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설마 수작 걸고 있는 건가?
“그대가 안내해 주길 바라.”
“…….”
“기대하지.”
그리고 나서야 그의 손이 사이나의 허리를 놓아 주었다.
…당황스럽다.
하지만 공작이 한 걸음 물러서며 춤이 끝난 파트너에게 보내는 예를 표하자, 그녀도 뭐라 되묻지 못하고 치맛단을 들며 마주 인사했다.
성큼 몸을 돌려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에 골치가 아파져 오는 느낌이다.
‘-저기요? 대체 왜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사이나는 애써 참으며 시선을 돌렸다.
갈 테다. 가버릴 테다.
세이지를 찾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훑던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크레이머 공작님 취향이 청초한 타입이었나 보네요.”
“그러게요. 연회에서 춤이라니.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근래 계속 육감적인 미인들이 대세였죠. 애크로이드 영애 같은…….”
“호호. 시류가 바뀌려나요. 올해는 데뷔탕트 볼도 볼 만하네요.”
공작과 춤을 추던 순간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다른 생각을 못 했는데, 떨어지고 나니 완전히 가십의 먹잇감 그 자체가 되고만 자신의 입장이 느껴졌다.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 곧이라도 사람들이 다가와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할 것 같아 자리를 얼른 뜨고 싶었다.
‘세이지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사이나는 매섭게 주변을 살폈다.
‘아, 찾았다.’
드디어 세이지를 찾은 사이나가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춰 섰다.
세이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는 표정을 하며 플로어로 나서고 있었다. 키얼스틴을 에스코트하며 말이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쪽도 파트너지.’
세이지 입장은 생각도 못 하고 집에 가자고 조를 뻔했다.
그녀가 카이언과 파트너가 되면서 키얼스틴 역시 파트너를 바꾸게 된 건데 그녀에게도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
‘아버지는?’
사이나는 급히 방향을 선회해 드보프 백작을 찾았다.
휘휘 돌려진 시선에 금세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사이나는 후다닥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내 딸. 오늘 너무 예쁘더구나.”
“아버지, 보셨어요?”
“그럼. 두 곡 연속 눈도 안 떼고 보았다.”
크흠. 두 곡 모두 보실 줄이야…….
“그나저나…….”
“……?”
“요즘 대체 왜 아버지라고 부르느냐. 그런 호칭은 아직 이르다.”
“…네?”
전생에 결혼 이후로 아빠라는 호칭을 거의 쓰지 않았다.
가족과 단절된 느낌이 들었고,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어쩐지 허가 찔린 기분이다.
“데뷔할 나이라고 서둘러 어른이 될 필요는 없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사이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고작 열아홉. 몇 살을 더 먹은들 넌 내게 어린 딸이다.”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살포시 정수리 위에 얹은 아버지의 손이 따뜻했다.
사이나는 울컥했다. 자신이 왜 아버지를 찾아왔는지조차 잠시 잊었다.
맞다. 그랬다.
몇 살 더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은 만큼 훅 자라나 문제를 해결하고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개척하게 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행에 조금 더 무뎌지고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가 늘어났을 뿐.
죽을 때까지도 그녀는 살아지니 산 것이지 자신이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이가 없어서 그랬을까?
전생에 사이나는 아이가 없었다. 그 문제로도 고생을 엄청 했다.
시부모의 비난과 남편의 패악을 함께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그나마 사생아를 데리고 와서 입적시켜 키우라고 강요하지는 않아서 부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는 지켜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계집질을 하고 다녔음에도 사생아 하나 없는 것은 피임을 잘하고 다녀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놈의 생식 능력 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 인격으로 보아 여자를 배려해 피임을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놈의 자식은 낳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마저도 남편은 그녀의 탓을 했었다.
‘아이가 생겨야 어른이 되는 거라면,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는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
결혼은 한 번의 경험이면 됐다. 충분하다 못해 치가 떨렸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생겨나지 않는 이상, 그녀는 그저 잊힌 듯 살다 가고 싶었다.
가문에서 약간의 원조만 해준다면 지방 영지로 내려가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나 하고 살 참이었다.
하나, 지금은 열아홉.
아버지의 말씀대로 현재 자신은 고작 열아홉 살이니, 조금은 더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은 거겠지?
“자, 따라 해보렴. 아. 빠.”
뭐, 그렇게 생각을 했음에도,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아버지의 눈빛을 보니 말문이 막혀 왔지만.
“아….”
“…….”
이 짧은 단어가 뭐라고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흐흠. 아, 아… 빠?”
마침내 작게 나온 단어에 아버지의 입매가 길게 둥글렸다.
그 표정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입가에 지어진 저 미소가 아직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 사이나는 또 울컥해졌다.
“잘했다. 우리 사야. 시집은 최대한 늦게 가자? 아빠랑 오래 같이 살아야지.”
“…시집 안 가고 아빠랑 계속 살래요.”
“그럼 금상첨화지. 킬킬.”
아버지가 예뻐 죽겠다는 듯 사이나의 이마를 슬슬 쓸었다.
“쯧쯧. 방정맞은 웃음소리 보소.”
그때, 옆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제이슨 자네로군.”
제이슨 애크로이드 후작이었다.
위스키 잔을 들고 선 적발의 중년. 외모가 카이언과 판박이였다. 카이언이 저 나이쯤 되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후작 각하. 사이나 드보프가 인사드립니다.”
사이나는 치마를 들며 후작에게 인사했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더니 드보프 백작에게 놀리듯 말했다.
“아빠랑 평생 살래요~ 이런 말 하는 딸이 제일 일찍 시집가는 거 모르나? 진리지, 진리야.”
후작과 백작 사이지만 영지가 인접해서인지 평어를 쓸 정도로 둘은 꽤 친했다.
“내 딸은 안 그래. 걱정 마시지.”
“딸바보가 시집 일찍 보내고 질질 짜는 것도 볼만하겠군.”
“흠. 자네 딸이 3년 전 데뷔할 적에 영식들이랑 춤을 열 번도 넘게 추고선, 자네와는 한 곡도 안 춰줬다며 질질 짜던 것처럼 말인가?”
“…….”
사이나는 갑자기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것 같아 눈을 깜빡거렸다.
“크흠. 아차, 향신료 수입 건 때문에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않나? 자네 딸의 첫 춤도 끝났으니 자, 가세!”
애크로이드 후작이 급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드보프 백작을 잡아끌었다.
“뭐, 뭐야?”
“길랑 자작도 그 이야기 들으려고 아까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다네!”
애크로이드 후작은 드보프 백작을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핫, 그러고 보니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러 아버지, 아니 아빠께 온 거였는데.
낭패다.
사이나는 난감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아빠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 세이지도 한 번 더 보았다.
어느새 시작된 음악에 춤이 한창이었다. 억지로 끌려 나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놓고는 지금 보니 푹 빠진 것 같다.
‘키키 언니가 미인이기는 하지.’
유리가 있었다면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그녀의 기분을 알아챘을 텐데.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한 것은 사이나였지만 세이지의 바보 같은 얼굴을 보자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혼자서 가문의 마차를 빼서 가버릴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
“저, 영애님?”
“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청회색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꽤 잘생긴 청년이었다.
“저는 메스번 자작가의 제이미입니다. 다음 곡, 춤을 청해도 될까요?”
“…아, 네.”
현재, 그녀는 옆에 가족도 파트너도 없는 상태였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영식들이 잔뜩 다가와 춤을 청하기 딱 좋은 상태라는 말과도 같았다.
사이나는 딱 잘라 거절을 하기가 좀 그래서 허락하기는 했는데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좀 어색했다.
자신에게 춤을 청한 이 영식이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책만 열심히 읽을 것같이 생겼는데 한 남작가 영애에게 반해 열렬하게 따라다니며 구애해서 결혼까지 성공했다.
그 구애 방식이 열렬하다 못해 요란하기까지 해서 꽤 크게 소문이 났었다.
귀족 세계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가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 상당히 유명한 사건이었다.
‘전생에 첫 아이로 딸을 낳았다는 소식까지는 들었었는데,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겠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계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인연은 아마도 다시 연결되겠지.
당장에 그는 그녀에게 아주 친근하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려 노력하고 있으나, 어쩐지 임자 있는 남자 같은 느낌이 들어 감흥이 생기질 않았다.
이후로도 사이나는 각각 다른 남자와 네 곡이나 더 춤을 추어야 했다.
세이지는 그 사이에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이젠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았다.
‘거참, 이 양반. 파트너를 바꾸자고 안 했으면 아주 큰일 날 뻔했네!’
연이은 춤에 사이나는 지친 상태였다. 더 이상은 못 출 것 같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춤을 추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피곤했다.
사이나는 이번 곡이 끝나면 휴게실로 가서 쉬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추고 있는 곡이 끝나갈 때 즈음.
사이나는 플로어 바깥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뭐, 뭐야?!’
조지 홀랜더.
전남편이었던 개자식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윙크를 하며 미소를 지어왔다.
사이나의 등 뒤로 쭈뼛, 한기가 흘렀다.
‘왜 저래……?’
…설마 지금 자신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