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만지지 말라는 경고인가요?
그가 왜 제게 파트너 신청을 하는 거지?
사이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택을 방문하는 건이야 수호령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그런 거라고 납득했지만, 종막 연회의 파트너는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왜… 제게?”
어안이 벙벙해져 사이나는 말을 흐렸다.
“흥미가 있어.”
“흥미요?”
“그대에게 말이야.”
흥미라니.
그의 흥미는 그다지 반갑지 않다. 분명 사이나의 주변을 상당히 시끄럽게 하겠지.
그리고 그녀는 그런 것이 싫었다.
사이나의 바람이라 보아야 ‘비혼’인 채 조용히 사는 것이니, 공작과 얽혀 봤자 결코 좋을 게 없다는 건 분명했다.
“…전, 없는데요.”
그러다 보니 말이 자꾸만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
“각하와 파트너를 했다가는, 분명…….”
무슨 사이냐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얼마 안 가 둘이 결혼하네 마네 하는 설레발 치는 소문이 돌 것이다.
그럼 그녀의 ‘비혼’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공작과 잘 안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결론지어지겠지. 이 바닥은 원래 그러니까.
물론 평판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소문으로 인해 모여들 부산스러운 시선이나 번거로움 등이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부족한가?”
“…….”
사이나는 묘한 질문에 놀라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부족하다니. 농담의 일종일까.
“아니요, 그게.”
“하긴, 그대에 비하면 내가 나이가 좀 많겠군.”
“…네?”
그가 몇 살이었더라. 스물여섯? 일곱?
세이지보다는 많을 것이다.
하나 공작의 외모는 젊다 못해 빛이 나는 얼굴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거의 서른까지 살다가 돌아온 탓에 그가 많은 나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별로인가?”
“아뇨.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전혀 생각지도 못해서…….”
“그래. 그럼 얼른 생각해보게.”
공작은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고는 바로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지금요?”
“응. 지금.”
결국 당장 대답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
“싫은 건 아니지?”
“…어, 그렇지만.”
“그럼 데리러 오지.”
싫은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매우 싫습니다!’하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요!
그는, 어딘가 성급하기까지 한 결론을 내고는 아주 살짝, 웃었다.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살짝.
그렇게 얼렁뚱땅, 그녀의 파트너가 정해졌다.
* * *
그리고 시간은 금방 흘렀다.
건국제 마지막 날.
마지막 날 황성 연회는 어차피 참석해야 한다. 황가가 여는 연회니까 참석이 의무에 가깝기도 하고, 귀족이라면 누구나 가려고 하지 빠지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그런 연회였다.
극성인 유모의 지시 아래 아침부터 무지막지하게 또 향유에 절여지던 중, 하녀 한 명이 욕실로 들어왔다.
“집사님께서 찾아오셨는데요.”
“응? 잠시만요, 아가씨. 제가 나갔다가 올게요.”
“집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유모가 후다닥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 여럿이 주르륵 들어왔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커다란 상자들을 들고서 말이다.
“……?”
“세상에. 아가씨께 온 것들이래요!”
“…뭔데?”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다네요!”
“각하께서…?”
사이나가 시선을 주자 하녀들이 그녀가 볼 수 있게 상자를 일제히 열었다.
가장 큰 상자에 들은 것은, 드레스였다. 갑자기 드레스를 왜?
“저번에 망친 드레스의 보상이라고 전하라 하셨어요.”
“에…?”
드레스 상자를 든 하녀의 부연 설명에 사이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건 데뷔용으로 맞춘 거라 다시 입을 일도 없는 드레스였다. 굳이 보상을 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또 다른 상자는 뭐란 말인가. 자연스럽게 돌아간 시선에 잡힌 다른 상자에는….
“……?”
장갑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레이스로 짜인 고급 레이디용 장갑이었다. 그것도 한 가지 색상과 디자인이 아니라,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어울릴 수 있게끔 거의 모든 색상과 디자인이 다 있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의도를 모르겠다. 드레스는 그렇다 치고, 장갑은 대체 왜 주는 거지? 그것도 저렇게 잔뜩…?
전에 자신이 손을 댔을 때 기분이 나쁘기라도 했던 걸까? 오늘 파트너로 다녀야 되는데 절대 맨손으로 만질 생각을 하지도 말아라, 뭐 이런 경고를 돌려서 하는 건가?
“세상에, 너무 예쁘네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유모는 드레스와 장갑들을 보며 반색했다.
사이나는 자신의 맨손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장갑을 흘긋 보았다.
그 외의 상자에는 드레스와 세트로 보이는 구두 및 소품들이 구색에 맞게 들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알고 저것들을 다 맞춰서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얼른 마무리하고 입어보도록 합시다, 아가씨!”
유모는 말 그대로 신이 난 듯 보였다.
욕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몸을 말린 뒤 공작이 보낸 드레스를 시착해 보았다.
어두운 보라색을 베이스로 한 원단에 검은색 레이스로 장식된 드레스였다. 보통 여성에게 잘 선물하지 않을 것 같은 색상의 드레스였지만 사이나에겐 매우 잘 어울렸다.
“너무 예뻐요, 아가씨.”
드레스는 맞춘 듯이 딱 맞았다.
“사이즈를 어찌 알고 이렇게 딱 맞게 보내셨을까?”
그러게. 나도 그게 의문이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아하, 마담 샤를리즈 작품이네요. 아가씨가 그 부티크 고객인 걸 알고 계셨나 봐요.”
마담 샤를리즈라면 사이나에게 어울릴 만한 색감과 디자인을 잘 알고 있지. 여러 의문이 풀렸다.
‘어찌 알고 샤를리즈 부티크에 의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작정하고 알아보려고 하면 또 그렇게 알기 어려운 정보도 아니기는 했다. 가문의 재력이나 작위에 따라 맞춰 입을 수 있는 부티크는 정해져 있는 편이니 말이다.
그가 보낸 드레스에 맞춰 속옷과 언더드레스를 입고 머리 손질, 화장을 모두 끝낸 사이나는 마지막 보석 착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갑자기 드레스를 바꾸게 된 탓에 장신구를 다시 골라야 했다.
“크레이머 공작 각하께서 응접실에 계십니다.”
칼같이 시간을 맞춰 올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아, 금방 내려간다고 말씀드리렴.”
시종에게 말을 전해놓고 사이나는 보석함을 죽 훑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 얼른 골라야겠다.
“아가씨, 드레스 색이 좀 묵직하니 보석은 좀 밝은 게 낫겠지요?”
유모는 루비나 에메랄드로 된 세트를 치우고는,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된 세트와 사파이어 세트 등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이나는 주욱 살피다 상자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커다란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것이 아니라, 작은 다이아몬드가 일렬로 주르르 박힌 스타일의 목걸이였다.
큰 캐럿의 메달이 없어 다른 귀족들이 보면 싸구려라고 욕할 수도 있는 그런 디자인.
하지만 한 줄이 아니라 세 줄로 된 목걸이인 데다, 라피스를 운영하는 드보프 가문이 돈이 없어 저런 목걸이를 하지는 않을 테니 오히려 착용할 수 있는 디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이나에게 굉장히 어울렸다.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과 어두운 계열의 드레스 사이, 사이나의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위에서 그 목걸이는 아주 반짝반짝 빛났다.
“어머, 예쁘네요. 아가씨, 요즘 꾸미는 데 관심이 좀 생기셨나 봐요?”
유모 마르다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사이나의 안목이 내심 미심쩍었는데 막상 대어보니 어울리는 것들을 보며 그녀가 스스로 단장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 같다고 생각한 듯 같았다.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지.’
없는 형편에 그나마 괜찮게 꾸며야 하는 세월이 길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다.
사이나는 짧은 자조를 비춘 뒤, 보석 착용을 마쳤다.
“지금 드레스에 이거 딱인데요. 기왕 각하께서 주셨으니 장갑도 하나 착용해 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사이나의 차림새와 어울리는 장갑을 한 쌍 꺼내어 손에 대어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모였다. 입가의 미소가 지나치게 흐뭇해 보였다.
“그럼, 다녀올게.”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공작이 선물로 준 장갑을 끼고 다시 한번 매무새를 살핀 사이나가 인사했다. 크레이머 공작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가면 우리 아가씨가 제일 예쁠걸요?”
유모는 항상 저랬기에 그녀는 그러려니 했다.
응접실에 있다던 공작은 나와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계단참 아래에 이미 나와 있던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흰색의 제복 차림이었다.
흰색인 데다 어깨 장식까지 달린 차림이다 보니, 유독 어깨가 더 넓어 보인다.
그는 아래에서 아버지, 세이지와 함께 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세이지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자 덩달아서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약간 커진 것 같았다. 눈썹 뼈가 도드라진 탓에 눈이 깊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스윽.
가장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자 자연스럽게 그가 팔을 내밀었다.
정석적인 에스코트 자세에 사이나는 슬며시 손을 올렸다.
옷 위에 살포시 올린 수준임에도 손바닥 아래 그의 팔뚝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어울리는군.”
그녀의 차림새를 살피고는 그가 덧붙였다.
“…드레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각하께서도 멋지….”
오가는 의례적인 칭찬. 그 당연한 말을 하다 말고 사이나는 그의 가슴팍에서 시선이 멈췄다.
평소와 다름없는 흰색 예장 차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뭔가 좀 달랐다.
‘……원래 행커치프를 꽂았었나?’
물론 대부분의 남성들은 연회복에 행커치프를 장식해서 다니는 편이지만, 콘스탄틴은 브레스트 포켓에 꽂아 장식하기보다는 뒷주머니나 앞주머니에 오로지 실용성의 목적으로 소지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녀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저 행커치프가 지금 사이나가 입은 드레스와 같은 빛깔의 보라색 천으로 보인다는 것이랄까.
아니, 행커치프는 포인트 색을 쓰니까 그렇다고 쳐도… 라펠의 외곽과 소매선 끝부분이 다른 옷감으로 장식 처리된 디자인이었는데 그 색이… 검은색이었다.
어두운 보라색과 검은색의 포인트라니.
‘…커플로 맞춘 것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