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난 무해한 짐승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약간 빛이 나는 덩어리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이나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그 움직임을 살폈다.
그것은 굴러다니는 것처럼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후다닥 빠른 속도로 달려 사라졌다.
동쪽 후원 방향이었다.
‘……방금 내가 뭘 본거지?’
사이나는 잠시 그 정체를 고민하다가 동쪽 후원에 있는 ‘싹’이 생각나자 나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저 무언가가 그 싹을 해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한쪽에 걸쳐둔 가운을 잠옷 위에 한 겹 더 둘러 입으며 사이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저택은 쥐죽은 듯 적막해서, 그녀의 발소리가 유독 울렸다.
후원 쪽으로 바로 통하는 후문의 걸쇠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동쪽 후원까지 사이나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걸었다.
유리의 나무 자리에 이를 때까지.
달 밝은 밤이기는 했으나, 높게 자란 나무들의 그늘이 드리운 탓에 싹이 피어난 자리는 어두웠다.
걸음을 재촉하자 점점 그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
울타리가 이상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싹이 잘 자라도록 사방에 쳐둔 울타리 한쪽이 무너진 것 정도는 보였다.
아까의 그것 탓인가?
분하고 짜증 나고 안타까운 마음을 동시에 품으며 사이나는 달려갔다.
그러다가 한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섰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된….”
울타리는 쓰러져 있었으나, 싹은 멀쩡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싹’이 아니었다. 며칠 사이에 어른의 팔뚝 높이만큼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그 작은 식물 바로 옆에 짐승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얌전히 앉아 있다는 점이다.
태어난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크기의 강아지였다.
“…넌 누구니?”
당장 달려들어 물어도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은 작은 강아지라서 사이나는 별 경계심을 느끼지 못하고 가까이 꿇어앉았다.
“네 어미는? 왜 여기 혼자 있을까?”
말을 건다고 강아지가 그 뜻을 알아듣겠느냐마는, 보자마자 호감이 가는 귀여운 짐승인지라 자동적으로 떠들게 되었다.
강아지는 사이나가 손을 내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는 그녀의 손바닥에 정수리를 들이밀며 비벼댔다. 꼬리는 더 흔들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좌우로 세게 흔들렸다.
손바닥에 푸근한 털이 몽실거리며 감겨오는 감촉이 좋았다.
이 강아지는 단번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유리의 나무 자리에서 발견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어미가 없으면 나랑 갈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나의 손바닥 위로 짐승이 뒤뚱거리며 걸어 올라왔다.
“이거 그러겠다는 뜻이지, 응?”
작은 짐승을 들어 품에 안으며 읊조렸다. 사이나는 지금 매우 사심이 가득 찬 상태였다. 당장 어미가 나타나 제 새끼를 달라고 해도 외면하고 싶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괜히 찔려서 사이나는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두 다리는 또 누가 볼세라 서둘러 일어났다.
허둥지둥 강아지를 안고 떠나는 그녀의 뒤로, 울타리가 여전히 쓰러진 상태였지만 그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 * *
그리고 같은 날 아침.
사이나는 같은 침대 위, 머리맡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있다가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짐승을 보고,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만월의 밤이 지나고 잠에서 깨어 낮이 되고 보니 약간의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여전히 짐승은 너무 예뻤지만,
‘그래도 어미가 있으면… 돌려보내는 게 맞겠지…?’
어미로부터 떨어뜨려 놓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로 보였다.
짐승은 사람과 달리 금세 성체가 된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석 달 정도까지는 어미의 젖을 먹고 함께 자라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야 면역력도 높아지고 짐승 세계의 사회성도 배울 수 있다고.
새벽에 주어온 녀석은 고작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많아 봐야 생후 한 달 정도의 크기.
이 녀석의 어미가 어디선가 제 새끼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 같아서 심란해졌다.
“음. 너… 어미한테 돌아갈래?”
나름의 양심을 챙기며 사이나가 강아지에게 물었다. 녀석은 못 알아듣겠다는 듯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며 꼬리나 살랑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하녀가 그녀의 기상 상태를 물었다.
“들어와.”
요즘 사이나의 전담하녀인 스밀라가 웃으며 들어왔다.
“오늘 황도로 이동하시려면 서두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씻으시겠어요? 아니면… 어, 웬 짐승이에요?”
스밀라는 침대 위의 강아지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음, 산책 나갔다가… 내가 데려왔는데.”
“데려오셨다고요? 설마, 키우시려고요?”
“응. 그러고 싶긴 한데, 혹시 주인이 있는 강아지일까?”
“……강아지가 맞기는 해요?”
“강아지처럼 생겼잖아. 강아지 아니면 뭐겠어.”
스밀라는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짐승을 들여다보았다.
짐승은 ‘난 무해해요.’ 어필이라도 하려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하녀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강아지라고 하기엔 뭔가 생김새가 음, 이상한데요. 그리고 개들 중에 눈동자 색이 이런 건 처음 봐요.”
어제는 깜깜해서 잘 몰랐는데, 듣고 보니 눈 색깔이 굉장히 묘했다.
은색 같기도 하고 연보라색 같기도 하고 청색 같기도 한 복합적인 색이었다.
“와, 눈 색깔 엄청 예쁘네.”
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강아지의 꼬리가 더 빠른 속도로 살랑거렸다.
“혹시 저택 내에서 개 키우는 사람 있을까? 새끼 잃어버린 사람 있는지 혹시 알아봐 주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근데 없으면 설마 짐승을 방에서 키우시려는 거예요?”
“응, 왜?”
“유모님이 반대하실 것 같은데요. 아가씨 방에 짐승 냄새가 밸 수도 있고…….”
사이나는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짐승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배변 훈련이 되어 있지도 않을 테니 카펫이나 방 안에 일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이나는 다시 한번 코를 킁킁대며 짐승의 털에 코를 비볐으나,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지나치게 아무 냄새도 안 나서 오히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짐승 특유의 냄새가 조금은 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강아지는 말 그대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린 생물들이 가진 특유의 따끈한 체온이 손을 덥히는 느낌이 아니었더라면, 실체를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
“흠. 우선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개가 있는지부터 알아봐줘.”
어렴풋하게 이것은 자신이 발견한 특별한 짐승이라는 인식이 묘하게 뇌리를 지배 중이기는 했으나, 우선 확인 과정을 거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해. 내가 델본에 다시 올 때까지.”
“예. 지시해 둘게요.”
* * *
사이나는 다시 타운 하우스로 이동했다.
도착해서 시종들에게 자료를 옮기라 지시하고 건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포치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집사가 왔다 갔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뭔가 정신이 없는 듯했다.
‘손님이라도 오나?’
방문할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심히 번잡해 보였다. 드보프가의 사용인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 저렇게 어수선하게 굴 리가 없었다.
사이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옮겼다.
“상회에서는 뭐라든가?”
“한창 성수기라 같은 종류로는 여분이 없다고 합니다.”
“미리미리 바퀴 점검을 했어야지! 허어… 이를 어쩐다.”
집사가 보기 드물게 화를 내며 한 시종을 혼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얼굴이 익숙한 시종 몇과 마부들이 울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사이나 아가씨.”
집사가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델본의 총집사장인 우즈만큼은 아니어도 타운 하우스 관리만 거의 5년 이상을 한 사람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난감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신데요?”
사실 드보프가에는 안주인이 없어서 집사의 일이 꽤 많은 편이었다.
전에는 뭘 몰라서 못했지만, 지금은 그녀도 나름 가문의 안주인으로 산 세월이 있다 보니 도울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다.
“내일 살롱에서 쓸 와인의 양이 부족합니다. 상회에서 싣고 오던 중에 마차 바퀴가 부러지면서 반 이상이 깨져버렸다는군요.”
아, 그래서 시종과 마부들이 저렇게 달달 떨며 눈물짓고 있구나.
“여분은 없고요?”
“지금 황도 전체가 파티와 살롱이 한창인지라 미리 예약해둔 분량이 아니면 살래야 살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저희 지하 창고에는요?”
“물론 와인은 많습니다만, 같은 종류의 와인은 한정되어 있어서요.”
그렇구나. 수십 명에게 각각 다른 와인을 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랬다가는 누구는 비싼 와인, 누구는 싼 와인을 준다며 분명 말이 나올 것이다.
“근데 왜 와인이에요? 주로 남성분들이 오시지 않나요?”
남성 귀족들은 와인보다는 보통 위스키라든지 더 강한 술을 즐기지 않나?
“야회가 아니다 보니 주인님께서 너무 강한 술을 내놓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
아버지는 술 취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해할 만하다.
“원래 내놓으려던 와인은 뭔데요?”
“남부 뒤를랭 와이너리의 ‘햇빛은 찬란하게’ 879년산입니다.”
아, 꽤 고가의 와인이었다. 엄청난 가격은 아니어도 대량으로 접대하기에는 비싼 종류.
그렇다면 살롱을 열 때마다 저 정도 급의 와인을 냈다는 건데, 어지간한 것으로는 대체가 힘들겠는걸.
“후우……. 아가씨도 혹시 좋은 생각이 떠오르시면.”
“남부 말고 동부 쪽 와인을 취급하는 상회 있죠?”
“…예? 그렇기는 하지만 동부 쪽 와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