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색정적인 치료의 손길
어딘지 모르게 일반인과 다른 분위기, 아니 ‘기운’을 풍겼다.
그녀가 어떻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랬다.
사이나는 조금 더 테이블 앞까지 다가가서 치맛자락을 들며 예를 표했다.
“고결한 맹약의 주인, 크레이머 각하를 뵙습니다.”
“…….”
크레이머 공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 쪽으로 돌아와 의자를 빼주었다.
사이나는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앉았다. 공작이 의자를 넣으며 그녀가 착석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직접 차 세트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찻물을 따랐다. 간단한 티 푸드도 함께 차려졌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망설임 없이 일러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네.”
미혼 남녀 둘의 만남이라 사이나가 열고 들어왔던 문은 열린 채 고정되었다. 그 문을 통해 집사가 나가고 사이나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자 공작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이 남자는 어제부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볼 때마다 눈싸움이라도 걸어오는 것처럼 이렇게 빤히 쳐다본다.
마주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 공작의 눈동자는 지독히 푸르고 깊어서, 매번 빠져들 것처럼 붙잡히곤 했다.
깊은 바다의 심연처럼 그녀를 빨아들이는 기분.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안에서 곧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와서 그녀를 휘감아 끌어들일 것 같았다.
-사야.
흠칫. 사이나는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환청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유리?’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깜빡. 한 번 크게 눈을 감았다가 뜨자, 더 이상의 환청은 없었다.
사이나는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며 찻잔을 들었다.
“이렇게 금방 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각하께서 기다리시는데 당연합니다. 대신 부족한 차림새에 양해 부탁드려요.”
“약속도 없이 온 것은 나이니 기다림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당연한 침묵이다. 공작은 아마도 과묵한 성격인 것 같고, 사이나도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둘이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이나는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공작이 빨리 본론을 끝내고 갔으면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덩치로 일어서자 순식간에 시야가 가득 찼다.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마주 본 자리에 앉아 있던 공작은 테이블을 돌아오더니 한 손으로 의자 하나를 굉장히 가볍게 들어 그녀의 옆쪽에 놓고 앉았다.
그 커다란 덩치가 움직이는데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손.”
그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 공작이 하는 말의 뜻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손.”
“…네?”
공작이 자신의 왼손바닥을 펼치고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어제 데였던 부위를 좀 보고 싶은데.”
“아. 저,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
정말 괜찮았지만, 공작은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왼손바닥을 펼친 채, 그녀를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것이 더 이상의 변명(?)은 들어주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사이나는 머뭇거리며 어제 데였던 오른손을 슬쩍 내밀었다.
손바닥 아래쪽 통통한 부분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 동그랗게 붙은 작은 흔적이 보였다.
본래 피부색과 달라서 눈에 뜨이기는 했으나 크게 데였던 것도 아니고 그 부분을 누르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딱히 아프지 않아서 상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공작은 어제처럼 여전히 장갑을 낀 채였다. 질 좋아 뵈는 사슴 가죽 장갑을 낀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살짝 잡았다.
공작은 시선을 내려 상처 부분을 살피는 듯했다. 작은 상처를 보는데 상당히 고민을 하는 듯한 느낌으로 멈춰 있었다.
사이나는 덩달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다가 그가 그녀의 손끝을 놔주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손가락 끝을 감아쥐며 물리려고 했다.
“가만히.”
공작이 한마디 더 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그는 그녀가 손을 거두어가지 못하도록 잠깐 다시 잡았다가 고정시키고는 천천히 손을 뺐다.
그동안 그는 손이 아니라 눈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새하얀 속눈썹에 휘감긴 파르란 눈동자가 다시금 그녀를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그는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으로 왼쪽의 장갑을 벗고, 왼손으로 오른쪽 장갑을 빼내더니 잘 겹쳐 테이블 한쪽에 올려두었다.
역시 작은 소리도 잘 나지 않는 것이 기묘했다.
‘…암살자 훈련이라도 받은 거 아니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사이 그는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점성이 꽤 높아 보이는 녹푸른 빛의 액체가 출렁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퐁.
마개를 여는 소리가 그나마 컸다. 그리고 그 병을 오른 손에 들더니 그때서야 공작이 시선을 내렸다.
공작의 시선에서 놓이고 나서야 사이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 시야를 내렸다.
공작의 왼손이 정말 기묘하리만치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괜히 사이나까지 잠시 숨을 참았다.
사이나는 동그랗게 살짝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공작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 안쪽 빈 공간으로 들어오더니 손가락을 바깥으로 천천히 밀며 손바닥을 펴도록 만들었다.
서늘한 그의 손가락이 숨이 막힐 정도의 느린 속도로 피부를 쓰는 접촉에 사이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팔뚝부터 목덜미까지 오소소 솜털이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굉장히 묘해서 사이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이나의 손바닥을 다 편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병을 기울였다.
주룩. 점성 높은 액체가 그녀의 손바닥 중앙에 오목하게 고였다.
어여쁜 색깔치고 냄새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낙엽을 태울 때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마구간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흣.”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공작이 자신의 오른손 엄지로 액체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끄덩거리는 액체가 그가 문지르는 경로를 따라 밀리더니 금세 흡수되어 사라졌다.
마시는 용도의 포션과는 좀 달랐다. 처음 보는 종류의 약이었다.
효과는 더 대단했다. 공작이 데였던 부분을 집중해서 문지르자 동그랗게 변색되어 있던 피부의 결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흉터 하나 남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공작의 손가락이 주는 느낌만 아니었다면 그 액체의 신기함을 충분히 즐겼을 테지만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바닥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방금 전의 접촉은 뭐랄까.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색정적이라니…….’
치료를 해주는 손길에 이런 평을 해대는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사이나의 얼굴이 잠시 달아올랐다.
액체는 이미 흡수되어 사라진 지 오래고, 데인 상처도 없었지만 공작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쩐지 심각해서 사이나는 차마 손을 빼내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이 점차 지나치게 의식이 되는 느낌이라 사이나는 입을 열었다.
“저…….”
“…….”
“가, 감사합니다.”
말을 하며 천천히 손을 뺐다. 공작은 사이나의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한참 동안 보더니 다시금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장갑에 끝까지 손가락을 끼워 넣고는 손바닥을 좌악 크게 벌려 착용감을 높이는 행위를 사이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누군가와 닿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그는 반드시 장갑을 끼고 다녀야 한다.
‘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생각이 자꾸 이상한 쪽으로 튀어서 사이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공작은 쓰고 남은 물약의 마개를 닫더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그 옆에 놓았다.
“다쳤을 때 바르는 물약이다. 마시는 용도는 아니니 주의하도록.”
사이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 나았는데요. 괜찮습니다. 비싼 약일 것 같은데…….”
흉터 하나 남지 않고 반들반들해진 피부를 보며 사이나는 말했다. 효과를 보니 정말 비싼 약이 틀림없었다.
“저번에 말괄량이 짓을 보니 앞으로도 필요할 것 같아.”
“…….”
배려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사이나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가 다시 흠흠 하고는 표정을 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공작의 목적은 정말로 약을 주러 왔던 것인 듯, 미련 없이 일어났다.
“모레. 드보프 백작이 투자 살롱을 열지?”
“네, 네? 아, 맞아요.”
“그때 살롱에 잠깐 참석했다가 전에 말했던 볼일을 함께 보고 갔으면 해. 백작에게 그리 전해줄 수 있겠나?”
크레이머 공작가가 투자 조언을 받을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사이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하겠다는 거겠지. 바쁠 것이 분명한 공작의 일정으로 볼 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네. 말씀드리고 준비해 놓을게요.”
따라서 일어나며 사이나는 대답했다.
공작이 떠난다고 시종이 재빠르게 기별을 넣어놨는지, 집사장과 세이지가 로비 홀에 이미 나와 있었다.
“각하, 볼일은 편하게 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방문에 다시 한번 사과하지.”
“별말씀을.”
요즘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달리 드보프가 후계자로서 늠름하게 손님을 배웅하는 세이지의 모습을 보니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공작이 떠나자마자 역시나 바로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뭐였어? 각하께서 왜 오신 건데?”
“별일 아냐.”
“각하께서 직접 여기까지 오셨는데 별일 중에 별일이지 무슨 별일이 아니야. 설마…….”
“……?”
세이지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