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부담스러운 손님이 오셨다
“엉?”
“보고 기준을 삼도록 해. 절대 이렇게 쓰면 안 되는구나, 하고. 차이기 딱 좋다.”
“……읽어도 별 느낌이 없어?”
“흰 사슴이라니. 으, 소름 끼쳐.”
사이나는 편지 말고 이번에는 초대장 쪽을 살폈다. 정말 많았다.
물론 얼마 전까지는 데뷔전이라 초대장을 받을 일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전생에서의 삶을 합쳐보아도 많은 양이었다.
다양하기도 했다. 티 파티부터, 살롱 초대, 야회 초대까지.
거절 답신 쓰는 것만 해도 한참은 걸릴 것 같은 양을 보자 벌써 질리는 기분이다.
테이블 한쪽에 가득 쌓여있는 선물 상자들과 꽃다발, 바구니들도 주욱 한번 훑었다. 소소한 것들부터 돈깨나 썼겠다 싶은 것들도 상당했다.
‘어쩐지… 현실 같지 않네.’
데뷔 이후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선물과 구애라.
지난 생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정말 볼을 상기시킨 채 기뻐서 하나하나 읽어보고 답장을 썼을 것이다.
보내진 초대에 어떻게든 참석하기 위해 애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사이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한때 지나가는 흐름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미 열어 봤으니까 오라버니가 다 보고 적당히 정리해서 답신해줘.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다 싶은 것만 따로 올려 보내주고.”
“으응? 알겠… 어?”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지 마. 특히 사생활 부분은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어.”
사이나는 선물 상자 중 하나를 열어보고는 도로 닫으며 말했다.
“사야, 넌 아직 어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과연 네가 불순한 의도로 들러붙는 놈들을 구분할 수 있을지…….”
정말 어린 사람은 ‘네가 어려서 잘 모를걸.’ 이런 말을 들으면 발끈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이지는 참 잘못된 방향으로 충고를 하고 있었지만, 사이나는 설핏 웃었다.
‘할 말이 없지. 내가 정말 남자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러나 시간이 증명한 사람의 인성은 좀 아는 바가 있다.
완전히 세세한 부분까지는 몰라도 앞서 살아 본 생은 어떤 놈이 피해야 할 놈이고, 어떤 남자는 괜찮더라, 하는 정보를 그녀에게 주었으니까.
뭐, 약간 반칙 같기는 하지만.
“걱정 마. 오라버니랑 아빠가 허락하지 않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 안 할게.”
세이지는 그녀의 말에 놀란 표정이었다.
전생에 아빠와 세이지는 물론 유리까지 얼마나 말렸던가. 하지만 그때 그녀는 다른 선택지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처음으로 참석한 가면무도회.
사이나는 자신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술을 마셨고, 어느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새된 비명 소리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을 땐, 방의 문이 활짝 열린 상태였고 바깥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 상태였다.
「주, 죽은 건가요?」
「피예요, 저거?」
전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당시 누워있던 시트에 엄청나게 커다란 붉은 얼룩이 있었는데 그게 피인 줄 알고 하녀가 소리를 친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고, 사이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겨우 시트나 부여잡고 알몸을 가리며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세상에, 깨어났네요?」
「피가 아니라 와인이었나 봐요.」
「어머, 와인으로 밤새 무얼 했기에.」
하얀 시트에 남은 커다란 붉은 얼룩에서 풍기는 진한 와인 냄새가 불길한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산스러움에 잠에서 깬 남자가 사이나의 우측에서 일어나며 하품을 했고, 좌측에서도 한 명이 더 일어났다.
「모르긴 몰라도 격렬한 밤이었던 건 틀림없는 것 같네요.」
「데뷔만 기다렸나. 어쩜 갓 데뷔한 영애가 저리 난잡하게……. 쯧쯧.」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밤.
그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뿐인데, 사이나의 세상이 뒤집혔다.
그때의 충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그녀는 커다란 마차에 치인 것 같은 느낌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고 추문으로 더러워진 그녀를 조지 홀랜더가 받아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때 곁에서 깨어났던 남자 중 한 명이 조지 홀랜더기는 했지만,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낸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여자와 결혼을 해주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조지 홀랜더가 결혼 내내 지독하게 굴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잘 안다며? 그럼 되지?”
하지만 그렇다고 또 조지 홀랜더 같은 작자와 엮일 수는 없는 노릇.
“그, 그렇지! 하하. 역시 내 동생이야.”
세이지는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난 결혼 안 할 거야. 그냥 우리 가족이랑 살 거라니까?”
“그럼 더 좋고.”
세이지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누르며 기쁘다는 듯 웃었다.
나중에 그녀가 서른씩 먹고 노처녀인 채로 오빠 식구네에 얹혀살아도 저렇게 기뻐할지는 두고 봐야겠네.
‘새언니가 싫어할 수도 있고.’
과년한 남편의 여동생과 한집에서 살고 싶은 부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방에도 작은 영지가 있으니까. 거기 내려가서 아빠랑 살지, 뭐.’
사이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10년을 더 살다가 돌아왔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말이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집사가 어딘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응접실 바깥에 서 있었다.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약속된 객이 있었던가?”
“크레이머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뭐?”
사이나와 세이지 둘 다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나?”
가주가 직접 응대해야 할 수준의 손님인데 세이지에게 온 것을 보고 물었다.
어쨌든 절대 기다리게 할 수 없는 손님인지라 세이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사이나 아가씨를 만나길 청하셨습니다.”
“…….”
“…….”
셋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날 찾았다고? 대체 왜……?’
드보프 저를 찾아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날에 온다고 했는데?
“왜 크레이머 공작 각하께서 널 찾는 거지?”
“…글쎄?”
사이나라고 이유를 알겠는가.
그러나 말했다시피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선 걸음을 옮겼다.
“너, 치장 시간이 더 필요한 거 아니야?”
사이나는 세이지의 말에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화장도 안 했고, 머리 꾸밈도 없다. 장신구 하나 없이 그냥 간편한 실내 드레스 차림.
“아무리 공작 각하시라도 미리 약속도 없이 오셨으니, 어느 정도 기다림은 예상하고 계실 거다.”
귀족 영애의 본격 꾸밈새는 기본 몇 시간이다. 그렇기에 미리 약속이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꾸미지 않은 상태에서는 방 바깥으로조차 안 나오는 영애들도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됐어. 기다리시게 하는 것보다 그냥 가는 게 낫지.”
사이나는 그냥 이대로 가는 것을 택했다.
딱히 예쁘게 보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 만나는데 급히 이것저것 치장했다가 나중에 다시 벗고 정리하는 과정을 떠올리자 매우 귀찮았다.
세이지가 정말 그래도 되겠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분은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시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어.”
“…그건 어떻게 알고?”
“어제 춤췄잖아.”
물론 춤 한 번 췄다고 사람의 성향을 다 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지만, 크레이머 공작은 공작임에 앞서 전사였다.
전생에서도 거의 평생을 전장 아니면 마수 토벌에 쏟으며 살았다.
말도 할 말만 딱 하는 타입. 연회나 모임은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잘 참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면을 조합하면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그것과 별개로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응?”
“하긴, 아니야. 잘 생각했다. 괜히 각하의 마음에 들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크레이머 공작령은 너무 멀어서 안 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세이지가 그녀에 한해 약간 팔불출 같은 면이 있다는 면을 요즘 들어 새삼 알아가고는 있지만 설레발도 적당해야 이해를 하지 않겠는가.
사이나에게 크레이머 공작은 엘리자베스의 남편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런 쪽으로는 전혀 의식이 되지 않았다.
공작은 뒤쪽 정원과 연결된 오픈형 응접실에 안내되어 있었다.
미혼 영애와의 만남을 청한 것이다 보니 이곳으로 안내한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왜 들어가려고 그래?”
그런데 세이지가 당연히 같이 들어갈 것처럼 따라오고 있어서 사이나가 물었다.
“나? 샤프롱……?”
샤프롱 같은 소리하고 있다. 사이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이지를 보았다.
“여기 오픈 응접실이잖아. 시종도 있고.”
“그래도…….”
같이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혹시 그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던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하면 귀찮아진다.
세이지라면 왜 그랬느냐며 이유가 뭐냐며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틀림없었다.
“오라버니. 어제 파티에서 말이야.”
“응?”
“나 일찍 돌아가고 싶어서 찾았는데 없더라? 키키 언니랑 어디 갔었어?”
세이지가 그녀의 말에 갑자기 핏기가 가시는 얼굴을 하더니 눈을 피했다.
“흠흠. 그래, 너도 데뷔를 치렀으니 이런 만남도 경험해 보는 것이 좋겠지.”
“…….”
“널 믿고 이만 갈 테니 이따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주렴.”
세이지는 집사에게 빈틈없는 접대를 부탁하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
혹시나 하고 찔러본 건데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사이나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가 돌아서서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사아아.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두어서 그런지 그녀가 문을 열자 응접실 안쪽에서 맞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번 높이 떴다가 내려앉았다. 휘날리는 머리카락 덕분에 잠시 가려진 시야가 다시 천천히 펼쳐졌다.
멀지 앉은 테이블 옆에 크레이머 공작이 서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라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반대 방향으로 선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
저번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기묘한 기분이다.
‘수호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다 저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