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24화 (24/233)

24화. 사라진 것이 또 있다

“데이트 신청?”

“…….”

“아니면 교제 신청?!”

“오라버니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레이머 공작과 자신을 남녀 사이로 보다니 이상했다.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사이나의 심정적 느낌으로 크레이머 공작은 여전히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남자’였다.

“다행이군. 우리 사야가 백 배 아깝지.”

세이지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혼 공작에 비해 자신이 아깝다니……. 저 망언이 진심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다고나 할까.

사이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그게 아니면 대체 각하가 널 콕 집어 만나자고 한 목적이 뭐였어?”

“그분도 <아를-프로메사> 관련한 자료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 우리 가문 쪽 관련 자료를 한번 보고 싶으시대.”

“에?”

“수호령을 부리는 분이니 오죽하겠어.”

“그건 굳이 너를 통하지 않고 직접 요청을 넣어도 되는 사항 아니야?”

“음. 내가 아를어랑 그쪽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아시는 것 같았어. 직접 안내를 부탁하시던데?”

“흠…….”

세이지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줘.”

사이나는 투자 살롱에 참석했다가 자료를 보고 가기로 한 일정까지 말해주며 세이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알았다. 그럼 사야, 오늘 파티는?”

“오늘은 안 가.”

“…….”

그녀의 대답에 세이지는 아까 유모가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공작이 다녀간 후, 사이나는 드보프가의 영지, 델본으로 향했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는 거지요?”

“네. 내일 다시 황도로 이동할 거예요.”

루퍼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동안 그가 물었다.

“알겠습니다.”

“경도 푹 쉬어요.”

사이나는 외출복을 갈아입고 바로 서재로 향했다.

본래 저택에서 사이나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시간을 되돌아오고 나서 단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은 장소이기도 했다.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던 만큼, 이상하게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핑계가 생겼다고나 할까.

크레이머 공작 때문에 수호령 관련 자료를 추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 정말 오랜만이네.’

책의 보존을 위해 조절된 광량만 들어오게끔 설계된 서재는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새삼 감회에 젖어 책장 사이를 걸었다. 책 냄새가 폐부에 들이차는 느낌이 좋았다.

이 서재의 책들은 오롯이 그녀의 방식으로 정돈된 상태였다.

열네 살 때 즈음이었나? 그녀는 거의 석 달에 걸쳐서 드보프가 서재에 존재하는 모든 서적의 목록을 작성하고 색인 시스템을 새로이 구축했다.

원하는 책을 하나 찾으려면 이 커다란 서재를 다 뒤져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야별, 제목별로 검색이 가능하게끔 목록도 다 만들었다.

이곳에 출입이 가능한 모든 사람은 서재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책의 이름만 찾으면 된다.

보기 쉽게 작성된 색인이 양피지에 다 적혀 있기에 주르륵 읽고 찾기만 하면 되었다.

제목 옆에는 책이 보관된 위치까지 모두 자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시간 낭비 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또한 서재 안쪽에는 문이 따로 달린 작은 방이 분리되어 잠겨 있었는데, 거긴 희귀서적이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물들만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열쇠는 물론 가주가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드보프가에서는 예외였다.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씀.’

사이나는 주머니에서 금색의 열쇠 하나를 꺼냈다. 가문의 문양과 보석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열쇠였다.

전생에 결혼 때문에 드보프가를 떠나면서 제일 크게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때가 이 열쇠를 아버지께 드리면서였다.

정말 실감이 났다.

「진짜 떠나야 하는 거구나.」

「이제 아를어 공부는 못 하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상념들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가주가 가지고 있어야 할 열쇠를 딸이 갖고 있도록 허락을 해 주었을 만큼, 사이나가 서재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 상실감과 좌절감은 지금 떠올려 봐도 상당했다.

‘결혼이고 뭐고, 정말 끔찍해.’

다시 한번 비혼을 결심하며, 사이나는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거의 항상 잠겨있다시피한 공간이다 보니 바깥 서재에 비해 침체된 공기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냄새도 있었다. 종이와 가죽, 먼지가 뒤섞인 냄새.

의식적으로 걸음을 하지 않으려 하던 공간에 다시 오게 되니 참 좋다.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음을 다잡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머무르게 된다. 사이나에게 서재란 공간은 그랬다.

잠깐 둘러본다고 들어왔다가 몰입해서는 밥시간이 지나도록 몰라서 유모가 데리러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거랑, 이거랑……. 아, 이건 빼고.”

크레이머 공작에게 보여줘도 상관없는 선에서 몇 가지 서적과 자료를 꺼내어 쌓았다.

안쪽 방에도 작은 책상이 있었는데 요즘 그녀가 들어와 보질 않았더니 먼지가 꽤 쌓여있었다.

“어, 이거…….”

책상 위에 곱게 닫혀있는 책 한권이 눈에 익다. 붉은 색 가죽으로 된 장서로 제목은 없지만 앞면에 상당히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책.

“오랜만이네…….”

사이나는 천천히 표지를 쓸며 앞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공용어로 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익숙한 필체. 사이나의 글씨였다.

[수호령과의 대담]

그리고 안쪽은 빼곡한 아를어.

보통 사람들은 한 단락도 읽지 못할 것이다. 제목을 공용어로 적어둔 것도 그저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를어는 뜻글자와 음 글자가 따로 존재했는데, 체계가 굉장히 달라서 익히기가 엄청나게 까다로웠다.

거기다 뜻글자의 경우 같은 모양이어도 요소의 접합 순서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지고는 해서 의미를 알아내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사이나는 전생에 이 책을 거의 반절가량 해석했었다.

중간중간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경우를 우선 제쳐 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석하는 데에도 3년이 넘게 걸렸다.

사실 그 수준만 해도 내로라하는 고대어 석학 수준이었으나, 아무도(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그녀의 실력이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그저 좋아서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쪽에 목차를 적은 종이도 따로 끼워 놨었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제목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기 힘들 것 같아, 해석한 부분까지는 목차를 따로 종이에 적어 끼워놨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러고 보니 번역 노트도 없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해석이 된 부분은 공용어로 적어서 따로 필사를 해 둔 노트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항상 두 권을 같이 책상에 올려놨었는데 원본 서적 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이상하네.”

물론 전생의 일이고, 지금은 이 방에 처음 들어와 보는 것이니 뭔가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사이나의 나이를 기준으로 따지면 여기에 번역본이 있어야 맞다.

그녀가 열넷에 서고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을 발견했고, 그 이후에 해석 작업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게 되며 나머지 반절은 미번역 상태로 방치되었지만, 그래도 반절가량은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오래된 기억이라 뭔가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일까?

‘하지도 않은 해석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다든지…….’

아니다. 그런 것치고는 책의 내용이 대강 기억이 났다.

수백 년 전에 한 남자가 크게 다쳐서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나중에 깨어나서 자신이 겪은 일을 적어 내린 수기문 같은 종류의 서적이었다.

저자는 혼수상태에 빠진 무의식의 기간에 정령계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정령의 일종인 수호령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들이 왜 인간들과 계약을 맺기 시작했는지, 그 계약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적어놓은 것이랄까.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개략적인 내용은 그랬다.

번역에 골몰할 당시만 해도 ‘우와. 이거 다 해석하면 우리 가문도 다시 수호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거 아냐?’ 하며 헛된 꿈에 물들기도 했었지.

비록 뒷부분에 자신이 죽어야 할 운명인데 수호령 덕분에 수명을 연장하여 수백 년을 살았다는 둥 터무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어서 신빙성이 마구 추락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이 정리가 되면 다시 해석 작업을 할 수도 있겠지.

사이나는 다시 책을 얌전히 덮으며 책상 한쪽에 잘 두었다.

그리고 크레이머 공작이 방문했을 때 보여줄 것들을 따로 챙겨서 들고 나왔다.

그 밖에도 창고와 전시관 등에 들러 책 외의 자료까지 이것저것 살피느라 하루를 꼬박 보냈다.

추려진 자료들을 마차에 실으라고 명령한 뒤, 사이나는 침실로 향했다.

내일 일찍, 다시 타운 하우스로 가야 하니 말이다.

* * *

여기저기 뒤적이며 자료를 추리느라 꽤 피곤한 하루를 보낸 사이나는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불현듯 새벽에 깨어났다.

‘…누군가 날 부른 것 같았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아스라한 허전함이 느껴졌는데 영문을 모르겠다.

사이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만월의 밤인지 달이 밝았다. 가려진 곳 하나 없이 별이 빼곡하게 반짝이는 하늘을 보니 구름도 한 점 없는 모양이다.

바람 역시 잔잔한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뭇가지 하나 움직이지 않는 밝은 새벽의 정경은 어쩐지 기묘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

홀린 듯이 바깥을 바라보던 사이나의 시야에 이상한 움직임이 걸린 것은 그때.

어떤 것 하나 미동 없는 세계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눈길을 끌었다.

사이나의 방 바깥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중앙 정원.

정원 조경수들 사이로 무언가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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