하녀 말이다. 설마 각하와 단둘이 마차를 타려는 건 아니겠지?”

“아, 동행해야지. 유모가 보낸다고 했어.”

주변을 둘러보자 한쪽에 대기 중인 하녀가 보였다.

“스밀라.”

사이나의 전담 하녀 중 한 명인 스밀라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는 루퍼트도 있었다.

호위에 하녀, 파트너까지 동반한 연회라니. 확실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사이나는 대기 중인 마차를 보았다. 드보프가의 마차도 비싼 값을 하는 것이었지만, 확실히 크레이머가의 마차는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좋아 보인다는 느낌을 떠나 어떤 웅장함이랄까.

아니, 그냥 매우, 매우 비싸 보이네.

마차는 온통 검었다.

‘…흑목(黑木)인가?’

흑목으로 만들어진 마차라면, 분명 엄청난 가격일 텐데.

흑목은 특정 지역의 고지대에만 적은 수량으로 자라나는 나무로서, 엄청 튼튼하고 대마수용 보호 기능에 뛰어나다고 들었다.

크레이머 공작은 매번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흰색 제복만 입고 다니는데, 가문의 마차는 저렇게 검으니 상대적으로 묘했다.

사이나는 크레이머가의 마차에 에스코트를 받으며 올라섰다. 금세 그가 맞은편에 앉았고, 스밀라가 올라와 사이나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드보프 백작과 세이지 오라버니는 다른 마차에 탔다.

길이 잘 깔린 황도임을 감안해도 상당히 좋은 마차의 승차감에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사이나는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매번 느끼는 거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숨겨둔 내부 깊은 곳까지 뚫어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자꾸 피부를 간지럽게 하는 미지의 기운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색하면서도, 묘하다.

‘매번 사람을 왜 저리 뚫어져라 본담.’

새삼 장갑을 낀 손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긴장을 해서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사이나는 장갑을 슬그머니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두고는 고개를 돌려 창 바깥을 보는 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의 입구가 보였다.

귀족들은 황도 페이즐의 안쪽에 산다. 유력하고 오래된 귀족일수록 황성과 가까운 곳에 타운 하우스가 있었다.

크레이머 공작의 타운 하우스에 비할 바야 아니겠지만, 드보프 가문도 꽤 역사가 깊다 보니 거리가 멀지 않았다.

크레이머가의 문양을 단 마차는 일말의 정지도 없이 황성 문을 통과했다.

공작가의 마차는 하차 장소도 달랐다. 훨씬 본성에 가까운 곳으로 그만큼 덜 걸어도 되는 거리였다.

새삼 그와의 신분 차가 느껴졌다.

마차가 멈추어 서고 바깥에서 루퍼트가 문을 열어주자, 공작이 먼저 내렸다.

사이나는 다시 장갑을 착용할 시간도 없어 얼른 손에 쥐고 일어섰다.

그가 바깥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이나는 무심결에 그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얹었다가 깜짝 놀랐다.

크레이머 공작의 손이……

‘맨손?’

마치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꼼꼼할 정도로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았나.

생각지도 못한 선명한 피부의 느낌에 당황해서 사이나는 흠칫, 손을 빼버리고 말았다.

높은 마차에서 내리던 중간에 손을 빼버렸으니, 몸이 기우뚱하며 허공에 떠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

사이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자칫 꼴사납게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다행히 공작이 그녀를 붙잡아 주었지만.

균형을 잃은 그녀를 공작은 무슨 어린아이 하나 들어 옮기듯 쉽게 다뤘다.

허리를 감아 든 자세 덕분에, 그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

그 품에서는 이른 아침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깊은 숲에서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냄새가 났다.

그녀의 심장이 어쩐지 쿵쿵거렸다.

“…고맙습니다.”

약간 목소리가 떨려 나왔지만, 사이나는 가까스로 그를 밀었다.

그녀가 밀지 않으면 영영 붙잡고 있을 것 같은 기세다.

“그대는, 자주 떨어지는군.”

“…….”

그러게. 자신은 떨어지고 그는 받아주는 이 구도가, 왜 이리 익숙한가.

여전히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가락 느낌에 사이나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잠깐 사이나는 그를 올려보았다.

느릿하게 장갑을 끼는 동안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던 그가 착용을 마치고 팔꿈치를 접어 내밀었다.

사이나는 무심코 손을 올리려다가 주춤하고는 자신도 장갑을 착용했다.

미리 손의 크기를 재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착 감겨드는 실크의 느낌에 어쩐지 손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선을 비끼듯 눈을 내리깐 사이나는 그의 팔뚝 위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천천히 둘은 회장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 옆에서 대기 중인 시종이 둘의 얼굴을 알아보고 호명했다.

“수호령 모레프의 맹약자, 콘스탄틴 크레이머 공작 각하와 파트너 사이나 드보프 영애 드십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안쪽으로 울려 퍼졌다.

그가 이끄는 대로 안쪽으로 들어선 사이나는 쏟아지는 시선에 잠시 당황했다.

누가 동시에 입을 다물라고 지시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 내려앉은 적막은 숨 막혔고, 꽂혀 드는 시선은 적나라했다.

그녀가 진짜 열아홉이었다면 얼어서 혼이 나가버렸을지도 모르는 과도한 집중.

사이나는 지나간 시간 덕분에 나름 시선에 익숙했다. 좋은 의미의 시선이 아니기는 하지만.

망나니 남편 탓에 받았던 멸시와 동정. 또는 낡은 드레스와 삶에 찌든 분위기 때문에 꺼리는 자들이 보내던 경멸과 무시의 시선이 그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 연회장의 시선은 과한 호기심을 담고 있기는 했으나, 악의는 아니다.

견디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한 사이나의 침착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비쳤다.

“드보프가의 막내딸은 공부에 미쳐 사교계에는 관심도 없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은걸요?”

“그러게요. 저 침착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세요.”

“흑백의 조화가 묘하네요.”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아요. 포인트 색을 보세요. 맞춘 걸까요?”

“어머, 그러네요. 둘이 무슨 사이기에? 설마?”

새하얗게 차려입은 크레이머 공작의 곁, 사이나는 대조적으로 아주 어두운 톤의 차림새였다.

흑발에 드레스까지 어두운 톤으로 입다니 자칫하면 매우 칙칙해 보일 수 있는 차림새였으나, 사이나의 피부 자체가 워낙에 흰 데다 크레이머 공작과 같이 서 있으니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되레 나이답지 않게 진중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가진 여성으로 보였다.

둘을 두고 사람들이 무슨 입방아를 찧는지도 모르고 사이나는 그저, 공작을 따라 연회장으로 내려가 한쪽에 섰다.

분위기를 보아 곧 황가의 식구들이 등장할 것 같았다.

사이나는 물끄러미 서서 홀을 훑어보았다.

별생각 없는 행동이었으나 의외로 아는 얼굴들이 눈에 뜨여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즐거운 얼굴의 키얼스틴과 그 옆에 약간 굳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카이언이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려 했으나, 어쩐지 냉랭한 표정으로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제국의 밤을 지탱하는 달, 샤를로이즈 맥페이든 황후 폐하 드십니다!”

“길리언 맥페이든 황자 전하와 헤베타 일레인 반즈 님 드십니다!”

“매디얼 맥페이든 황녀 전하 드십니다!”

붉은 비로드를 밟으며 황가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번에도 황제는 없었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시오.”

황후의 말에 다 같이 일어섰다.

건국제 첫날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황녀가 참석했다. 이전 삶에서도 황녀는 연회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사이나는 황녀를 살폈다.

‘몸이 약해서 잘 안 나온다는 둥 그런 소문이 있었는데…….’

직접 본 황녀는 매우 건강해보였다. 오히려 황자와 키도 비슷한 것이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고, 활기가 넘치는 인상이라 아픈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이나가 황녀를 몰래몰래 관찰하는 동안, 황후가 짧은 연설을 했고 이내 무도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없어서인지, 연회의 첫 춤은 황자와 그의 약혼녀가 추었다.

사이나는 둘이 춤을 추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저 둘이 결혼을 했던가?’

그리고… 황자가 황태자가 되었던가?

이전 삶에서 그녀는 먹고살기도 바빠서 외부에 관심을 둘 시간이 없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황가의 행사가 기억이 나지 않을 리는 없으니…….

결혼을 하는 것이든 황태자가 되는 것이든,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은 아닌 듯하다.

현재 황자의 약혼녀인 일레인 반즈는 이미 그의 다섯 번째 헤베타다.

헤베타는 황자의 약혼녀에서 황태자비 단계로 가는 여성에게 내리는 일종의 독립 지위이자 신분을 이르는 말이다.

맥페이든 제국의 황자가 황태자가 되는 방법은 살짝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황가에 내려오는 수호령은 제국을 수호한다는 맹약과 함께 황족의 피를 통해 계승된다.

다른 말로 하면 황가의 수호령과의 맹약이 끊어지는 순간 제국의 평화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

그렇다 보니 이 ‘계승’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또 황가가 손이 굉장히 귀하다 보니, 계승의 능력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 황태자 즉위를 위한 필수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계승능력의 증명은 곧 생산능력의 증명.

이 증명과정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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