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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26화 (26/233)

26화. 한 사람만을 위한

남부 와인에 비해 동부 와인은 질이 떨어진다. 그게 정설이었다.

“동부에 렌하임 와이너리라고 있어요. 거기서 제조한 ‘봄날의 장미’ 853년산을 구매하세요. 동부 쪽 와인은 아마 양이 충분할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 동부 와인을 대접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853년에 동부 쪽 날씨가 엄청 좋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동부 와인이라고 다 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랍니다. 빈티지부터 20년 차이가 넘고요. 게다가 853년산은 몇 년 안에 가격이 백 배 이상 오를 거예요. 물량이 있다면 이 기회에 아주 많이 사들이세요.”

갑자기 떠오른 정보였지만, 잘됐다 싶어 구매를 명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전생에 최대한 저렴하면서도 맛은 나쁘지 않은 와인을 찾기 위해 매우 고생했기 때문이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집에 손님을 초대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와인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었다.

그렇다고 친정에 손을 벌릴 수도 없고, 남부 와인은 하나같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동부 쪽 와인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것저것 맛보다가 저 와인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후로 손님 접대할 때 레드 와인 문제는 해결된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입소문이 타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뛰어서 진짜 너무 안타까웠다. 가격이 그리 뛸 줄 알았다면 빚을 내서라도 쟁여두었을 테니 말이다.

“배, 백 배요?”

“제가 책임질 테니 최대한 사들이세요. 아시겠죠?”

“……예.”

말이 백 배지, 현재 워낙에 저평가된 상태라 그 이상일 것이다.

“맛은 걱정 마세요. 원래 내려던 것보다 극찬을 받을 테니. 대신 내놓기 두 시간 전에 미리 크리스탈 병에 담아두세요. 워낙 무거운 와인이라 미리 열어 두어야 맛이 좋더군요. 라벨도 가리는 편이 좋을 테니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긴가민가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맛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 사이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투자 살롱이니 그 부분과 연결시켜서 내면 효과가 더 좋을 것 같네요.”

“아…. 정말 그렇겠군요.”

라벨을 숨기고 맛만으로 투자가치를 증명한다. 그리고 드보프 백작의 명성과 얽히면 와인의 가격이 오르는 시기가 더 당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럼 해결된 거죠?”

“예? 예. 감사합니다. 근데 아가씨,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집사가 놀랍다는 듯, 사이나를 보았다.

그녀는 그저 빙그레 웃고는 돌아서 걸었다.

* * *

크레이머 공작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유모의 닦달에 못 이겨 일찍이 목욕을 하고, 비싼 향유를 잔뜩 발라가며 마사지까지 받았다. 드레스를 고르고 각종 꾸밈을 받느라 오전은 물론 오후 시간까지 잡아먹었다.

드보프 백작이 주체하는 투자 살롱은 이미 시작이 되었을 시간이었다.

사이나는 투자 살롱과 별개로 별관 응접실 하나를 비우고 홀처럼 미리 꾸며놓았다.

드보프 가문의 유산들 중에서 <아를-프로메사>와 연관된 물품들을 계획적으로 배치해 놓아서 일종의 전시회 같은 느낌을 풍겼다.

다과와 차를 비롯해 미리 이것저것 지시해 놓기는 했으나 크레이머 공작이 오기 전에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단 한 명의 방문자라도 그는 공작.

굳이 주의 깊게 밖을 보고 있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도착했다는 것을.

사방이 시끄럽고 뻑적지근해졌으니까 말이다.

집사며 시종들이 모두 긴장한 상태로 포치로 우르르 향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미진한 것이 없나 다시 한번 체크했다.

시종에게 공작이 자신을 찾으면 이리 안내하라고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다.

그는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다.

아버지의 살롱에 먼저 참석을 한다고 해서 꽤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매우 이른 시간에 홀에 나타났다. 마치 예의상 채워야 하는 시간만 딱 채우고 일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어, 벌써 끝나셨나요?”

“살롱도 좋지만 더 중한 목적이 있는지라.”

더 중한 목적이 이곳이겠지…?

대체 무얼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나는 안내자의 역할을 되새기며 침을 꼴깍 삼켰다.

“드보프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럼 우선…….”

짧은 인사와 함께 사이나는 천천히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홀은 분류별로, 연대별로 물품들이 전시된 상태였다. 그림 관련한 자료가 제일 먼저다.

“저도 이번에 관련 자료를 찾다가 깨달았는데요. 보시면 가주들의 초상화 배경색이 어느 시점부터 달라지는 것이 보이시죠?”

“흠, 그렇군.”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린 방이 따로 있으나 가문의 역사가 상당하다 보니 모든 초상화가 다 걸려있지는 않았다.

사이나는 이전의 그림이 보관된 창고를 찾아 하나씩 살폈다. 그러다 새삼 깨달았다.

이건 이전 생에서도 몰랐던 사실이다.

“배경이 이쪽은 좀 더 밝고 위치 차이는 있으나 하나같이 빛무리 같은 형태가 묘사되어 있는데, 어느 시점부터 그냥 어두운 단색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이 시기와 맹약을 잃어버린 시기가 뭔가 연관이 있지 않나 싶어요.”

“단색 배경이 처음 등장한 가주가 몇 대 전인가?”

“정확하지는 않아요. 저도 몰랐는데 중간에 몇 분의 초상화가 존재하지 않더군요. 이름만 남아있어요.”

“흠…?”

“작게는 150여 년 전이고 크게는 200년 전에 끊어진 것 같습니다.”

가주의 초상화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 시기에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이나는 알 수 없었다.

가주의 즉위와 퇴임은 본래 정확한 날짜와 함께 기록으로 내려와야 정상이건만, 이상하게도 이 시기의 기록은 굉장히 모호했다.

따로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야사가 있는지 아버지께 물었으나, 그는 모르겠다고 했다.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주만 알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드보프가의 족보와 관련 서적들 역시 뒤져보았지만 딱히 정확한 정보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나마 족보에는 이름이 남아있었으나, 그 시기에 다들 요절이라도 했던 것인지 활동기가 유독 짧았다.

아버지에게서 장남으로, 장남에게서 차남, 그리고 딸에게 가주의 자리가 한 세대에 지나치게 빈번히 물려진 것을 보아 뭔가 큰일이 있었나 보구나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공작에게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비사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가문 밖의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은 고서들이에요. 상태를 보시면 굉장히 오래된 것부터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것들도 있죠.”

사이나는 타인에게 설명을 해도 상관이 없는 선 내에서 이런저런 물품들을 선보이며 해당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크레이머 공작은 꽤 신중한 눈으로 고서들을 살폈다. 표지나 안쪽에 쓰인 글을 보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아를어를 어느 정도는 읽을 줄 아는 것 같았다.

“궁… 중….”

“궁정 문화와 귀족 문화의 상관관계, 쯤 되겠네요. 해석하면.”

고서라서 지금의 문화와는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공작은 약간 눈을 키우며 사이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드보프가의 따님이 <언약의 시대> 굉장한 팬이라 아를어를 잘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군.”

정확하게 말하면 ‘드보프가의 딸이 귀족 영애답지 않게 쓸데없는 것을 공부하는 데 미쳤다더라.’ 이런 소문을 들은 거겠지.

잘 포장된 공작의 표현이 웃겨서 그녀는 슬쩍 웃었다.

“그런데… 꽤 잘하는 수준은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

“학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그저 관심이 조금 있어서 즐겁게 배우다 보니 어느 정도는 읽고 쓸 수 있지만요.”

아를어에 관한 그녀의 실력은 실제로 그 이상이었으나, 비교할 사람이 없다 보니 사이나는 자신의 실력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다.

그 난해한 고대어를 읽는 것을 넘어 쓸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나, 역시 비교할 바가 없어 몰랐다.

공작은 물끄러미 사이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홀 내부를 스윽 한 번 훑었다.

“이 홀은 누가 이렇게 준비했지?”

“제가요.”

“나 때문에 고생했겠군. 이 정도로 깔끔한 전시라니.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야.”

그랬다. 이건 전시회 수준이었다.

공작 한 사람만을 위한 전시회이기는 했으나, 홀은 종류별로, 시대별로, 굉장히 알아보기 쉽게 물품이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 물품들을 안내하는 안내자의 설명이 능숙하니 말해 무엇 하랴.

“고생은요. 드보프가에서 보여드릴 수 있는 <아를-프로메사> 관련한 자료는 이 정도예요. 궁금증은 좀 풀리셨나요?”

“가문 내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은 편이군. 그렇다고 해도 그 시대에 관한 궁금증을 다 해결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그대의 안내는 완벽했다. 만족할 따름이야.”

“과찬이시네요. 감사합니다.”

공작은 어느 고서의 표지를 장갑 낀 손으로 스윽 훑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과찬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한 것이네.”

담백한 듯, 단호하다. 사이나는 그의 말에 부정하기도, 수긍하기도 이상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덕분에 어색함이 조금은 희석된 것 같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불편했었는데 말이다.

“건국제 종막일, 황실 연회.”

“……?”

“파트너가 있나?”

“…네?”

어느새 그는 고서에서 떨어져 그녀 쪽으로 성큼 다가선 상태였다.

덩치가 워낙에 크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거벽이 생겨난 것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 압박감에 잠시 그가 무엇을 물었는지 잊었다.

“없다면, 그대의 에스코트를 내가 해도 될까?”

“…….”

사이나는 살짝 입을 벌렸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거절인가?”

“아, 그, 음. 아뇨, 파트너는 특별히 생각해 두지는 않았는데요.”

그랬다. 세이지 오라버니와 가거나, 정 안되면 호위기사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앞으로 쏟아져 들어온 편지 중에는 그녀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것들도 많았으나, 사이나가 자신이 꼭 읽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처분하라고 전에 일러둔 것이 있어 모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내가 그날 그대를 데리러 오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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