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헛것이 보인다
속박 같은 시선을 계속 마주하고 있기엔 내공이 부족했다.
사이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속으로는 크게 한숨이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게다가 먼저 춤을 청할 정도면 뭔가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말도 없다.
묵묵히 춤을 추려니 나무토막으로 변신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공작의 춤 솜씨로 봐서는 그녀가 나무토막 그 자체여도 유려하게 리드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르륵.
‘……?’
그 와중에 사이나는 또 잠시 헛것이 보였다.
‘검은… 날개? …뭐지?’
공작의 등 뒤로 아주 희미하지만 반투명한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이 일렁였다.
그것도 모자라 그 덩어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이나는 눈살을 가늘게 하며 그 부분을 노려보았다.
덩어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다니. 시간을 되돌아오면서 어딘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 뭐가 보이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공작의 어깨 너머 허공을 보고 있던 사이나는 묵직한 저음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말투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네, 네?”
“내 등 뒤에, 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아… 뇨. 그냥, 긴장이 되어서요.”
‘무슨 검은 덩어리 같은 게 일렁거리는데 저랑 눈이 마주쳤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이나는 대강 얼버무렸다.
어느 정도 긴장감이 가라앉자 사이나는 현재 자신이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춤의 순서가 끝나고 누구나 자유롭게 출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어에 나와 있는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로어 외곽에 서서 공작과 그녀를 관찰 중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크레이머 공작이 황도에 와서 누군가와 춤을 췄다는 이야기는 사이나 역시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 얼마나 희귀한 광경일지.
원하지 않는 엄청난 주목을 사이나에게 안겨준 공작이 불만스러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약간의 투정이 묻은 질문이 갑자기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저한테 왜 춤을 청하신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사이나는 그가 공작이라서 부담스러운 것과 별개로 이렇게 가까이 있자니 심정적으로 불편함이 있었다.
그는, 그는…….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는걸!’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스스로 느끼는 심리적인 거북함은 어쩔 수가 없다.
저도 모르게 자꾸 엘리자베스가 있는 쪽을 흘끔흘끔 보게 되니 말이다. 사이나를 보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이(왜인지는 모르지만) 별로 좋지 않은 것도 괜히 찔렸다.
“몇 가지… 좀 묻고 싶은데.”
“네? 아. 물어보세요.”
공작이 사이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자, ‘아, 다행이야. 뭔가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사이나는 뭐든 가능하면 다 대답을 해주고 얼른 그와 멀어지고 싶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얼른 물어보세요,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망졸망 바라보는 사이나의 얼굴을 묘하게 내려다보며 공작이 입을 열었다.
“…드보프가는 <아를-프로메사>에 연이 닿아 있는 가문인가?”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든 물어보라고 했으나, 이런 질문은 예상치 못했다.
“네? 그게 무슨…….”
<아를-프로메사>에 연이 닿아 있냐고?
그게 무슨 뜻이지?
“다르게 묻지. 드보프가도 상당히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고 있어. 그대의 선조 중에 맹약자가 있었을 터. 맞나?”
수호령의 힘을 소유한 적 있는 가문이냐는 뜻이었구나.
“아, 네. 맞아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사실, 귀족의 계보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보프 가문은 거의 건국 초기부터 존재했고 그 당시만 해도 백작가 이상에는 수호령이 없는 가문이 더 드물었다고 한다.
드보프가의 대단한 점은, 그 긴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크게 쇠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백작에서 더 높이 승작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공적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의 공적이라면 리스크도 그만큼 큰 법이다.
드보프가는 백작가에 만족했고 다른 방향으로 힘을 쌓았다. 그 결과 현재 드보프가는 무시하기 힘든 가문 중 하나였다.
‘바로 앞에 4대 공작 가문의 가주께서 계시니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인지 드보프 가문에는 오랫동안 쌓인 고문서, 골동품, 자료 등이 아주 많았다.
기나긴 시간 동안 쌓인 유산들이 흩어질 일이 없이 계속 상속되어 내려와서 그렇다.
가문을 몇십 년간 다스린 총집사장조차 용도를 모르는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사이나가 어릴 때부터 저택과 영지를 두루 탐험하며 놀다가 그것에 빠져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맹약의 힘은 언제까지 이어졌지?”
“수호령의 전승이 끊긴 것이 언제냐는 말씀이죠?”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체 왜 이런 것을 묻는지는 모르겠으나, 딱히 가문에 해가 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아서 사이나는 대답했다.
아직까지 수호령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니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딱 집어 어떤 수호령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수호령의 특성상 일인 전승이 보통이니까, 맹약자를 잃어버리며 함께 잊혀져버린 거겠죠.”
“그렇지.”
“한 3-4대 전쯤이 아닐까 추측해요.”
“…다른 가문들에 비하면 꽤 오랫동안 전승되었군.”
3-4대만 해도 이미 백 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그러나 맥페이든 제국이 벌써 천년 가까이 유지되어 오고 있으니 공작의 말이 맞았다. 제국력 500년쯤 되었을 때 이미 남아있는 수호령이 100도 되지 않았다는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다.
드보프가는 그보다 한참을 더 유지시켰으니 오랫동안 전승된 것은 맞다.
‘눈앞에 아직도 맹약자인 장본인이 있기는 하지만.’
정확히는 몰라도 드보프 가문의 수호령은 전투 계열의 수호령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전투 계열이었다면 드보프 가문이 이토록 큰 굴곡 없이 가문을 지탱해오지는 못했을 것 같다.
4대 공작가처럼 살아남았던지 아예 망해 버렸던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네. 그렇지만 지금은 지나간 일일 뿐이죠.”
음악이 끝나간다. 이 불편한 시간도 끝나간다.
사이나는 차라리 반가웠다.
데뷔 절차도 끝났으니 아예 떠나도 상관없겠지.
이 춤이 끝나자마자 세이지 오라버니를 닦달해서 집으로 가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공작도 자신과 춤을 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자신에게 볼일이 없으리라.
“드보프가에 방문을 해도 될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녀의 예상을 세게 후려치는 대사가 공작으로부터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네?”
그럼에도 사이나는 되물었다. 그만큼, 잘못 들었나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폐가 아니라면 말이야.”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방문한다는데 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쓸데없이 번잡한 환경은 사절인데 이 사람은 왜 자꾸 이런단 말인가.
그래서인지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사이나는 대뜸 물었다.
“대체 왜요?”
“…….”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묻기는 했는데, 좀 아차 싶었다.
너무 무례했나? 불만이 지나치게 그대로 표출되어버린 것 같다.
사이나는 반쯤 집 나간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내리깔았다. 덩달아 목소리도 함께 내리깔았다.
“각하께서… 드보프가에 오실 일이 무언지 감히 추측도 가지 않네요.”
작위적일 정도로 심히 공손해진 말투로 그녀가 추가 발언을 하자 공작의 표정이 다시 한번 묘해졌다.
약간 민망함을 느꼈으나, 어쩌랴. 사이나는 모른척했다.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야. 그저 사적인 호기심으로 인한 것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사적인 호기심이라 하심은……?”
“드보프 가문의 수호령 관련 자료를 좀 보고 싶은데. 물론 가주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말이야.”
“아…….”
쓸데없는 고민을 했음에 사이나는 살짝 멋쩍어졌다.
왜 갑자기 드보프 가문에 관심을 갖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까처럼 ‘수호령 보유자니까 그런 거겠지.’ 하고 이해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따로 서신을 보내실 거예요. 거기에 맞춰 방문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휘익.
이번 음악은 여자가 한껏 허리를 뒤로 젖히면, 남자가 그것을 지탱하며 내려다보는 자세로 마무리되는 춤이었다.
이 춤을 배울 적에 사이나는 마무리에서 몇 번이고 뒤로 자빠지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 더 뻣뻣해지고 척추가 부들거렸다.
그런데 공작과의 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쉽게 그녀를 뒤로 젖히고 왼팔로 그 무게를 지탱했다. 얼핏 보기에 고작 작은 물건 하나를 받쳐 들고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가 조금만 삐끗해도 뒤통수부터 쿵 떨어질 각도이건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 사이나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러나 각도상 그의 얼굴을 평행하게 올려다봐야 하는 자세는 매우 불편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숙여진 각도 탓에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에 파란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파인 등에 닿은 공작의 손바닥 형태가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공작이 착용한 장갑의 가죽 때문인지, 등 쪽 맨살 피부를 통해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사이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
그런 사이나의 모습을 본 공작의 하얗고 숱 많은 속눈썹이 내리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나며, 그 짧은 순간, 공작의 시선이 그녀를 핥아 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가 매우 느리고 선명해서 시간이 늘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사이나는 순식간에 일으켜 세워졌다.
음악이 끝났다.
공작은 리드는 대단했다. 어떤 어수룩하고 목각인형 같은 사람과 춤을 추어도 그는 완벽한 합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온 사이나가 잠시 짧게 숨을 들이쉬고는 마무리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나, 단단한 손이 여전히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