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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20화 (20/233)

20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

놀랍게도 조지 홀랜더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으니까.

밀색과 밝은 갈색이 섞인 머리카락에 갈색 눈.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을 금발에 금안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아주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면 금발과 금안으로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빛의 영향일 뿐이다.

착각이라고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얼굴도 사실 못난 것은 아니다. 아니, 꽤 준수한 편이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사이나도 ‘어, 꽤 준수하네.’ 하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거지 같은 결혼 생활을 거치며 사이나는 저 얼굴이 얼마나 악귀같이 보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준수는커녕 미소 짓는 얼굴마저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어, 왜…?!’

음악이 끝나가자, 조지 홀랜더가 어째서인지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불길함을 느낀 사이나는 음악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었다.

‘휴, 휴게실이 어느 쪽이더라?’

어쩐지 뒤에서 조지 홀랜더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설핏 뒤를 보니 역시나였다.

‘대체 왜 따라오는 거야?!’

설마 춤을 청하려는 것일까?

이번 생에서는 안면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전생에도 처음에는 얼마나 무해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마치 악마가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드레스 차림이라 뛸 수도 없는데 보폭의 차이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휴게실 도착 전에 따라잡힐 것 같았다.

‘아, 안 돼!’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걸으며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운 테라스의 커튼이 열려 있음을 발견했다.

뛰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것보다는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다다닥 움직여 테라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문을 쾅 닫고 커튼을 있는 힘껏 당겨서 닫아서 시야를 차단시켰다.

‘이 테라스에는 사람이 있으므로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시를 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조금 새어 나왔다.

‘하아…….’

사실, 그가 춤을 청하면 잠시 쉴 예정이라 죄송하다고 거절을 하면 된다.

그런데 사이나는 그와 그 짧은 대화조차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수치스러운 과거의 편린들이 날것처럼 눈앞에 뿌려졌다.

「하하하!」

「호호호호!」

각양각색의 형태로 얼굴을 가린 채 즐겁게 웃고 즐기던 가면 쓴 사람들.

「아, 머리야…….」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깨어났던 낯선 방.

더 낯선 남자가 누워 있었던 구겨진 침대.

「꺄악! 세상에!」

멍한 뇌리를 찢을 듯 울리던 어떤 여자의 비명 소리.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사람들.

알몸으로 갑작스레 맞닥뜨려야 했던 잔혹한 현실.

그리고 나락.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 재생됨에 따라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면에 깊이 박힌 트라우마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싫어.’

이렇게 금세 보게 될 거라고는 사실 생각 못 했다.

사교계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긴 하겠지, 라는 생각이야 했지만 데뷔탕트 볼에서 바로 볼 거라고는…….

“하….”

그 잠시간 얼굴을 흘깃 본 것만으로도 며칠 치 활동량을 다 끌어다 쓴 기분이다.

사이나는 숨을 몰아쉬며 테라스 한쪽에 놓인 의자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발도 아프고, 타이트한 드레스 때문에 숨 쉬기도 불편했다.

혼자서 추격전의 피해자라도 된 양 도망친 탓에 심장도 혼자 마구 날뛰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정말이다. 집에 가고 싶다.

왜 못 가지?

‘그래, 가자.’

혼자 가면 어떤가.

동행한 하녀가 있으니 말을 남기고 갔다가 마차만 황성으로 다시 보내면 될 것을.

여태까지 고민하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날 연회 빼고는 다 제쳐야지.’

건국제 연회는 일주일간 열린다. 그중 처음 이틀과 마지막 날의 연회는 황성에서 열리지만, 중간 나흘은 황도 귀족 가에서 자유롭게 열렸다.

이 기간 동안 귀족들은 낮에는 음악회나 문학 살롱, 갤러리 등을 열어 예술적 소양을 자랑하는 귀족가를 방문하고 밤에는 야회를 여는 귀족가를 방문하며 밤낮없이 사교의 장을 누볐다.

보통은 건국제 시작 전에 이미 초대장이 다 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첫날은 어디, 둘째 날은 어디, 이런 식으로 일정을 미리 다 짜둔다.

축제 기간의 나흘간 어지간한 유력 귀족 가들은 거의 다 살롱이나 야회를 열기 때문에 경쟁률이 엄청났다.

그러므로 고위 귀족의 참석을 받아 내거나 큰 호응이 있는 살롱이나 파티로 성공한 경우 그 귀족가의 자부심은 엄청 났다.

드보프가야 현재 안주인이 없는 상태였기에 연회를 열지는 않았지만, 건국제 닷샛날에 백작의 주최로 여는 투자 살롱이 있었다.

남성 귀족에게는 축제 기간 동안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살롱 중 하나라고 들었다.

“아를어나 연구하면서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전생처럼 안 살겠다고 나름 노력 중이었지만, 천성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행사는 체질에도 안 맞을뿐더러 정신적인 소모가 상당했다.

“율아…. 네가, 보고 싶어…….”

후우, 짧게 한숨을 쉬며 사이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었다가,

“헉!”

“엇, 영애!”

깜짝 놀라 다시 닫았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뭐야-! 왜?’

테라스 문 바로 앞에 조지 홀랜더가 여전히 서 있었던 것이다.

면전에서 대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대체 왜 저자가 문 앞에 서 있단 말인가.

사이나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저자를 만난 적이 없으니 사실 방금 사이나가 한 행동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뭘 어쩌랴.

머리로는 알지만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잘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나가야 하는데…….’

아직도 밖에 있으면 어쩌지?

사이나는 숨을 고르다가 커튼을 아주 약간만 열어 바깥을 살폈다.

아까는 그저 조지 홀랜더가 비어있는 테라스를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가정은 오산이었다.

슬며시 내다본 바깥에는 여전히 조지 홀랜더가 있었다.

아까보다는 몇 걸음 더 떨어진 위치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테라스를 나서면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그 정도의 거리.

게다가 엘리자베스도 있었다. 둘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태였는데, 엘리자베스가 테라스 쪽으로 먼저 걸음을 떼더니 조지 홀랜더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라’는 듯한 손짓을.

“왜? 왜!”

지금 자신에게 저 자식을 소개라도 시켜주려고 그러는 걸까? 엘리자베스의 파트너니까?

‘하……. 진짜 싫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엘리자베스가 그를 소개해줬었지. 좋은 사람이라며…….

나중에 사이나가 조지 홀랜더와 급히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언급하길 둘이 좋은 감정으로 약혼까지 말이 오가던 사이라고 했다.

졸지에 친구의 약혼자를 뺏어 결혼하게 된지라 엘리자베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이후에 엘리자베스가 조지 홀랜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사이나는 진심으로 축복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며 감사했었다.

물론 사이나도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베쓰는 차라리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라고.

사이나가 아니었다면, 엘리자베스가 그 개새끼 중에서도 개새끼인 조지 홀랜더와 결혼했겠지.

엘리자베스의 인생에 드리웠을 먹구름을 사이나가 치워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고 그리 자조한 적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모든 것은 결국 사이나의 잘못이었고,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한들 바뀌는 것은 없으니 그저 삶을 감내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을.

사이나는 그리 살다가, 그리 죽었다.

‘이번 생은 아니야!’

그렇다고 그 감내하는 삶을 또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축복처럼 되돌려진 삶에 또다시 ‘조지 홀랜더’라는 구정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절대, 엮이지 않을 것이다.

사이나는 빠른 속도로 주변을 살피고는 테라스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으로 못 나가는 상황이니 다른 쪽으로 가는 수밖에.

넓게 퍼진 치맛자락이 거동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이나는 치마를 당겨 손에 안고 테라스 난간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섰다.

생각보다 높다. 난간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닥까지의 높이가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연회홀은 1층이지만 정문에서 계단을 꽤 밟고 올라오는 구조라서 높이로만 보면 거의 1.5층쯤 되었다.

테라스 바깥쪽은 정원인지라 바닥에 잔디가 깔려 있었다. 그나마 맨땅보다는 푹신하기에 떨어져도 덜 다치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너무 높았다.

‘우선 난간 반대쪽으로 넘어갔다가 천천히 아래로 타고 내려가야겠다.’

그러다가 적당한 높이가 되면 손을 놓아 착지하면 되겠지.

“으앗!”

…물론, 서두르다가 치맛자락을 밟으며 균형을 잃지 않았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계획이었으리라.

천천히 내려가기는커녕 사이나는 자칫하면 목이 부러질 형편없는 각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뒤로 떨어진 탓에 심각하게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털썩.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예감하여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아픈 곳이 없었다. 특별히 몸에 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고.

‘…연초 냄새?’

게다가 옅은 연초 냄새와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

깜짝 놀랐다.

‘…공작님?’

설마 그가 여기에 있다가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준 건가?

피던 연초를 입에 문 채로 얼결에 그녀를 받아냈는지 하얀 연기가 벌린 입 틈새로 몽글몽글 새어 나와 흩어졌다.

이런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에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사이나는 정신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

그리고 바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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