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인간 교본 춤꾼의 실력
엘리자베스도 사람이니 당연히 항상 웃기만 하지는 않았다. 가끔 삐져서 뾰로통할 때도 있었고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차갑다 못해 한기가 돌 것 같은 그 얼굴에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금세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사이나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착각이었나?’
빠밤-!
“황후 폐하 드십니다!”
“황자 전하와 헤베타님 드십니다!”
혼란함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사이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건국제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황가의 등장이다. 올해 건국제는 황제가 아니라 황후가 대신 개회사를 여는 것 같다.
“……황제 폐하의 선정 아래 올해도 무탈하였소. 비록 작년부터 이어지는 마수의 범람이 지속되는 중이나 네 공작의 제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아오. 그 공로를 이 자리를 빌려 짧게나마 치하하는 바이며……”
사이나는 개회사를 하는 황후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전 생을 떠올렸다.
황가 역시 수호령의 계승가문으로, 내년에 현 황제의 승하(昇遐)라는 아주 큰 사건이 일어난다.
황제 대신 황후가 공식 행사에서 개회사를 하는 것과 그런 일련의 흐름을 조합해봤을 때, 현 황제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라고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 황가의 수호령은 어떻게 계승되는 거지?’
이전 생에 황가의 계승이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리려 사이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세대를 이끌어갈 여러분 자녀들의 데뷔를 축하하오.”
그사이에 개회사를 마친 황후가 플로어에 선 데뷔자들을 둘러보았다.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수호령의 힘을 숭상하는 제국답게 마지막 말은 그에 관련한 축언이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축복에 관한 바람.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황후의 말을 받아 참석자들도 고개를 숙이며 축언을 되돌렸다. 황가와 함께하는 수호의 힘이 영원하여 제국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답언이었다.
“첫 춤을 열라.”
황후의 선언과 함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일반 참석자들이 몸을 뒤로 물리며 댄스플로어를 더 넓게 만들어주었다.
데뷔자들은 파트너의 손을 잡으며 플로어에서 자리 잡으며 첫 춤을 추기 위해 준비 자세를 취했다.
사이나도 한쪽 손은 카이언의 손 위에, 다른 손은 그의 팔뚝 위로 얹으며 마주 보았다.
카이언의 오른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잡아 왔다.
“사이나.”
“응?”
음악에 맞춰 둘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오늘… 예쁘다.”
뜬금없는 칭찬에 사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지한 표정인데 어딘가 어색해하는 기색이 같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짧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너도 오늘 멋져.”
사이나는 이전 생에서 가족 외의 남자에게 ‘예쁘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했던 사람들은 가족 아니면 유모, 드보프가의 하녀들이 다였다.
그래서 카이언의 말에 약간 부끄러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파트너니까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사이나는 자신이 죽을 무렵의 모습이 굉장히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안색이며 살결 등이 거칠기 짝이 없어서 스스로 보기에도 끔찍한 형상이었다.
‘젊음’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젊은 사람에게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저 나이 때는 화장 안 해도 예뻐.’
‘안 하는 게 더 예뻐.’
‘맨얼굴도 예뻐.’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삶의 암흑기를 거치며 살다 돌아오니 사이나도 그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시간을 돌려 다시 갖게 된 열아홉은 그 자체가 가진 싱그러움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나 스스로 ‘나는 미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키키 언니나 베쓰 같은 사람이 진짜 미인이지.’
그에 비하면 자신은 머리 색도 어둡고 그냥 수수한 편이었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눈을 보면 이따금 예쁘게 보일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도, 사랑스러운 애교도 없다.
전남편과의 경험을 떠올리면 불감증이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의 그녀는 적당히 데뷔를 끝마치고, 가족과 함께 무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
결혼 따위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를어 공부나 하고 고대 유적지 탐험이나 하면서 평생 살고 싶다.
하나 세상 물정을 몰라 호되게 당했던 전생의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니 애써 다르게 살아 보려 노력하고 있는 것뿐.
‘특히 가면무도회 같은 건 절대 얼씬도 안 할 거야.’
휘릭.
카이언의 리드에 따라 마지막 턴을 하며 다짐했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천이 겹겹이 겹쳐진 사이나의 치맛자락이 동그랗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사이나의 드레스 상의는 단순한 흰색 튜브탑 스타일이었지만, 그 위에 레이스 천으로 된 짧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턴을 할 때마다 망토가 슬쩍슬쩍 부풀었다가 내려앉으면서 어깨부터 등, 팔뚝의 하얀 맨살이 틈틈이 노출되고는 했다.
플로어 바깥에서 첫 춤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 대로 그런 사이나를 훔쳐보았다.
이윽고 음악이 끝났다.
사이나와 카이언은 마주 본 채 서로 인사를 한 뒤, 반대로 몸을 돌려 좌중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첫 춤이 끝났고, 파트너의 역할도 여기까지였다.
이후는 데뷔자를 눈여겨본 다른 사람들이 춤을 청할 수 있었다.
“카이언.”
“으, 응?”
“고마웠어.”
사이나는 짧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갑작스런 파트너 변경에 응해준 것도, 중간에 넋을 놓은 그녀를 살펴 이끌어준 것도, 다 고마웠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유리가 빠진 그들의 인연의 시작을 그가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로 카이언의 손이 잠시 올라왔다가 떨어졌으나, 사이나는 알 수 없었다.
웅성웅성.
묘하게 주변이 술렁인다고 느껴져 의아함을 느낀 것은 그때.
첫 춤이 끝났으니 가족의 곁으로 가야겠다며 주변을 살피던 사이나는, 흠칫하여 멈춰 섰다.
플로어 바깥에 선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있기에?
궁금증을 가지고 뒤를 돌았다가 사이나는 흠칫 놀랐다.
눈앞에 거대한 벽 하나가 서 있는 느낌. 놀라서 뒤쪽으로 몸을 물리다가 그녀는 그만 발이 꼬이고 말았다.
“헉.”
자칫 뒤로 자빠져서 망신을 당하기 직전,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사이나의 눈이 커졌다.
거대한 벽으로 보였던 것도, 그녀의 허리를 감은 것도, 한 사람의 소행이었다.
콘스탄틴 크레이머 공작.
그가 사이나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본 공작은 정말 커다래서 그녀의 시야 전체를 장악했다. 그의 뒤쪽으로는 무엇 하나 볼 수 없을 정도로.
두근.
놀라움과 당혹감이 뒤섞여 순간 말을 잊었다.
하얀 속눈썹으로 촘촘하게 감싸인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자 시선 자체가 그녀를 사로잡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소리가 끊기고, 사물이 지워졌다.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현실을 잊었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시작했으나, 그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겠는가?”
“…….”
그리고 정신이 들자 사이나는 그와 춤을 추고 있었다.
“…뭐, 뭐죠?”
“뭐가 말인가?”
“왜 제가 각하와 춤을…….”
“아까 요청할 때는 순순히 따라나서지 않았나. 무슨 소리지.”
“…….”
사이나는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오늘,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이상한 일을 꼽자면, 크레이머 공작과 그녀가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이 상황일 테지.
‘대체 왜?’
공작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자신이 아는 거지, 그가 사이나를 알 일은 없을 터인데?
크레이머 공작이 여태 남아 있는 것도 이상했다. 황족이 개회사를 여니 연회 초반에는 있어도 보통 금방 자리를 뜨고는 했다.
게다가 이건 데뷔탕트 볼. 병아리들이 자기소개 하러 나오는 파티에 그 정도 되는 사람이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와 공작의 접점?
갓 돌아온 이번 생에 그런 것이 있을 리도 없다.
비틀린 몇 가지 요인 때문인가?
‘드레스? 바뀐 파트너? 아님… 모레프 구경 간 거?’
으음…. 생각을 해봐도 역시, 모르겠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공작의 리드가 참으로 완벽했다.
춤을 배울 때 교사가 가르쳤던 정석적인 거리. 남자와 여자 사이의 거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거리.
딱 떨어지는 각도, 자로 잰 듯한 자세.
‘…거의 인간 교본 그 자체네.’
옷차림 또한 교과서처럼 차려입었다.
긴 팔의 예장, 커프스단추로 조여져 약간의 손목도 보이지 않게 닫힌 꽉 닫힌 소매, 꼼꼼하게 착용한 가죽 장갑.
베일 것처럼 다려진 바지와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군화까지.
함께 손을 맞잡고 아무리 춤을 춘들 피부 끝자락 하나 닿지 않을 것이다.
단정하다 못해 고지식해 보일 정도로 모범적인 차림새지만, 그렇다고 착해 보이느냐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턱 바로 아래까지 꼭꼭 닫힌 깃이 답답해 보일 정도이나, 그게 이 남자가 풍기는 날카로움을 깎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터져 나올 무언가를 꼭꼭 닫아 가두기 위해 목 끝까지 단추를 꼼꼼히 여며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이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워낙 큰 키 탓에 목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푸른 눈 바깥의 숱 많은 백색의 속눈썹은 마치 얼음물을 감싸고 얼어버린 서리처럼 보였고, 차갑고도 깊어 보이는 심해 같은 눈동자는 없는 죄도 탈탈 털어 그의 앞에 다 털어놓고 싶게끔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음…. 죄인 심문은 잘하시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