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입막음
“어, 사이나? 여기 없는데?”
갑자기 위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기어코 테라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뭐야. 없어?”
뒤따라 들어섰는지 조지 홀랜더의 목소리와 발소리도 들려왔다.
이러다 저들이 난간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면 영락없이 들키게 생겼다.
게다가 사이나는 ‘그’ 크레이머 공작에게 안겨 있는 상황.
뭔가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었는지 공작의 고개가 슬며시 위쪽으로 향했다.
연초를 물고 있던 입가가 슬며시 벌어지는 것이, 곧이라도 입을 열어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할 것만 같았다.
‘…안 돼요!’
사이나는 잠시 이성을 잃고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말았다.
조지 홀랜더를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남편이 될 남자에게 안겨 있는 상황이기도 해서, 뭔가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급하게 그의 입을 막느라 조심성이 없었다.
“흣.”
그의 입가에 물려있던 연초 끄트머리에 손이 닿아 데고 만 것이다.
툭. 짧아진 연초가 공작의 입에서 떨어졌고 통증에 놀란 사이나의 손도 잠시 떨어졌다.
“영애, 손이.”
그러나 공작의 입에서 말소리가 나오자 사이나는 다시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자꾸 입을 틀어막는 행동에 어이가 없는지 크게 뜨인 공작의 눈동자가 짙었다. 광원이 많지 않은 바깥이라서일까. 새파란 호수 같던 눈동자는 밤이 내린 색이었다.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어?”
“어디, 아래 정원에서?”
하지만 사이나는 자신의 무례를 사과할 틈도 없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귓가에서 다급하게 속삭였다.
“테라스 아래, 안쪽으로. 얼른요.”
공작은 사이나의 결례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그녀의 요청에 따라주었다.
테라스 난간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자마자 머리 바로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도 없잖아? 이 테라스가 확실해?”
“맞는데? 여기 바로 문 앞에서 나랑 눈이 마주쳤다고.”
“술 꽤 마시던데, 착각한 거 아니야?”
“분명히 여기였어. 문도 닫혀 있었잖아.”
“그런데 왜 없어?”
“난들 알아? 정원에 나간 거 아니야?”
“정원을 가도 왜 이쪽으로 가겠어? 당신은 드레스를 입고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야?”
“몰래 은밀히 만날 사람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실은 뒤로 엄청 호박씨 까는 타입인 거 아니야?”
“……사이나는 그런 애 아니야.”
조지 홀랜더의 발언에 사이나는 순간 발끈했으나 엘리자베스가 반박했다.
“벌써 집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애는 원래 파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파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별로 믿기지는 않는데.”
“……다음에 소개해줄게.”
그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다시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투시라도 할 것처럼 위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숨죽이던 사이나는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그간 공작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무심코 돌린 시선에 또렷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 사로잡혀, 사이나는 다시금 숨을 멈췄다.
한밤에 호수의 물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물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일렁거림.
공작의 눈동자가 꼭 그러했다.
-위험해…!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손바닥 아래에 닿은 서늘한 그의 피부 느낌이 굉장히 의식되었다.
특히, 볼록 튀어나와 손바닥을 자극하는 그의 입술의 느낌이, 손등을 간지럽히는 얕은 숨결이…….
그 생경함에 주춤하며 사이나는 그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공작은 굉장히 천천히, 그녀를 땅에 내려주었다. 그 와중에서도 시선은 계속에서 그녀의 눈과 마주한 채였다.
“저….”
“…….”
“가, 감사드립니다. 각하.”
공작은 사이나가 자신의 두 발로 잘 서는지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길게 뻗은 팔이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아까 그의 입에서 떨어진 연초였다.
“드레스가 망가졌군.”
“…네?”
그가 손짓하는 부분에 시선을 따라 내리자 하얀 치맛자락 일부에 작게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연초가 떨어지면서 불똥이 치맛자락 위를 스친 모양이다. 워낙에 얇은 천이라 짧은 화기에도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아…….”
“배상하도록 하지.”
“네?!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거고…….”
“손은 괜찮은가? 좀 볼 수 있을까?”
공작은 손바닥을 펴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커다란 손바닥이 사이나의 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손도 괜찮습니다. 이 역시 제 실수인걸요.”
“확인은 내가 하겠네.”
은근히 단호한 말투에 사이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약간 말린 사이나의 손을 그가 스윽 잡아 펴며 자신의 눈높이 근처로 잡아 올렸다.
아래를 보느라 그가 눈을 내리깐지라 하얀 속눈썹이 또다시 그늘을 드리웠다.
사이나는 이상하리만치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데였군. 흉터가 남을지도 몰라.”
“이 역시 별것 아닌걸요.”
손사래를 치는 그녀를 공작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받아 주신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는데 절 구해 주셨어요.”
사이나는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알면,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말도록 해. 자칫 목이 부러졌을 수도 있다.”
“…….”
틀린 말은 아니다. 하늘을 보며 떨어졌으니까.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을 들으니 괜히 목뒤가 싸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피하다가 죽거나 다치면, 그건 그것대로 또 열 받아 죽을지도…….’
생각해보니 진짜 열 받는다.
워낙에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피하고 봤는데 앞으로도 분명 마주칠 일이 있을 테니 피하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사이나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바쁘실 텐데 그럼 이만.”
이상한 날이었다. 공작 각하씩이나 되는 분과 면대면으로 대화를 이렇게 오래 하다니.
‘아깐 춤까지 추었지.’
조지 홀랜더를 만난 여파로 상당히 기분이 가라앉을 뻔했는데, 공작과의 일을 겪고 나니 어쩐지 다 하찮게 느껴졌다.
‘…돌아가자.’
아침부터 지금까지, 충분히 긴 하루였다. 사이나는 미련 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 * *
“아가씨!”
해가 뜬 지 한참인데도 사이나가 방에서 꼼짝도 안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유모가 찾아왔다.
으윽. 힘찬 유모의 목소리가 불길했다.
사이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자는 척하려 애썼지만 얼마 가지 않아 들통났다.
“안 주무시는 거 다 알거든요.”
“…….”
“얼른 일어나서 준비하셔야죠. 오늘은 낮에 살롱 구경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떠세요?”
사이나는 슬그머니 이불을 내리며 작게 꿍얼거렸다.
“나 오늘은 안 나갈 거야.”
유모는 그녀의 말에 ‘또 집순이 발동이군.’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근래 꽤 무리 무리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죠. 알겠습니다.”
금세 납득해 주어서 다행이다. 사이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외출은 안 하시더라도 1층 응접실은 좀 다녀오세요.”
“왜?”
“어제 우리 아가씨가 어찌나 아름다우셨던지, 곳곳에서 선물을 잔뜩 보내왔더라고요. 후후.”
“…선물?”
“네. 꽃다발도 넘치고요. 정성 들여 쓴 편지들도 잔뜩이었어요. 집사장이 정리해서 올리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직접 보시고 구경 좀 하다가 오세요.”
지난 생에도 데뷔 이후에 선물이 오기는 했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것들이었는데?
사이나 선까지 올라오지도 않았다. 가문 간에 의례차 보낸 선물 수준이라서 행정 쪽에서 다 알아서 처리했었다.
드레스와 파트너를 바꿨더니 이런 것도 바뀌는 걸까.
큰 기대는 없지만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유모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씻고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선물을 모아놨다는 1층 응접실이 가까워지자 이미 사람이 있는지 목소리가 들렸다.
“……영애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이 자식 웃기는 놈이네? 눈먼 놈이 편지는 어떻게 썼대?”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허, 꿈 깨시지.”
“허락만 해주시면 당장에라도 찾아뵙고 싶……. 넌 당장 ‘방문 금지 목록’에 올려주마.”
세이지의 목소리였다.
‘대체 혼자서 뭘 저렇게 꿍얼대면서 씩씩대는 거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세이지가 펼쳐놓은 편지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나는 별생각 없이 하나를 들어 읽었다가 맨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지금… 내 편지를 마음대로 다 열어서 본 거야?”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세이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사, 사야?”
사이나는 세이지 앞에 잔뜩 쌓여있는 편지들을 손으로 슥슥 훑었다. 모두 사이나 앞으로 온 것들이었다.
“이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이야?”
가문 내로 들어온 많은 편지들은 분류 작업 때 자동적으로 어느 정도 검열을 거치기는 한다.
봉투만 봐도 목적이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발신인의 이름이나 인장을 보면 중요도까지 대강 구분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다 열어서 안의 내용까지 다 읽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한 송이 백합 같은 그대의 자태에 저는 눈이 머는 것 같았…….]
그러나 손에 든 편지에서 문득 읽은 문구를 보고 사이나는 바로 인상을 굳히며 편지를 떨궜다.
‘편지의 내용 때문에 내 눈이 멀겠다.’
[……그대는 한 마리의 고고한 흰 사슴 같은…….]
[……처음 본 순간 나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몇 장의 편지를 다 훑어봐도 다 이런 식이었다.
사이나는 펼쳐진 편지지를 대강 던져두고 팔에 오소소 솟아난 닭살을 쓰다듬으며 떨어졌다.
내용을 보고 나니 세이지에게 뭐라고 할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세이지도 저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약간 그녀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오라버니도 여자한테 편지 쓸 때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