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소름 끼치게 익숙한 뒷모습
살짝 커진 눈동자와 벌어진 입. 마치 그녀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카이언?”
카이언의 등 뒤를 툭 치며 누군가 추가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계속 그 상태로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아이? 흐음.”
나타난 것은 아름다운 여성.
눈동자 색은 카이언과 달리 은회색이지만, 동일한 적색의 머리카락도 그렇고 같은 핏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로 닮아있었다.
바로 카이언의 누나인 키얼스틴 애크로이드였다.
“안녕하세요. 애크로이드가의 영애님. 저는 드보프가의 사이나입니다.”
“난 애크로이드가의 키얼스틴.”
“이렇게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카이언은 몰라도 후작 영애인 키얼스틴까지 직접 찾아오게 한 상황이라, 사이나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 너로구나?”
키얼스틴은 빤히 사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키가 크고 고양이상의 미형을 가진 여성으로, 육감적이면서도 지배적인 매력을 풍겼다.
그녀가 속눈썹을 깔며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무릎을 꿇고 그 앞에서 구애의 몸짓을 바쳐야 할 것 같은…….
그 영향력은 동성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키얼스틴이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사이나는 어쩐지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 동생 취향이…….”
키얼스틴이 입술을 늘이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미소 짓자, 볼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훌륭했네?”
키얼스틴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사이나의 턱 아래에서 멈췄다. 같은 여성임에도 손끝이 닿은 턱의 느낌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사실, 키얼스틴의 행동은 같은 귀족 사이에서 꽤나 무례한 것이었지만 어떤 유해함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사이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세상에, 이런 보랏빛 눈동자라니. 그대로 이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지는걸.”
사이나가 키얼스틴을 보고 방금 했던 생각을 자신에게 되돌리자 약간 묘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키얼스틴의 눈이 약간 커졌다.
“미소까지… 완벽하잖아. 응?”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키얼스틴의 얼굴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세이지의 손바닥이었다.
“이봐요. 영애님? 그 이상은 내 동생에게 해롭다고 판단하고 퇴장을 명해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약간 몽롱하기까지 해 보이는 키얼스틴의 나른한 눈빛이 세이지를 향하자 그는 살짝 움찔했으나, 이때다 싶게 사이나의 몸을 잡고 뒤로 빼냈다.
“하아…. 누나, 여기서 좀 이러지 말자. 죄송합니다. 인사부터 드렸어야 하는데…….”
키얼스틴의 어깨를 잡으며 카이언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카이언 누나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사이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이전 생에서는 사이나가 워낙 사교계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일찌감치 결혼해서 지방 영지로 가게 되는 바람에 키얼스틴과 접점이 없었다.
키얼스틴 애크로이드는 드미트리 백작가의 영애와 함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 중 하나인 ‘천년의 올리버 나무’ 멤버였다.
이름만큼이나 유서 깊은 그 살롱은 상류 귀족 사회의 가장 큰 축 중 하나이다.
당연히 사교계 영애들이 가장 선망하는 살롱이지만, 가입 조건이 말도 못 하게 까다로운 탓에 꿈을 꾸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키얼스틴이 워낙에 유명한 존재라 이름이라도 아는 거지,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금, 내 동생을 그새 꼬여내서 파트너 자리를 꿰찬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말이야.”
“…….”
“사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바꾸어 이 오라비와 파트너를…….”
세이지가 투덜거리며 사이나를 설득해 왔다.
그 와중에 키얼스틴은 “사야?”라고 그녀의 애칭을 입 안에서 굴려보며 눈을 반짝였다.
“흠. 애칭도 예쁘네. 사야.”
“고맙습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까? 사야. 내 친구들은 날 ‘키키’라고 부르거든. 너라면 날 키키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
“키… 키 언니요?”
키키 언니라니…….
사적인 애칭도 모자라 언니라는 호칭까지 허락을 받았다.
“그래. 따라해 보렴. 키키 언니.”
“…키키 언니.”
“후훗, 좋아.”
그리고 그녀가 허락받은 대로 키얼스틴을 부르자, 기다란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잘했다는 미소를 지었다.
사이나는 이상하게 그 미소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봐, 이봐. 거기까지. 지금 동생도 모자라서 누나라는 사람까지 내 여동생을 꼬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세이지는 사이나의 어깨를 감아 자신의 뒤로 사이나를 감췄다. 남매를 향해 갸름하게 뜬 눈이 아주 몹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이지 형. 그게 아니라…….”
“이상한 취향을 내 여동생에게 물들이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아주 불안해. 파트너 교체는 없었던 일로 하자구.”
“혀, 형. 누나가 예쁜 걸 보면 사족을 못 써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어.”
카이언이 당황한 말투로 세이지에게 변명했다.
“우리 사야가 예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엉?”
세이지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자꾸 늘어놓았다. 대체 세이지 오라버니 성격이 왜 이렇게 달라진 거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 또 떠오르는 생각은 이랬다.
‘율이 없어도 둘은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구나.’
애크로이드가와 드보프가는 대대로 사이가 꽤 좋았다고 한다. 거기에 세이지와 카이언은 둘 다 가문의 후계자이니 서로 접점이 많았을 테고.
그렇다고는 해도 세이지와 카이언은 나이차가 좀 있어서 좀 의외였다. 유리 없이도 서로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이가 되다니…….
똑똑.
“드보프가의 영애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서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었는데 입장 시간이 되었다.
카이언이 성큼 다가오더니 사이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팔의 접힌 각도부터 자세까지, 절도가 있다 못해 넘쳐났다. 나이에 비해 늠름하고 정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사교계에서 인기 꽤나 있을 것 같았다.
사이나는 카이언의 팔뚝 위에 손을 올렸다.
아니, 올리려고 했으나 중간에 손이 잡혔다. 세이지였다.
“사야. 다시 한번 생각을-.”
그리고 세이지의 손은 또 다른 손에 의해 막혔다.
키얼스틴이 부드럽게 세이지의 손을 잡아 사이나에게서 떼어 내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여기구나. 내 파트너.”
세이지의 눈이 커졌다.
“이, 이봐요. 영애님?”
“내 이름은 알죠?”
“뭐, 뭡니까?”
“사야와 닮은 얼굴이니 특별히 파트너를 허락할게요.”
“아니, 이 손 좀 놓고 대화를…….”
“뭐 해요. 에스코트 똑바로 하지 않고?”
세이지는 영락없이 끌려가는 포즈가 되어 대기실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질질 끌려 사라졌다.
정말 대단한 언니였다.
사이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하하. 네 누나, 너무 멋지셔.”
“…….”
한참 웃다가 혼자서만 웃고 있음을 깨닫고 민망해져서 카이언을 올려다보니 그가 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언?”
“……가자. 흠.”
자신의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린 카이언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뭐지.’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시간이 급박한지라 우선 그를 따라 나섰다.
바깥에 시종이 서 있다가 그들이 나오자 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시종의 뒤를 따랐다.
세이지와 키얼스틴은 데뷔자가 아니라서 홀 입구 쪽으로 간 것 같았다. 벌써 보이지 않았다.
데뷔탕트 볼은 일반 연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이미 데뷔를 치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게 사실, 재미있는 연회는 아니었다.
갓 데뷔하는 영애들의 풋풋함을 보는 잔잔한 맛이야 있을지 몰라도, 야회나 컨셉 파티 등에 비하면 지나치게 건전하니까.
어린 영애와 그들의 부모 및 조부모 등이 함께 참석하는지라 연령대가 상당히 넓었고, 그러다 보니 사교 자체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여러모로 재미가 없는 연회인 것이다.
그러나 참석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데뷔탕트 볼은 건국제 기간 첫날에 열리는 파티다.
하위 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다 같이 데뷔하는 방식으로 황실이 주관하는 연회로써, 개회사를 황제가 담당했다. 당연히 모든 귀족이 참석해야 했다.
새 세대를 여는 어린싹들을 축복하는 것이야말로 밝은 제국의 미래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취지 아래, 건국 시조 때부터 행해진 유서 깊은 연회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사이나에게는 치러내야 할 필수 행사에 불과했지만.
‘좋아.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돼.’
시종을 따라 모퉁이를 돌자 멀지 않은 앞쪽에 다른 커플이 보였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쪽도 데뷔자와 파트너인 것 같았다.
그런데 드레스의 색상이 익숙했다. 연둣빛이 살짝 도는 싱그러운 색상.
혹시…….
‘…엘리자베스?’
맞는 것 같다.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에서 봤던 그 드레스가 분명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차에 사이나는 순간 몸이 굳어 멈춰 섰다.
‘……저 남자는.’
갑자기 뒷덜미를 타고 싸한 냉기가 흘렀다.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는 더티 블론드의 남자. 그 뒷모습이… 어쩐지 역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사이나?”
순식간에 굳어 안색이 파래진 것도 모자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 사이나를 보며 카이언이 덩달아 놀랬다.
‘그 사람이야…….’
시종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며 보인 옆모습을 보니 더 확실했다.
이전 생에서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끌고 갔던 장본인.
‘조지 홀랜더.’
전남편이었다.
사교계를 데뷔하면 언젠가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금방일 줄이야.
스치듯 지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진저리에 가까운 끔찍함이 차올랐다.
‘지금 저 방으로 들어가 그자와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눠야 한다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기도 했다.