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6화 (16/233)

16화. 얽혀오는 시선들

“사이나.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부들부들 휘청거리는 사이나의 허리를 붙잡아오며 카이언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만큼 사이나의 안색은 엄청났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핏기가 가셔 있었다.

“의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지금 못 나가실 것 같으면 바로 알리겠습니다.”

시종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어왔다.

“그래, 사이나. 의무실로 가자. 너 안색이….”

엘리자베스의 파트너.

이전에는 유리였다.

지금, 똑같은 이 자리를 그때는 넷이서 지났었다.

엘리자베스와 유리, 사이나와 세이지.

엘리자베스와 함께 앞서 걷던 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 사야, 데뷔한다고 긴장했나 보네.」

그리고 주먹 쥔 손을 세워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어릴 때부터 하던 주먹치기.

쌍둥이인 유리와 사이나, 둘만 공유하던 파이팅의 제스처였다.

「빠샤!」

「-빠샤!」

유리가 사이나의 주먹 위쪽을 그의 주먹 아래쪽으로 콩 치면, 사이나가 되받아 콩 쳐서 올린다.

그러면 마법처럼 긴장감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 광경은 분명히 존재했던 기억의 한 장면으로 사이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율…. 유리야…….’

하지만 유리는 없다.

대체 왜 되돌아온 세상에는 네가 없는 것일까.

사이나는 찡하게 울려오는 눈을 부릅뜨며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사이나. 무리하지 말고 몸이 안 좋으면…….”

“카이언.”

“응, 그래.”

“…주먹 좀 이렇게 내밀어 볼래?”

“……주먹? 이렇게?”

카이언은 좀 이상하다 싶어 하면서도 사이나의 부탁에 따랐다.

멀거니 내민 카이언의 주먹 위로 사이나는 자신의 주먹을 천천히 내려 툭 치고, 다시 자신의 주먹을 아래로 내렸다 올리며 툭 쳤다.

“……빠샤.”

유리는 없지만, 카이언의 주먹을 기준 삼아 혼자서 위아래로 파이팅의 제스처를 취했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빠샤’까지 내뱉고 나자,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다.

“사이나, 방금 그거…….”

“……조금 괜찮아졌어. 너무, 긴장했나 봐.”

“…정말 괜찮아?”

“응. 미안.”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아픈 건 정말 아니지?”

“응. 괜찮아.”

둘의 호명이 임박했는데도 들어오지 않아 다급해졌는지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한 시종이 나왔다.

“드보프가의 영애님 되십니까?”

“네.”

“곧 호명되실 겁니다. 얼른 들어가시지요.”

“아, 네. 알겠습니다.”

사이나와 카이언은 다급한 시종의 안내에 따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내부에 커튼이 달린 출입구가 하나 더 보였다.

“발데즈 백작가의 삼녀, 엘리자베스 영애입니다!”

때마침 엘리자베스의 순서였던지 저 너머에서 호명 소리가 들렸고, 연둣빛의 드레스 자락이 커튼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하아….’

엇갈렸다. 일부러 늦게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지 홀랜더와 얼굴을 마주 댈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짝짝짝. 잠시 후에 바깥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사이나의 차례였다.

뒤로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번 건국제 데뷔탕트 볼은 사이나가 마지막 순서인 듯했다.

데뷔탕트 볼의 호명 순서는 가문의 등작과 위세에 따라 배분되는데, 뒤로 갈수록 고위 가문에 해당했다.

이는 약소 가문에 속한 사람도 주목을 받을 수 있게끔 한 장치다.

사람인 이상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아무래도 연회 초반에 호응도가 더 높았다.

그렇게 약소 가문의 영애들이 충분히 관심을 받고 나서 집중도가 떨어지더라도 참석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는데, 앞서 말했듯이 뒤로 갈수록 고위 가문의 영애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첫 데뷔자이거나 가장 아름다운 영애, 혹은 마지막 데뷔자가 제일 주목받게 된다고나 할까.

아니, 근데 잠깐. 마지막 데뷔자라 함은…….

‘…나잖아?!’

이 부분은 생각 못 했네.

딱히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지난 생에 데뷔했을 때는 자신의 뒤에 후작가 영애가 한 명 더 있었다. 앞은 아름다운 엘리자베스, 뒤로는 지체 높은 후작가 영애라서 사이나는 전혀 주목을 못 받았었다.

“사이나, 정말 괜찮겠어?”

“아…. 응.”

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사이나는 카이언의 손을 조금 세게 붙잡았다.

“오늘의 마지막 데뷔자. 드보프가의 독녀, 사이나 영애입니다!”

그녀의 차례다.

카이언은 사이나의 손을 마주 잡고는 시종이 앞서 들추어준 커튼 사이로 그녀를 이끌었다.

커튼 안쪽으로 짧은 복도가 더 있었다. 복도는 약간 어두웠지만, 그 덕분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반대쪽 출구가 더 잘 보였다.

연회홀로 입장하기 전, 사이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저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한순간에 쏟아진 빛살.

사이나는 갑자기 지나치게 밝아진 조도에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매달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였다.

그리고 시선들.

일시에 꽂혀 드는 이목을 느끼며 사이나는 천천히 홀을 훑었다.

전에 데뷔할 때는 이 시선들이 너무 숨 막히게 느껴졌었다. 그날 어떻게 등장했었는지, 나와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나중에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러나 두 번째라 그런지 예전처럼 그렇게 공황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다수의 눈초리가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무섭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의미가 없기에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이나는 단상 위에서 무심한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그 근원지로 시야를 돌렸다.

“……!”

이상한 것이 있었다.

아니, 이상한 것이 보였다.

콘스탄틴 크레이머 공작.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키잉-

순간 사이나의 시야가 일그러지며 그가 있는 공간만 다른 세계처럼 틀어져 보이기 시작했다.

연회장이 이렇게 밝은데 그가 포함된 일정 영역에만 어둠이 드리워진 느낌이다.

크레이머 공작은 퍼레이드 때 입었던 것과 유사한 예장 차림이었다.

흰색에 금색 띠, 금색 단추로 장식된 기사의 복장. 어두운 톤의 정장을 입은 다른 남성들에 비해 분명 환한 복장이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의상도 흰색이고, 머리카락도 밝은데.

어둠 한 점 깃들지 않을 것 같은 희디흰 백발에 맑은 호수처럼 시리도록 파르란 눈을 한 남자인데.

‘왜 이렇게 어두워 보이는 거지?’

마치… 그의 뒤에 커다란 어둠이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찌잉-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는 몸을 카이언이 붙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사이나? 괜찮아?”

그녀는 자세를 추스르며 재차 크레이머 공작을 보았다.

“…….”

사라졌다.

다시금 살폈지만, 아까의 이상하던 그 느낌은 공작의 주변에서 더 이상 감응되지 않았다.

낮에 퍼레이드 때도 그렇고…… 대체 뭐지?

혼란함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더 멀리까지 그의 주변을 살폈지만, 공작은 설산에 쌓인 만년설 같은 표정을 하고 그녀를 볼 뿐이었다.

“사이나.”

흠칫.

꽉 힘을 주며 잡아 오는 카이언의 손길 때문에 사이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인사해야지.”

속삭이듯, 작게 말해주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다급함이 담겨있었다.

연회홀로 입장했으면 이름을 밝히며 인사하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잠시 넋을 빼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저래.’ 하는 눈으로 보는 것이 이제야 느껴졌다.

‘아, 이런…….’

사이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세웠다.

카이언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와 섰다.

“제가, 긴장을 하여 잠시 굳었습니다.”

그리고 양쪽 치맛자락을 잡고 예법에 맞게 펼치며 인사했다.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드보프가의 사이나, 인사드립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그럴 수 있지.’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파트너가 애크로이드가의 영식이죠?”

“귀엽네요. 동갑으로 알고 있는데, 둘이 혼약이 오가는 사이라도 되는 걸까요?”

“흐음. 애크로이드가와 드보프가면, 둘 다 결혼 시장 최고의 신랑, 신붓감 아닌가요?”

사이나와 카이언이 다시 손을 마주 잡고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데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말들이 얼핏 들려왔다.

확실히 후작가의 후계자답게 카이언을 향한 관심이 컸다.

“그나저나, 드보프가의 영애가 입은 드레스. 청초하면서도 너무 예쁘네요.”

“흰색 드레스인데, 올해는 유독 유색이 많아서 오히려 눈에 띄어요. 이럴 줄 알았을까요.”

“색도 색인데 디자인도 예쁘지 않아요? 레이스 천으로 된 망토라니 귀여우면서도 살결이 비쳐서 약간 섹시하기도 하고…….”

“그러게요. 듣기로는 아를어에 미쳐서 꾸미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걸요?”

“맞아요. 나이답지 않게 어쩐지 좀 성숙미도 느껴지고…….”

그리고 사이나는 생각 못 했으나 그녀에 대한 주목도 역시 상당히 높았다.

이전 생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영애는 엘리자베스였다. 미모로 인해 후작가 영애보다도 더 주목받았었다.

사이나야 엘리자베스 바로 뒤에 입장을 했으니 상대적으로 평범해 보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같은 연두색의 의상을 입고 연이어 등장을 한 탓에 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건국제의 데뷔자와 파트너들은 모두 연회홀 중앙 댄스 플로어에 서 있었다.

사이나 역시 합류하기 위해 카이언과 함께 플로어로 내려가던 중에, 앞서 그곳에 있던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의 파트너가 누구인지 떠오르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눈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싶어 시선을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엘리자베스?’

그녀의 표정이 말도 못 하게 차가웠다.

항상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만 보다가 저런 표정을 보자 사이나는 생소하다 못해 약간 쭈뼛할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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